전체301 이창동의 [버닝]: "항상 너만을 사랑해" vs. "내가 제일 잘 나가" 아래 링크된 지퍼의 곡,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고 싶다. 개인적으로 어렸을 적 좋아했던 노래다. 지금 시점에서 듣고 있으면, 순진함이 남아있어 여전히 마음이 가는 곡이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곡이다. 여자의 마음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20대 초반 남자 아이의 어리숙한 풋사랑의 정서를 잘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의 쌀쌀맞은 태도 앞에서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를 느끼며 의기소침해지다가도 결국에는 "변하지 않는 게 있어. 항상 너만을 사랑해!"라고 소리치는 부분을 보라. '순진무구함'이란 미스테리를 사랑이라는 이름의 결심으로 승화하고자 하는 태도를 뜻한다. 언젠가부터 한국의 대중 가요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의 하나가 바로 지퍼의 곡이 보여주는 순박함이다. 2010년대를 지나.. 2019. 6. 22. Surl, "Cilla" 아래 설의 "Cilla"라는 곡의 인트로와 이어지는 메인 리프를 들어보면 알겠지만, 지금 이들은 젊은 록 밴드가 달성할 수 있는 최고조의 감각을 선보이고 있다. 전성기로 진입하는 록 밴드의 음악을 듣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즐거움이다. 어쩐지 어린 시절 내가 거닐던 음악적 고향에 다시 온 듯이 느낀다. 뮤직 비디오의 마지막에 저 미친듯 아무 규약 없이 각자 뛰노는 모습을 보라. 저것이 1990년대 나로 하여금 록 음악에 매료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원동력이었다. 아이돌의 군무를 깨트리는 음악이 내가 듣는 록 음악의 정체다. 규정된 아이돌 음악에 대한 안티테제가 요구될 때가 바로 록 음악이 살아나는 시간이다. 그 시절이 다시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난 아이돌 음악을 결코 내 영혼.. 2019. 4. 28. 이상은, [Romantopia] 이 앨범이 벌써 14년 전 이야기다. 이 앨범이 내가 찾아들은 이상은의 마지막 앨범으로 기억한다. 그 이후 그녀의 음악이 별볼일 없어져서 안들은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내 인생이 한 장에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듯 이상은도 내 음악 청취의 중심에서 물러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앨범은 내 20대의 가장 푸르렀던, 그리고 아직 풋풋함이 남아있었던, 시절의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헨리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에 나오는 마담 멀이라는 인물이 한 말이 생각난다. 마흔 살이 지나고 나면 감정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게 그것이다. 판단력을 얻는 대가로 감정을 잃게 된다는 뜻이다. 반대로 말하면 마흔이 되기 전까지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 이전까지는 그저 감정과 열정에.. 2019. 4. 12. 패닉, [패닉] 어린 시절 애착을 가지고 들었던 앨범의 하나다. 10대 시절의 특권 중 하나는 별것 아닌 것도 놀라움 속에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아래 앨범을 기억하는 방식이 그렇다. 지금 들어보면 마치 데모 앨범 같은 작업 상태를 보여주는 앨범이다. 기술적으로 발전된 최근의 아이돌 음악에 비교하자면 너무도 소박하다 못해 아마추어적으로 들린다. 특히 "왼손잡이" 같은 경우 지금 들으면 멜로디나 창법이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이 앨범에 실린 많은 곡의 멜로디나 창법이 사실 대체로 그러하다. "더"라는 곡 하나가 예외이지 싶다. 그러나 당시 내가 듣기에 이 앨범에는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음악적 야심이 있으면서도 반항적이고 또 지적으로 들리는 면모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쉽게 말하면, 감수성 예.. 2019. 4. 6. 친밀함, 내재성, 생태학, 정동, 삶 미국의 문학 연구 영역에서 근래 가장 주목 받는 단어의 하나는 '친밀함'(intimacy)다. 이는 철학적 개념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개념의 층위를 건너뛰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사실 여기에는 철학적 배경이 분명히 있다. '내재성'(immanence)이 그것이다. 20세기 말 철학 영역으로부터 불어온 들뢰즈 바람을 떠올려보라. 그를 21세기적으로 수용한 문학 연구 판본이 '친밀감'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들뢰즈의 흔적을 더듬는 것은 전혀 요점이 아니다. 사실 근래 미국 문학 연구계의 특징은 신진 연구자들이 20세기 후반 불어온 프랑스 철학을 이제는 그들 자신의 것으로 수용한 후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사용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예컨대, 들뢰즈는 여전히 미국 문학 연구 영역에서 중.. 2019. 3. 17. NIN, "We're in This Together" 펄잼이 1998년작 [Yield]에서 들려준 기타 연주와 아래 것을 비교해보자. 나인 인치 네일즈의 1999년작 [The Fragile]에서 기타 음이 사용되는 방식을 보면 연주자의 '손맛'을 제거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인더스트리얼 록'이라 불리는 것과 록 음악 일반 혹은 '얼터니티브 록' 사이의 차이다. 요점은 인더스트리얼 록에서는 기타 연주에 있어 연주자의 개성이 사라진다는 데 있다. 마치 기계가 기타를 연주한 것 같은 느낌에 가깝다. 이들의 장르가 '인더스트리얼 록'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 공장에서 생산된 것인듯 들리는 비인간화된 기타 연주에 있다. 사실 1990년대 초 '얼터니티브 록'에서 1980년대 장인 기타리스트들이 보여주었던 기교는 이미 별로 중.. 2019. 2. 11. Pearl Jam, "Do the Evolution," "Brain of J." 이 앨범의 녹음 상태는 21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최상이다. 훌륭한 기타 톤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 드럼 녹음이 타격감과 공간감을 잘 잡아내고 있다. 이 앨범의 요점은 합성된 전자음 등을 사용하지 않고서 록 밴드가 달성할 수 있는 최상의 실제 악기 연주 소리를 담아낸다는 데 있다. 요즘 찾아보기 힘든 '맛있는' 질감의 소리다. 이런 앨범은 소리의 질감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전자 음악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요소다. 요리에 비유하자면, '손맛'이 느껴지는 소리다. --Yield (1998) 2019. 2. 10. 공중도둑, 윌리엄 모리스, 장르, 유토피아 아래 공중도둑의 [무너지기]를 문학 작품에 빗대어 말해보자면 어떤 것에 가장 가까울까? 윌리엄 모리스의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온 소식](News from Nowhere)이 어울리지 싶다. 혁명 후 모든 모순이 해소되어 사라진 유토피아적 세계의 모습을 담아내는, 사회주의자의, '소설'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종종 이른바 '공상과학'(science fiction)의 시초로 분류되기도 하는, 작품 말이다. 그러한 이유로 해당 작품은 백일몽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 화자는 친구가 꿈에서 본 미래 사회의 모습을 이야기해주고 있을 뿐이다. 화자가 처한 시공간에 바로 그 미래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슷한 맥락에서 공중도둑의 아래 앨범은 마치 장르가 없는 음악 같이 들린다. 아래 음악에서 어떤 삶 혹은 시공간에 뿌.. 2019. 1. 22.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미세 플라스틱, 그리고, 가짜 정치 오늘날 과학은 철학과 달리 '존재'라는 말 대신 '물질'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달리 말하면, 과학은 현상을 물질간의 상호작용으로 환원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예컨대,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되었기 때문이다. 즉, 사랑은 더 이상 형이상학적 존재의 경험이 아니다. 거꾸로 그러한 경험은 당신의 유전자가 눈 앞의 사람과 섹스를 하여 자손이라는 형태의 DNA를 남겨 자기 복제를 달성하기 위해 택한 책략의 결과일 뿐이다. 여기서 이제 일말의 정신적 층위가 포함되었던 행복감은 섹스가 주는 물리적 쾌락과 구분되지 않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이제 플라톤적 사랑은 순전한 에로스적 사랑으로 완전히 대체된다. 그러나 '에로스'라는 신화적 은유는 이미 부적절하다. 만약 과학적 사.. 2019. 1. 16. 이전 1 ··· 21 22 23 24 25 26 27 ··· 3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