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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오키, "점도면에서 최대의 사랑" 곡의 제목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 것인지, 점도면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사랑이 있고, 그것이 최대라는 것, 그리고 미지의 공간이 있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다. 언어의 세계 밖에 머물고자 하는 음악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그냥 닥치고 음악이나 들어'라는 뜻이다. 맞다, 음악은 그렇게 시작된다. 회화의 영역으로 치자면 우연성을 강조하는 잭슨 폴락 같은 유형이다. 물론, 아래 곡은 김오키의 곡 치고 얌전하며 아주 듣기 편한 유형에 속한다. 그러나 그의 다른 많은 곡은 곡이 어떻게 우연히 혹은 즉흥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For My Angel" 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2020. 6. 8.
박문치, 1990년대, 언어, 이미지, 검열 아래 박문치의 곡에는 1990년대를 단순히 조야하게 '베겼다'고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그 시절을 직접 살아본 사람으로서 너무도 편안하게 그때 그 시절 곡을 듣듯 들을 수 있다. 마치 최근 내가 원했던 이상적 곡이 이런 것이 아니었는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누군가가 '박문치가 누구야?'라고 물으면, '30년 전 10대들 사이에서 최고 우상이었던 박문치도 기억 못하냐?'라고 핀잔 섞인 답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이 말이다. 1990년대에 박문치가 없었던 것은 시대가 그를 이미 잉태하고 있었으나 다만 무슨 바쁜 일이 있어서 제때에 생명체로 진화시키지 못했던 사정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내가 너무 일찍 태어났거나, 아니면 박문치가 너무 늦게 태어났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아래 비디오의 '영상미.. 2020. 6. 6.
뉴트로, 공상과학적 과거, [88/18], 서울올림픽 아래 [88/18]이라 이름 붙여진 '서울올림픽 3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영상을 통해 어떻게 '복고'가 '세련됨'의 원천이 될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요즘말로 치면 '뉴트로'는 '레트로'와 다르다. 어째서 그러한가? 아래 영상의 8할을 차지하는 것은 1980년대에 찍혀진 영상이다. 그 자체로는 무척이나 촌스러운 것들이다. 만약 해당 영상을 통째로 본다면 지겨워서 금방 정지 버튼을 누르고 말 것들이다. 그러나 아래 다큐멘터리 속에서 80년대 영상은 새 생명을 얻고 있다. 그 원인은 편집 기법에 있다. 다큐멘터리의 의미 지평을 완결시키는 '나래이션'이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80년대 영상은 현대 미술관에서 관람하는 일련의 박제된 이미지와 같이 제시된다. 파편으로 박제된 이미지는 세련되다. 땀내나고.. 2020. 6. 4.
이자람, 심청가 (뮤지컬 '서편제' 중에서) '소리'는 '음악'과 다르다. 아래 것을 '음악'이라 부른다면 무례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소리는 음악 이전의 영역과 맞닿아있다. 음악적 승화 이전의 영역 말이다. 보통 이를 '한'의 영역이라 부른다. 혹은, 소리는 저승으로부터 들려오는 절규라고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산 자의 관점에서 말해보자면, '무섭다'는 느낌에 근접하게 되는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 '소리'다. 그런 의미에서 '소리'는 듣는 이를 서슬 퍼런 귀신의 영역으로 인도한다고 말해볼 수 있다. 즉, '소리'를 듣는 것은 살해당한 자가 육체도 없이, 산자의 동의 없이 그 자신의 권한만으로, 다시 찾아오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리'는 현상학적 경험의 영역 자체가 파열될 때 찾아온다. 경험이 파열되.. 2020. 5. 9.
Yo La Tengo, "And the Glitter is Gone" When it comes to Yo La Tengo, the noisy is the beautiful, or vice versa. The line is blurred between the beautiful and the ugly. Look at the video below. The number has no development, no voice. Only an endlesssly self-repeating loop of an idea-rift. The world is not a story in this number. Yes, it is a 'number.' It is not a song, not a track, but a number which differentiates itself into a thou.. 2020. 4. 20.
원슈타인, "얼음별" 랩 음악을 그다지 즐겨 듣지 않는 사람 입장에서 말하건대, 랩 음악의 감수성 밖에서 말하건대, 최근 들어본, 최근 등장한, 랩 음악 중 가장 뇌리에 남는 곡이다. 이 친구에 대해 아는 바라고는, 주로 마미손과 어울려 다닌다는 것, 요즘 젊은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돌식 래퍼와 달리 화장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 사진에서 보다시피 크게 꾸미고 다니지는 않는 것 같다는 것, 그리고, 추정컨대, 원슈타인이라는 이름이 '아인슈타인'에서 독일어 'ein'을 말그대로 영어로 번역하여 'one'으로 바꾼 경우일 것이라는 정도다. 이 정도면 대단한 신상정보이지 않은가? 2020. 3. 10.
이날치, "범 내려온다" 아래 곡을 보고 있으면 미국 아마존에서 파는 한국산 호피무늬 담요가 생각난다. 시공간이 완전히 뒤틀린 느낌이다. 특히, 온스테이지 특유의 텅빈 공간을 보라. 장소가 상실되어있다는 것이 요점이다. 진공과 같다. 진공 속에서 조선 시대 음악이 소환된다. 아마존을 생각해보라. 아마존의 특징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물론, 사이버 공간은 기하학적 공간이다. 미국인들 사이에서 뜬금없이 한국산 호피무늬 담요가 팔리는 것은 바로 이 수학적 공간 속에서다. 동일한 방식으로 아래 영상에서는 흔히 국악이라 불리는 전통적 삶의 양식이 기하학적 공간 속에 출현한다. 이 때문에 아래 시도는 음악 자체로서 중요한 사례이지 않다. 그보다는 새로운 시공간을 창출해보겠다는 문화적 기획의 일환으로서 중요하다. .. 2020. 3. 1.
데미안, 아브락사스 20여년 전 읽은 [데미안]을 다시 보고 있으면, 20세기 초반의 소설들이 그런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언어가 과도하게 추상적이고 사색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죄의식에 빠진 한 인간의 정신사를 다루는 이야기인만큼 신체에 대한 감각적인 묘사가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스티븐 디덜러스를 생각해보라. 어린 시절 그에게 기독교는 죄의식을 심어주는 공포의 원천과 같았다. 당시 소설의 분위기가 그랬다. 사실 [데미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거의 상징주의적 언어를 사용한다. 아래 유명한 구절에서 보듯, 싱클레어에게 '새'는 자연도감에 나오는 새가 아니다. '새'는 '아브락사스'라는 '신'을 향해 날아오른다. 마찬가지로 '새'가 깨고 나오는 '알'은 '새'의 부.. 2020. 2. 8.
Floating Points, [Crush] Worth listening. While all synthesized, not at all indifferent to the feeling heart of today's sentient beings. That is, music below is itself feeling and seems to be responsive to what it contacts, or put the other way around, be responsive to what reaches out to it. Seems to have sensing antennae on it. Can be called a mechanically living, musical being. Strangely pleasant. Impossible not to l.. 2020. 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