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과학은 철학과 달리 '존재'라는 말 대신 '물질'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달리 말하면, 과학은 현상을 물질간의 상호작용으로 환원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예컨대,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되었기 때문이다. 즉, 사랑은 더 이상 형이상학적 존재의 경험이 아니다. 거꾸로 그러한 경험은 당신의 유전자가 눈 앞의 사람과 섹스를 하여 자손이라는 형태의 DNA를 남겨 자기 복제를 달성하기 위해 택한 책략의 결과일 뿐이다. 여기서 이제 일말의 정신적 층위가 포함되었던 행복감은 섹스가 주는 물리적 쾌락과 구분되지 않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이제 플라톤적 사랑은 순전한 에로스적 사랑으로 완전히 대체된다. 그러나 '에로스'라는 신화적 은유는 이미 부적절하다. 만약 과학적 사랑이 에로스적 사랑이라면 여기서 에로스는 영혼이 제거된, 기계 부품으로 만들어져 대량 생산되는, 복제품 에로스 혹은 공산품 에로스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철학으로부터 벗어나 마침내 구체적이고 증명가능한 과학을 이야기하게 된 것을 환영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데카르트와 함께 철학이 신학으로부터 독립했을 때 사람들은 자유라는 말의 의미를 '인간'으로서 몸소 느끼기 시작했다. 그 인간적 '계몽'의 정점에 있는 것이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이지 않은가? 비슷한 방식으로 오늘날 과학은 철학으로부터 독립하고 있는듯 보인다. 그러나 과학의 언어가 수학이라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예컨대, '과학'과 함께 '인간'이라 불리는 경험 가능한 형상은 AGTC로 이루어진 DNA 염기서열 구조가 일으키는 환영으로 격하된다. 즉, 과학이 말하는 물질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경험 가능한 구체적 특성을 전혀 지니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적 물질은 추상적이다. 다시 말하면, 과학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물을 이해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수학을 이해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철학으로부터 과학이 독립했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여기서 역설은 과학과 함께 다시 한번 '인간'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형상'이 사라질 때 나타나는 것은 '추상'이다. 철학만 추상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실은 그 이상으로 과학 또한 추상적이며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그러나 오늘날 흥미로운 사실은 철학이나 과학 둘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유독 과학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바로 그러한 이유로, 예컨대, 대학에서 과학을 더 공부해보고자 한다. 솔직히 말하자. 대학 진학 시점에서 과학이 무엇인지 정말 알고서 이공계로 진학하는 18살 짜리는 없다. 알기 때문이 아니다. 모르기 때문에 알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에 대해 그러한 열정을 보이는 18살 짜리는 잘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차이가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중고등학교 교과에 '수학'과 '화학'과 '물리학'과 '생물학'은 있어도 '논리학'이나 '인식론'이나 '존재론'이나 '형이상학'은 없기 때문이다. 윤리 과목에서 철학을 다룬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고등학교에서 기계적으로라도 수학을 배우는 정도에 비하면 그저 이러 저러한 철학자가 있다는 이름 정도 암기하고 넘어가는 수준이다. 쉽게 말하면, 학교에서 철학을 하나도 가르치지 않기에 친숙하지 않아서 못알아듣는 것 뿐이다. 그래서 더 나아가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 배경에 있는 '실용적'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철학과 달리 과학을 통하면 사물을 얼마간 조작하여 보다 직접적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돈은 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과학'이다. 그러나 사실은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과학을 다루는 사람들의 특성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그들의 연구가 사회에 미치는 파장을 마치 남의 일 같이 여긴다. 그들은 항상 자기는 순수하게 과학을 탐구했을 뿐이라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거꾸로 그들이 자기가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불'을 아이들의 손에 맡기는 것과 같지 않은가? 왜 프로메테우스는 그 놀라운 테크놀로지의 근원인 '불'을 인간에게 전해주는 '좋은' 일을 한 후 정작 그 자신은 바위에 묶인 채 매일 같이 독수리가 와서 자신의 간을 파먹어야 하는 형벌에 처해져야만 했는가? 아이들이 불장난을 하다 초가삼간을 다 태우게 되는 일은 실제로 종종 일어나는 일이지 않던가? 차이가 있다면 이제는 그들이 발견한 것이 지구 자체를 다 태워먹을지도 모를 단계로 치닫고 있다는 데 있다. 지구 온난화를 보라. 혹은, 지구를 뒤덮고 있는 미세 플라스틱 등을 보라. 바다 속 미세 플라스틱을 먹은 물고기를 우리는 맛있게 먹는다. 우리는 맛있게 미세 플라스틱을 먹고 있다! 바로 그 놀라운 과학의 추상성은 이 때가 되어서야 '구체적'으로 '체감'된다. 즉, 우리는 그 끝에 미세 플라스틱을 맛있게 먹기 위해 과학을 열심히 공부한 것이다.
여기서 요점은 사실은, 철학이 아니라, 과학이야말로 추상적인 학문이라는 것이다. 너무 추상적이라서 그 요지가 무엇인지 공허함에 빠지게 될 정도로 말이다. 바로 이 추상성 때문에 과학자들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도대체 알지 못하게 된 것이지 않은가? 이 지점에서 추상적 물질의 문제로부터 존재의 문제로 다시 되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존재의 영역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물-대상은 구체적인가? 존재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철학 이전에 전통적으로 종교에서 많이 다루어왔다. [성경]이 어떻게 '존재' 혹은 '있음'을 설명하는지 한번 보자. 사실 이 점에 있어 [성경]은 무척 독특한 언어를 사용한다. 고린도전서 8장 6절을 보자.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느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를 말미암았느니라.
But to us [there is but] one God, the father, of whom [are] all things, and we in him; and one Lord Jesus Christ, by whom [are all] things, and we by him.
형이상학의 극치다. 하나의 신이라는 말 이외에 그 어떤 구체적 사물-대상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대단히 지적이며 세련된 혁신적인 언어다. 여기에 '우상 숭배'라고는 없다. 사실 고린도전서 8장의 맥락 자체가 그렇다. 이에 비하면 우리가 흔히 '문학'이라 알고 있는 것의 언어는 그 자체 우상 숭배의 언어에 다름 아니다. 대상과 사물에 대한 온갖 묘사로 이루어진 것이 문학이지 않던가? 오비디우스의 [변신]을 보라. 예컨대, 아래와 같은 대목:
그들은 내려가서 머리를 가리고 옷의 띠를 풀고는 / 명령 받은 대로 돌들을 자신들의 발자국 뒤로 던졌다. / 그러나 돌들이 (만약 오랜 세월이 증인 노릇을 해주지 않는다면 / 누가 이를 믿겠는가?) 단단함과 딱딱함을 잃고 서서히 / 부드러워지기 시작하더니, 일단 부드러워지자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 그러고 나서 돌들이 자라 더 부드러운 본성을 갖게 되자 / 그 형태가 사람의 모습처럼 보였다. 아직 그리 또렷하지 않고, / 갓 시작한 작업 탓에 충분히 마무리되지 않은 / 미완성 상태의 대리석상들 같았다.
Down they go, / Veiling their heads, untying their robes, and throwing stones / Behind them just as the goddess had ordered. / And the stones began (who would believe it / Without the testimony of antiquity?) / To lose their hardness, slowly softening / And assuming shapes. When they had grown and taken on a milder nature, a certain resemblance / To human form began to be discernible, / Not well defined, but like roughed-out statues.
이 또한 '고린도전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기원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얼마나 다른 종류의 설명이란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오비디우스의 묘사가 '모든 생명이 단일한 원형에서 왔다'고 말하는 다윈의 생물학적 설명에 의외로 잘 부합하는 면이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가? 물론, '돌'이 모든 사물의 실체라는 오비디우스식 설명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차라리 아리스토텔레스가 낫다. 그에게 사물의 실체는 '물'이고 '불'이고 '공기'이고 '흙'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조차 '하나의 신'을 말하는 [성경]의 혁신에 비하면 추상성의 단계에 있어 한 수 아래에 있는 듯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차라리 원자론을 펴는 에피쿠로스로 가는 편이 낫다. 관련하여 같은 에피쿠로스 학파에 속하는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보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왜 자연은 인간을 몹시 거대하게 만들어 그가 바다를 휘저어 건너 다른 대륙으로 건너가도록 만들지 않았는가? 그의 손으로 거대한 산들을 서로 뜯어낼 만큼 충분히 힘이 세게 만들지 않았는가? 그리고는 여러 세대 동안 살도록 만들지 않았는가? 인간이 그토록 거대하지 않다는 것은 모든 것이 특정한 물질로 만들어져 있고 이 물질이 존재하는 것들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무로부터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고 인정해야한다.
Again, why cannot Nature make a man / So large that he could wade across the deep to other lands, / Mighty enough to wrench apart great mountains with his hands / And outlive generations, unless everything consists / Of certain matter, and this matter limits what exists? / We must, therefore, confess that nothing can emerge from nothing,
물론, 위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요점은 무에서 유가 나올 수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있다. 인간의 크기가 거대한 산과 같지 않고 깊은 바다 같지 않은 이유는 물질적 제한이라는 원칙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유한하다. 그리고 그 유한성은 질료의 유한성으로부터 기인한다.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의 육신은 '물'이든 '흙'이든 '공기'든 '불'이든 그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결론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추상성의 단계에 있어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원자론'이다. 물질의 기본 단위는 '원자'이지 '물'이니 '흙'이니가 아니란 뜻이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물질계의 추상성이다. 즉, 모든 사물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의 '혁신'은 원자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무로부터의 창조 (creatio ex nihilo)를 말한다는 데 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가 '하나의 신'이라 부르는 것의 정체다. 여기서 추상성은 원자라는 추상적 물질의 차원에조차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 것도 없음,' 즉, '무'의 단계로까지 나아간다. 말하자면, 물질 이전에 무가 있다는 뜻이다. 물론, '없음'은 '신'의 비물질성을 통해 '있음'을 영원성의 관점에서 재정비하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기독교와 플라톤주의가 만난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전제하는 영원한 형상의 존재적 세계를 기억하라. 여기서 의외로 기독교-플라톤주의에 데모크리투스나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이 달성하지 못한 수학적 층위가 하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한다. 그것은 '제로'의 층위다. 물론, 원자론에도 '공백'(void)이라는 개념이 하나 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물질과 직접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즉, 원자와 공백은 서로 중첩되지 않는다. 둘은 평행한다. 그렇다면 원자는 대체 어떻게 형상을 얻게 되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클리나멘'(clinamen)이다. 원자의 무작위적 휘어짐 말이다. 이는 원자와 공백을 서로 뒤섞는 우발성의 발생을 뜻한다. 물론, 이 우발성은 '제로' 이전에 위치한다. 즉, 여기서 사물의 형상은 '제로'의 개입 없이 얻어진다. 이것이 에피쿠로스주의와 플라톤주의 사이에 놓인 만회될 수 없는 차이다.
과학으로 돌아가자. 지난 [알쓸신잡 3]에서 유시민이 흥미로운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과학자 김상욱이 지닌 사고방식에 일말의 부러움을 표하며 왜 자신은 어린 시절 과학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것인지, 예컨대, 1976년에 나온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같은 책을 청년 시절부터 읽어서 과학자가 되었더라면 어땠을지,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약간의 의문을 표한 것이다. 예컨대, 그가 청년 시절 읽었던 책은,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아니라,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이었다. 여기서 유시민은 과학과 흔히 정치라고 여겨지는 것을 대조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잘못된 인상을 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맑스가 사실은 수학에 능통했으며 그의 [자본론]은 자본을 과학자와 같이 연구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언급해야한다. 사실 맑스는 과학자나 다름 없었다. 자연과학이, 예컨대, 사회과학과 완전히 갈라서게 되는 것은, 19세기 막스 베버에게서부터 시작된 현상이하기는 하지만, 20세기에나 와서 완료된다. 그리고 사실 [자본론]은, 우리가 지금의 분화된 학문 분과 구분에 맞추어 흔히 믿는 것처럼, 단순한 경제학 서적도 아니고 사회과학 서적도 아니고 철학 서적도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자본이라는 제2의 자연을 다루는 과학 연구서에 다름 아니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인문주의적이었던 젊은 맑스와 구분되는 후기 맑스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론적이고 과학적인 [자본론]과 달리 [공산당선언]이 사회 변혁과 실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좋은 예다. 유시민이 자연과학과 구분하며 말하는 사회과학 혹은 인문과학이라고 여기는 것이 바로 이 실천론이다.
여기서 다시 20세기 중후반 한국 사회로 돌아가보자. 1970-80년대 한국 사회에서 유시민과 같이 양심이 있고 똑똑한 사람이 결코 과학을 할 수 없었던 데에는 정확한 이유가 있다. 과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조건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그것은 사람이 자연을 아무런 왜곡 없이 직접 관찰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학의 탄생이 경험주의 철학과 함께 하는 이유다. 한 예로 서구에서 자연과학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예컨대, 종교가 제거되어야했다. 종교가 자연을 직접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불필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존재의 근원에는 다만 '하나의 신'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신'이 모든 것을 창조했는데 대체 무엇을 더 알고자 자연을 직접 '두 눈으로' 살펴봐야한단 말인가?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기독교에 놀라운 정치적 실천력이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보지 않고 믿는' 데 있다. 흥미로운 점은 거대한 형이상학을 지닌 기독교가 실은 이론 종교가 아니라 실천 종교라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맑스가 남긴 말을 응용해보자: '사람들은 지금까지 자연을 다만 이해하려 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연을 변혁하는 것이다.' 자연을 객관적으로 무심하게 관찰하는 것이 세계를 '추상성'의 단계로 떨어뜨리는 일에 다름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의 주관과 구분되어 존재하는 추상적 객관 현실을 하나 정초해내고자 하는 것이 오늘날 '과학'이 하고자 하는 일이지 않은가? 20세기 루카치와 같은 사람이라면 이 객관 현실을 '물화'라는 말로 설명할 것이다. 바로 이 물화된 추상적인 혹은 과학적인 자본주의의 현실을 변혁하고자 한 것이 [공산당선언]이다.
오늘날 '물화된 현실'이 뜻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좀더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이는 '자연'이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제2의 자연이다. 이는 자연과학이 연구 대상으로 삼는 바로 그 '자연'이 사라져버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자본'이다. 오늘날 '자연'은 '자본'이다. 다시 한번, 지구 온난화와 미세 플라스틱 등을 떠올려보라. 우리가 자연 속에서 보는 것은 놀랍게도,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즉, 자연 속으로 침투한 미세 플라스틱과 하나된 자연이 바로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제2의 자연'이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더 이상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즉자적 자연을 만나지 못한다. 그러한 이유로 오늘날 자연과학이 자연을 연구하고 있다는 말은 사실 정확하지 않다. 오늘날 자연과학이 연구하는 것은, 예컨대, 미세 플라스틱을 머금은 자연이다. 그것이 순수 과학과 구분되는 응용 과학의 특징이지 않은가? 혹은, 미세 플라스틱이야말로 응용 과학의 '성과'이지 않은가?
유시민으로 돌아가자. 1970-80년대 한국 사회에서 '자연'을 가리고 있던 '제2의 자연'이라는 장막이 적어도 미세 플라스틱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미세 플라스틱 못지 않게 자연을 왜곡하는 또 다른 힘이 한국 사회에 있었다. 그것이 독재 정치다. 독재 정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순수한 호기심을 가지고 자연과 마주할 자유를 주지 않는다.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자연과학에 앞서서 사회과학이 태동하게 되는 방식이다. 말하자면, 한국 사회에서 자연과학이 가능해지도록 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 예컨대, 유시민이 젊은 시절 몸담았던 사회과학이다. 예컨대 독재 정권의 잔당에 다름 아닌 오늘날 자유당 세력이 내보이는 무척이나 반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작태를 보라. 그들이 국회에서 하는 일은 합리적으로 법안을 만들고 통과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 뜻대로 국정을 '농단'하기 위해 '기술'을 써 모든 것을 3류 '정치쇼'로 만든다. 그렇게 '가짜 정치'를 상연하여 사람들의 삶을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들의 사익을 위해 자연을 왜곡하고 교란하는 미세 플라스틱과 같은 자들인 것이지 않은가? 혹은, 외래에서 들어와 토종 개구리를 잡아먹는 황소개구리이지 않은가? 그들의 친일 전통을 보라. 그들이 [곡성]에서 우리가 본 바로 그 '외지인'이다. 1980년대 바로 이 뒤틀린 제2의 자연을 다루고자 등장하게 되는 것이, 자연과학이 아니라, 사회과학이다. 독재가 횡행하는 수상하고 어두운 시절에 양심이 있는 사람이 자연과학자가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황소개구리가 토종개구리를 다 잡아먹는 광경을 '객관적'으로 관찰한 후 그 안에서 '자연의 놀라운 섭리' 혹은 '신의 섭리'를 발견하고 감탄하고 있을 것이란 말인가? 물론 오늘날 한국의 많은 주류 대형 교회는 바로 그것을 '신의 섭리'라 여기고 심지어는 그 섭리에 열심히 동참한다. 반면 그러한 부조리 앞에서 니체와 같은 사람은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게 된다.
거꾸로 말해보자. 인간이 개입하는 한 과학은 순진하지도 무구하지도 않다. 따라서 진실로 자연과학이 대접받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면 독재 잔당이 다시 집권하게 놔두어서는 안된다. 그들의 정치는, 요즘말로, '가짜 정치'에 불과하지 않은가? 자연과학에 복무하지 않는 정치를 '가짜 정치'라고 부른다고 해서 실례될 일은 없지 않은가? '가짜 뉴스'를 논하기 이전에 한국 사회에서 한국당을 중심으로 항상 '가짜 정치'가 횡행해왔다는 점부터 분명히 '자연과학'의 입장에서 직시해야 할 것이다. 정확히 자연과학자가 되기 위해서 동시에 한 사회의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혹은, 자연과학자가 되기 위해 동시에 인문과학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21세기 제사장'이라 불리는 자연과학자가 아니라, 여전히 인문주의에 기반한 유시민이 한국 사회에서 스승 역할을 하는 이유이지 않은가?
* 인용문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성경]의 영역은 킹제임스본, 한글 번역은 개역개정판에서 왔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한글 번역은 천병희, 영역본은 스탠리 롬바르도(Stanley Lombardo)의 것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영역은 A. E. 스털링스 (A. E. Stallings)의 것이고, 한글 번역은 내가 직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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