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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h, "Swallowed" 1990년대 록음악이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었는지 확인하는 데 사료적으로 도움이 되는 곡이다. 부시는 메인스트림에서 최상급 인기를 구가하는 밴드는 아니었으나, 시대를 풍미한 대형 밴드들 틈에서 나름의 인지도를 구축할 정도는 됐다. 의외로 지금까지도 활동하는 영국 밴드다. 모든 면에서 미국 그런지풍이라 영국성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당시 우후죽순으로 등장하던 '너바나 아류 밴드'의 하나로 여겨지는 면이 없지 않았다. 실제로 들어보면 그럴 만한 요소를 다분히 지니고 있다. 커트 코베인의 영향력이 그러한 것이었듯, 곡의 구성이나 창법 등을 보면 알겠지만 치밀한 계산에 의해 만들어진 곡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지 곡이 그렇듯, 단순한 기타 리프일 뿐인 것을 디스토션 걸린 톤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분위기로 .. 2020. 1. 28.
황소윤, 대중음악, 인물, 그리고 록음악 밴드 '새소년'으로 널리 알려진 황소윤의 솔로 앨범, [So!YoOn!]이 이미 한참 전인 작년 봄에 나왔었는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새로운 것'에 대한 내 관심은 항상 한 걸음 늦다. 게으른 것인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현재 한국의 대중음악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그 방식을 확인하고 싶다면, 이 친구가 어떤 음악을 하고자 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황소윤이 흥미로운 근본적 이유는 구태여 '철지난 록음악'을 자신의 음악적 기본값으로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황소윤이라는 인물 자체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래된 것'과 맞닿아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20여 년 전에 록 음악을 즐겨 들으며 자랐던 내 입장에서 황소윤은, 그 자체 '새로운 것'이라기보다, '오래된 미래'와 .. 2020. 1. 24.
Alanis Morissette, "Head Over Feet" 인간의 얼굴이 영혼의 창구라는 사실을 아래 비디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아래 곡을 통해 만나게 되는 것은 앨라니스 모리셋이라는 한 인간 자체다. 그 인간은 사랑스럽고, 또 매력적이다. 노래하는 자아와 얼굴이 완벽히 일치하다가도 자연스럽게 노래로부터 빠져나와 노래를 멈춘다. 노래를 하다가 손으로 얼굴을 긁적인다. 노래를 하다가 뒤를 돌아보고, 고개를 수그리고, 머리를 두드린다. 그러나, 신체와 노래가 분리될 때에도, 결코 노래가 멈추어졌다는 느낌은 없다. 신체가 여전히 노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셀카 속 인물들이 내보이는 표정과 비교해보라. 아래 영상에서는 자신의 예쁜 모습에 자아도취적으로 빠진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강박도 없다. 그저 노래하는 신체가 있을 뿐이다. .. 2020. 1. 21.
유튜브풍, 지구인 되기, 전우주적 자본주의 프렌치 키위 주스(French Kiwi Juice)를 보고 있으면, 기존의 20세기풍 프랑스 예술가들이 그의 작업물을 두고 혀를 끌끌 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 예로 그는 음악가로서 자신의 이름을 영어로 작명했을 뿐 아니라 모든 곡의 제목을 영어로 단다. 또 가사도 영어로 만들어 부른다. 영어로 지은 이름 조차 '프랑스식 키위 주스'라는, 마치, 카페의 메뉴에서나 찾아볼 법한, 인간이 아닌, 사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는 미국식 상업주의에 대항하여 프랑스식 지적 삶의 가치를 주창했던 기존의 전통적 프랑스 예술가-지식인들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예컨대, 사르트르나 카뮈가 이런 식으로 가볍게 영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실제로 프렌치 키위 주스의 음악을 들어.. 2020. 1. 17.
Alanis Morrissette, "All I Really Want" 1996년에 그랬듯, 2020년에도 이 곡의 인트로를 들으면 여전히 가슴이 뛴다. 게다가 이 곡은 앨범의 첫번째 곡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앨범 자체의 인상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어린 시절 내게 록 음악에 대한 첫인상을 강렬히 남긴 앨범의 하나이기도 하다. 당시 친구의 시디를 테이프에 복사해서 참 많이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시디를 구매한 것은 정작 2000년경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록 음악이 젊은이의 삶과 영혼 그 자체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앨범이다. 21살의 모리셋이 누구인지 그 날것의 모습을 담아내는 멋진 앨범이다. 다른 사람이 불렀다면 크게 기억에 남지 않았을지 모를 그런 곡들이다. -- Jagged Little Pill (1995) 2020. 1. 15.
FKJ Live at Salar de Uyuni in Bolivia 프렌치 키위 주스의 음악은 그가 행하는 연주 장면을 보지 않고 이미지와 함께 음악만 들을 때 훨씬 더 만족스럽다. 한 예로, 아래 라이브 영상을 보며 저 뒤의 아름다운 풍경만 보고 싶다고 느낀다. 그의 연주 장면을 보고 있으면 저 많은 기계 장치 및 악기를 다루다 혹시 실수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에 풍경과 음악을 충분히 즐길 수가 없다. 이는 새 집에 들어가 살기 위해 건축가가 집을 짓는 모습을 꼭 보아야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이유다. 내 집의 구석구석이 제대로 만들어지고 있는지 하나 하나 다 신경쓰며 옆에서 바라보다가는 신경쇠약에 걸려 쓰러지지 않겠는가? 프렌치 키위 주스는 얼굴 없는 음악가로서, 즉, 인터넷 상에 존재하는 독특한 시공간으로서, 훨씬 더 매력적이다. 그의 음악을 듣.. 2020. 1. 14.
음악의 시공간화 혹은 FKJ (French Kiwi Juice) 어째서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카리스마 가득한 이른바 '천재적 음악가'의 출현을 보기 어렵게 된 것일까? 이름만 들어도 모두가 아는 한 시대의 음악가, 음악가 개인의 천재성이 번뜩여 아무도 모방할 수 없을 것 같은 음악을 내놓는 음악가를 오늘날 등장하는 새로운 세대에게서 찾아보기는 어렵다. 사실, 전통적 '리더쉽'의 부재라고 할 만한 현상은, 정치 뿐 아니라, 음악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도 벌어지는 일이다. 예컨대, 2000년대 이후 등장한 록 밴드 중 내 뇌리에 한 시대를 새롭게 정의내려 이끌고 갔다고 기억되는 밴드는 없다. 록 음악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중 음악 전반이 그렇다. 반대로 오늘날은 수많은 다양한 이름 없는 음악가들의 시대인 것 같다. 이제는 누가 만든 음악인지, 해당 음악의 독창성과 그.. 2020. 1. 11.
Doves, "Firesuite" 아래 앨범이 나온지 거의 20년이 지났다. 나에게는 이때가 동시대 음악을 들으며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던 시기다. 마음이 늙었다는 소리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잃은 것이 있으면 얻은 것도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지적 쾌락이 그것이다. 20대에도 지적 쾌락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강도가 다르다고 느낀다. 지적 만족이 들지 않으면, 마치 아이들이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했을 때처럼, 불쾌를 넘어 불안을 느낀다. 내 삶이 완전히 잘못되어가고 있으며 삶이 의미가 없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문학 작품이 되었든 철학서가 되었든 어떤 것을 읽고 나면 그 독특한 시공간 속에 온전히 머물 때까지 음미하고자 한다. 내 육신이 속한 시공간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 때까지 말이다. .. 2019. 11. 12.
이승환, "세월이 가면" 이승환의 매력은 목소리 자체가 아닌가 싶다. 때묻지 않은 순수한 목소리라서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느낌을 준다. 사실 저 청순한 목소리가 내가 기억하는 1990년대 초반의 일반적 대중 가요의 정서이기도 하다. -- 2019. 1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