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치 키위 주스(French Kiwi Juice)를 보고 있으면, 기존의 20세기풍 프랑스 예술가들이 그의 작업물을 두고 혀를 끌끌 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 예로 그는 음악가로서 자신의 이름을 영어로 작명했을 뿐 아니라 모든 곡의 제목을 영어로 단다. 또 가사도 영어로 만들어 부른다. 영어로 지은 이름 조차 '프랑스식 키위 주스'라는, 마치, 카페의 메뉴에서나 찾아볼 법한, 인간이 아닌, 사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는 미국식 상업주의에 대항하여 프랑스식 지적 삶의 가치를 주창했던 기존의 전통적 프랑스 예술가-지식인들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예컨대, 사르트르나 카뮈가 이런 식으로 가볍게 영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실제로 프렌치 키위 주스의 음악을 들어보면 그의 무국적풍 혹은 비프랑스풍은 더욱 분명 분명해진다. 애당초 국경을 초월한 이른바 '유튜브적' 감수성 속에서 온갖 국적의 사람들을 청자로 하여 만들어진 음악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변화하는 세계의 지형 속에서는 결국 '프랑스인의 자존심'이라 불리던 무엇도 별 수가 없는 게다. 이제 새롭게 등장하는 프랑스의 신세대에게 있어 '영어'와 비민족적 '글로벌 감수성'은 당연한 삶의 조건에 불과한 것이다.
조금 달리 말해보자: 프렌치 키위 주스가 프랑스인으로서 겪고 있는 이러한 지형의 변화 위에서 봉준호 감독이 정확히 프랑스의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타게 되는 것이다. 혹은, 비슷한 맥락 속에서 한국의 BTS가 전세계에서 주목을 받는 음악가가 되는 것이다. 한국계 미국인 음악가 '예지'(Yaeji)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녀의 작업물에 있어서 한국적인 것은 결코 숨겨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녀의 음악은 한국에서보다 미국에서 더 주목을 끈다. 예지의 사례에서 보게 되는 것은 한국적인 것이 더 이상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 고유의 지역색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작년 한해 [아마존]에서 한국식 호미와 호피 무늬 담요가 미국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끈 방식을 보라. 혹은 미국의 픽사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이 한국인 할머니를 등장인물로 활용하는 방식을 보라. 오늘날 한국적인 것은 흙냄새 나는 전통적 삶의 요소가 아니라 트렌디한 새로움의 원천이다. 여기서 유추해야할 사실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 음악가가 된다는 것은 한국인이면서 동시에 지구인이 되는 것을 뜻한다. 개념적 층위에서 오늘날 '한국계 지구인'이 되지 않고서 한국에서 '음악가'가 될 방도는 없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이제는 이 '지구인 되기'에 있어서 심지어 미국인도 예외가 아니다. 다시 말해, '지구인 되기'의 문제는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낡은 세계화 시대의 언어를 반복하기 위함이 아니다. '지구인 되기'에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제는 미국인조차 미국인으로서 미국 내에서 주목을 받기 위해서 '미국계 지구인'이 되어야하는 처지로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오늘날 한국에 와서 한국말을 배우고자 하는 미국인을 적지 않게 보게 된 것인지 그 배경을 한번 생각해보라.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배경에 있는 궁극적 요소는 결국 바로 이 '미국계 지구인 되기'의 문제이지 않은가? 이와 관련하여 근래 미국인들이 처해지고 있는 경제적 현실을 볼 필요가 있다. 이제는 미국이라고 해서 모든 삶의 요건이 꼭 한국보다 더 나은 것만도 않다. 최근 미국에서도 열악한 재정 상황 및 학생 부족으로 인해, 150년 되었지만 큰 명성은 쌓지 못한, 지방의 대학이 폐교되고 있고, 캐나다에서는 빚을 내서 기계 공학 전공 등으로 대학을 졸업하고도 기대했던 직종에 취직을 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양산되어 언론에서 '대학은 돈 낭비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들 백인들의 사례를 보고 있으면 '저들 평범한 백인들도 이제는 우리와 다를 바 없이 불쌍해지고 있을 뿐이구나'라는 생각 이상이 들지 않는다. 말하자면, 한국인 입장에서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을 가면 한국에서 겪었던 것보다는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겠지'하던 시대는 '좋았던 옛날'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는 한국인이나, 미국인이나, 캐나다인이나, 가릴 것 없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재산이 없는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지 못하게 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일원들일 뿐인 것이다. 이것이 지구인으로서의 연대감이 창출되는 근본 바탕이지 않은가?
역설적이지만 오늘날 한국인이 여러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이유 또한 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근본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 거꾸로 말해보자. 오늘날 선진국의 중산층 이하 백인들이 겪고 있는 문제의 하나는 '자국적인 것의 비근함'이라 할 만하다. 즉, 오늘날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이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이들에게 있어 '경쟁력'은 자국의 외부, 즉, '세계'로부터 오는 것으로서 경험된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대학을 나와봤자 그리고 그들 나라에서 모국어인 영어 하나 해봤자 그들의 처지는 그 어떤 '차별성'도 창출해내지 못한다. 이들에게 '자국'은 자본주의적 경쟁력를 창출해내지 못하는 비근한 일상의 공간일 뿐이다. 오늘날 '경쟁력'은 '새로운 것'을 뜻하며, '새로운 것'은 '밖'으로부터 온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자국적인 것의 비근함'에 시달리는 서구인들에게 오늘날 세계적 감수성을 달성한 '새로운 것'(the New)으로서 다가오는 것의 하나가 '한국적인 것'이라고 말해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학사 학위 하나 가지고 왜 내 전공 관련 취업을 하지 못하는지 고민을 하는 미국인이나 캐나다인에게 이미 예전부터 동일한 문제에 시달려온 그리하여 온갖 '스펙 쌓기'에 열중해온 한국인이 해줄 수 있는 조언이 있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야, 정신차리고, 한국어나 공부해.' 과거 한국인이 영어를 공부하여 '새로움'을 달성했다면 이제는 미국인이나 캐나다인이 그 수 많은 영어 모국어 사용자들 사이에서 자신을 구분짓기 위해 '한국어'를 공부해야하는 시대가 온 셈이다.
사실 '한국적인 것'은 서구인들 사이에서 '새로운 것'이 될 모든 조건을 충족하고 있기도 하다. 오늘날 요구되는 '새로움'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새로운 것'은 '해외'에 있어야하되 그 나라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비서구적 이국성'을 담고 있어야 한다. 즉, '새로움'은 '동양적'이다. 동시에 '새로운 것'은 기존 '서구적 경제력'과 '서구적 민주주의 및 인권 감수성'을 지니고 있어야한다. 즉, '새로움'은 '테러리즘'을 떠올리도록 만드는 '종교적 근본주의' 및 '독재'가 횡행하는 전근대적 국가에서는 발견될 수 없다. 과거 1980-90년대 이 기준에 부합했던 나라의 하나가 '일본'이다. (이 때문에 1980-90년대 일본 문화를 어린 시절 겪은 많은 서구인들이 아직까지도 일본 문화에 친밀감을 표한다.) 한편, 현단계에서 이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나라는 '한국'이다. 서구인들이 보기에 한국은 모든 면에서 매력적이다. 지금 서구인들은 한국인을 최초로 발견하고 있다. 이제야 전지구적 자본주의 하에서 한국인이 중요한 등장인물 혹은 동료로서 등재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거꾸로 말하면, 이 등재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한국적인 것은 트렌드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고 국제 사회에서 활약하는 수많은 '올드보이'의 하나로서 여겨지게 될 것이다. 즉, 참신함의 시간은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지적 층위로 옮겨가야한다. 늦기 전에 과학 및 철학 등의 층위에서 국제적 기여를 하는 국가로 옮겨가야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백인들조차 자신의 '경쟁력'을 위해 비서구적 이국성의 세례를 받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제는 그들조차 살아남기 위해 한국어와 같은 동아시아의 언어를 배워 '미국계 지구인' 혹은 '캐나다계 지구인'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혹은, 프렌치 키위 주스의 경우에서 보듯, 프랑스인은, 프랑스성의 공간이 사라진 시대에 유일하게 허락된 전지구적 성질의 주목을 받기 위해 '프랑스계 지구인'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다: 봉준호 감독의 경우가 보여주듯, 이제는 자본주의가 열어놓은 전지구적 감수성 위에서 작업하는 사람만이 기존 서구에서 만들어놓은 이른바 '권위있는' 상을 받을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칸영화제는 더 이상 프랑스인의 프랑스인을 위한 예술에 주어지는 상이 아니다.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받게 된 이유 중 하나로 무엇이 언급되는지 생각해보라. 그것은 해당 영화가 국경을 초월하여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전지구적 문제인 '빈부의 차이' 혹은 '계급의 차이'를, 또한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가족'이라는 삶의 단위를 통해 그려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얼핏 판에 박힌, 몹시도 오래된,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지구인 되기'의 근본 문제가 놓여있는 것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전지구인이 공감하는 문제'라는 의제 설정은 오늘날 '보편'이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국경 상실 및 고향 상실이라는 문제틀 속에서 주어지고 또 경험된다는 말과 같지 않은가? 이것이 '지구인'이 탄생하는 방식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이 '지구인 되기'라는 관점에서, 사실 난 아래, 홍콩과 로스엔젤레스 등의 도시 풍경을 담은, 프렌치 키위 주스의 (비공식) 비디오에 서울의 야경이 하나 더 덧붙여졌어야 맞다고 믿는다. 비슷한 맥락에서 프렌치 키위 주스가 지난 2-3년간 이미 한국을 2-3 차례 방문하여 공연을 펼친 전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서울은 더 이상 단순히 한국이라는 한 나라의 수도이지 않다. 서울은 '지구'라는 행성을 대표하는 여러 도시의 하나다. 거꾸로 말하면, 서울은 더 이상 한국인의 '민족성'을 대표하지 않는다. 서울은 오히려 지역성 혹은 고향을 상실한 자들이 머무는 우주 내 공간이다. 그렇다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다음에 오는 것은 무엇일까? 일론 머스크(Elon Musk)의 화성 식민지 프로젝트가 보여주듯, 당연히, 그 다음은 '전우주적 자본주의'다. 앞으로 '새로움'은 그저 한 국가의 밖이 아니라 지구의 밖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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