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새소년'으로 널리 알려진 황소윤의 솔로 앨범, [So!YoOn!]이 이미 한참 전인 작년 봄에 나왔었는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새로운 것'에 대한 내 관심은 항상 한 걸음 늦다. 게으른 것인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현재 한국의 대중음악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그 방식을 확인하고 싶다면, 이 친구가 어떤 음악을 하고자 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황소윤이 흥미로운 근본적 이유는 구태여 '철지난 록음악'을 자신의 음악적 기본값으로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황소윤이라는 인물 자체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래된 것'과 맞닿아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20여 년 전에 록 음악을 즐겨 들으며 자랐던 내 입장에서 황소윤은, 그 자체 '새로운 것'이라기보다, '오래된 미래'와 같다.
물론, 그의 작년 솔로 앨범은 그다지 록 음악이라는 틀 안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록 음악이라는 바탕을 지워버리고도 과연 황소윤이 흥미로운 인물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내 답변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는 조금 민감한 진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황소윤을 록음악이라는 '장르'에 가두어두려는 시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황소윤은 아이돌식 전자 음악의 홍수에 떠밀려 사라져버린 대중음악의 얼굴이 대중음악 내부로부터 다시 창출되는 방식과 같다.' 무슨 뜻인가? 오늘날 대중음악계에서 '황소윤'이라 불리는 무엇은 탈인간화된 '대중음악'이라는 범주 자체가 다시 인물화된 결과와 같다는 것이다.
좀더 쉽게 말해보자. 인물화의 문제에 있어 황소윤의 등장은 '록스타의 복귀'와 같다. 이는 황소윤의 팬들이 그에 대해 보이는 팬덤의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1990년대 이후 사라져버린 '록스타'라는 '인물성,' 즉, 오늘날 만연하게 된 시각적 분위기로서의 음악 이외에, 음악을 통해 한 인물이 곧 하나의 세계 자체가 되어버리는 현상을 경험해본 적 없는 세대 입장에서 황소윤은 '음악' 이전에 '인물'로서 대단히 중요하다. 예컨대, '당신의 얼굴을 보며 광합성을 한다'거나 '당신의 발딱개가 되고 싶다'거나 하는 댓글들을 보라. 여기서 보게 되는 것은 '사물'의 위치를 취하는 청중과 '인물'의 위치를 취하는 황소윤 사이의 대조다. 보다 정확히는, 전자는 인물이 아닌 '식물'의 위치에 있으며, 후자는 말 그대로 '사물'의 위치에 있다. 여기서 '식물' 및 '사물'은 황소윤이라는 '인물'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이 되고자 한다. 이는 '인간'이 '자연'의 단계로부터 벗어나 '문명'을 이룩하고자 하는 순간 쓰여지게 되는 '신화'의 지위를 그대를 보여준다. '단군신화'를 생각해보라. '단군신화'의 요점은 어떻게 '곰'이라는 '동물'이 '얼굴'을 지닌 '인간'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발전할대로 발전한 문명을 지닌 오늘날 우리는 어째서, 다른 무엇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그 옛날의 '신화'를 다시 쓰게 된 것인가?' 여기서 오늘날 대량생산되는 아이돌 전자 음악의 세례 속에서 사라져버린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인격'을 지닌 것으로서의 '인물', 즉, '인간'이다. 예컨대, 과연 우리는 오늘날 대중음악계를 이끌어가는 '음악 리더'로서 특정 '인물'을 떠올릴 수 있는가? 오늘날 양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수의 음악이 매일 같이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누가 음악계를 이끌어가고 또 음악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파악이 불가능한 시대이기도 하다. 이것이 오늘날의 대중음악적 현실이다. BTS를 생각해보라. 그들은 현단계의 한국 대중음악계가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기에 중요한 것이지, '천재적 음악 리더쉽과 리더'를 지닌 한 독특한 밴드로서 음악계의 음악적 문법을 바꾸는 '인물'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즉, 그들은 현단계 음악적 '테크놀로지'의 한 가지 중요한 판본이다. 그러나 그들이 전통적 의미의 '인물성'을 구현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새소년은 정확히 '황소윤의 새소년'을 의미한다. 그러나 BTS는, 말하자면, BTS의 BTS다. 혹은, BTS는 방시혁의 BTS다.
아래 영상의 인터뷰로 가보자. 황소윤은 '황소윤의 음악적 자아'와 '자연인 황소윤의 자아'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진술한다. 이 둘 사이의 간극이 바로 '인물성'이 '식물' 혹은 '사물' 혹은 '동물' 등의 '자연'으로부터 발생하는 방식을 보여주지 않는가? 여기서 사실은 음악가 황소윤 또한 사물의 지위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을 볼 필요가 있다. 즉, '음악가 황소윤'과 '자연인 황소윤'은 동일하지 않다. 음악가 황소윤은 자연인 황소윤이 '변신'한 결과다. 그의 팬들이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지점이 바로 이, 흔히 '영감을 받았다' 혹은 '신내림을 받았다'고 불리기도 하는, '실체 변환' 혹은 '변신'의 순간과 맞닿아있다. 다시 말해, '그의 발딱개'가 되고 싶어하는 혹은 그를 통해 광합성을 하고 싶어하는 팬들에게 '황소윤'은 '인간 되기' 혹은 '황소윤 되기'의 계기로서 작동한다. 황소윤을 이해하는 데 있어 '록 음악'과 '아이돌 전자 음악' 사이의 간극이라는 배경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즉, 황소윤이 '인물'이 되는 것은 정확히 '록음악'의 매개를 통해서다. 혹은, 록음악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영감의 발생을 통해서다. 물론, '황소윤 되기'의 문제를 거꾸로 묘사해볼 수도 있다: ''황소윤의 발딱개-사물'과 '황소윤을 바라보며 광합성을 하는 식물'은 '음악가 황소윤'이라는 인물의 신체가 사물 및 식물로 확장된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기서 '변신'이 두 개의 방향성을 모두 지닌다는 점을 보아야한다. 첫째로, '황소윤 되기'는 한낱 자연인에 불과한 황소윤이 '영감'을 받아 '천재적 개인-인간'이 된 결과다. 둘째로, 동시에 '영감'의 발생이라 불리는 '변신'은 카프카적이기도 하다. 예컨대, 인간인지 동물인지 벌레인지 모를 무엇인가를 담아내고 있는 황소윤의 솔로 앨범 커버 이미지를 보라. '황소윤 되기'란 바로 저, 인간도 동물도 벌레도 아닌, '변신'의 과정 자체를 의미한다. 즉, '영감'은, 단순히 인간 이상의 것, 즉, '신내림' 혹은 '신적인 것'의 문제인 것만이 아니라, 인간 이하, 즉, 황소윤의 사물-식물-동물 되기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제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황소윤의 등장은 대중음악계에 '젠더'라는 틀이 되돌아온다는 뜻인가?' 여기서 아이돌 음악이 기본적으로 '섹스'로 환원된 육체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생물학적 섹스의 층위에 있어서 젠더 혹은 성역할이라는 기존의 개념적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한 예로, 남녀를 불문하고 '아이돌'은 그저 모두 '예쁘다.' 그들은 그저 신체에 직접 연결되고자 하는 신체일 뿐이다. 성역할의 구분 없이 자유롭게 알아서 각자가 각자 원하는 '취향'대로, 남자든 여자든, 아이돌의 신체를 골라서 시각적으로 즐기면 된다. 여기에서는, 예컨대, '아름다움'이라는 틀이 애당초 작동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의 특징을 생각해보라. 칸트가 지적하듯, '아름다움'의 뒤에는 '도덕성'이 있다. 여기서 '아름다운 자연'으로부터 '남자'가 분화되어나오는 방식을 볼 수 있다. 즉, '남자'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자연'이라 불리는 '여자'의 반대항으로서 '남자'는 '도덕'과 '규칙'의 문제다. 전통적으로 '남자' 입장에서 '예쁘다'는 말을 '모욕'으로 여긴 것은 이 때문이다. '남자'는, 자신을 '예쁘게' 전시하여 남들의 선택을 받기를 원하는 자가 아니라, 그 스스로 '지켜야할 것'을 지닌 자를 뜻한다. 그리고 그 '지켜야할 것'은 '아름다운 자연' 혹은 '여자'를 의미한다.
황소윤으로 돌아가자. 황소윤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댓글 중 하나는 '지금까지 이성애자라고 생각했는데 황소윤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정체성'이라는 개념적 틀이 다시 작동하는 것을 보게 되지 않는가? 다시, 아이돌 음악의 한 가지 특징을 생각해보라. 사실 아이돌 음악의 섹스 어필은 기존에 '동성애'라 불리던 요소를 기본적으로 깔고 있다. 그러나 이는 '아이돌 음악은 동성애적'이라는 쓸데없는 주장을 하기 위함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요점은 아이돌 음악에 있어서 '섹스'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성적 정체성의 혼란' 등의 언어에 묶여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개념의 혼란'이라는 문제는 태생적으로 아이돌 음악과 아무 관계가 없다. 거꾸로 말하면, 아이돌이 체현하는 '섹스'의 문제는 주어진 기존의 '사회적 성관념'에 대해 전혀 도발적이거나 전복적이지 않다. 아이돌이 제시하는 '섹스'는 대사회적으로 전혀 위험하지 않다. 거꾸로, 그저 '헤도니즘'의 문제가 있을 수 있을 뿐이다. 소비자로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 없이, 티비에 비추어진 신체들 중 각자 알아서 마음에 맞는 신체를, 남자의 것이든 여자의 것이든, 골라서 즐기면 될 뿐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애당초 '아이돌'이 '인물'이 아니라 '신체'로서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달리 말하면, 여기서 '성'은 '엔터테인먼트'의 문제 혹은 '취향'의 문제이지 ''규범'의 문제가 아니다. 반면, 황소윤의 인물성은 '규범의 규정 및 재규정이라는 문제'를 다시 제기한다. 무슨 뜻인가? '황소윤 되기'가 단순히 '사물-동물-식물 되기'의 문제 뿐 아니라 '신적인 것' 혹은 '정신적인 것'의 문제를 동시에 포괄한다는 것이다. 단군 신화로 돌아가자. 단군 신화에서 곰이 인간이 되는 과정에 개입하는 또 다른 층위는 그가 정확히 '웅녀'로서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신체'와 달리 '인간'이라 불리는 무엇은 그 하위 종으로 '남자' 및 '여자'를 지닌다. 즉, '인간'은 '보편'이라는 개념적 틀 속에서 작동하는 범주다. 조금 달리 말해보자: 황소윤의 팬들이 사물로서 혹은 식물로서 '황소윤 되기'를 행할 때 그들은 동시에 '남자가 될지 여자가 될지'를 정하는 문제에 또한 노출된다. 즉, 황소윤의 음악을 듣는 것은, 아이돌 음악에서 그렇듯, 단순히 '예쁜 신체'를 '취향'에 맞게 골라서 즐기는 '섹스'의 문제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록음악' 일반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보자. 전통적으로 '록음악'은 '마초'의 음악으로 여겨졌다. 1980년대에 부흥했던 메탈 계열 음악이 이를 잘 보여준다. 검은 가죽 재킷, 그에 달린 (철물점에서나 볼 법한) 철제 장식물들, 할리 데이빗슨 바이크, 바이크에 올라탄 근육질의 몸 등. 오늘날 '록음악'의 시대가 끝났다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이 '마초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록음악이 다시 인기를 얻기 어려운 것은 오늘날의 감수성이 바로 이 마초성을 그 자체로 승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오늘날의 가치는 '다양성'에 기반한다. 인종적, 성적, 문화적 다양성이 공존하는 이미지가 바로 오늘날의 표준적 감수성이다.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서 '마초성'은 바로 이 다양성에 가해지는 단일성의 폭력으로 경험된다. 그러한 이유로 마초성의 음악적 등가물인 록음악이 오늘날 도태된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황소윤의 사례가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록음악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황소윤의 경우가 보여주는 것은 '오늘날은 오직 여자만이 록음악을 할 수 있다'는 역설이다. 거꾸로 말하면, 오늘날 '남자'가 행하는 록음악은 그 자체 구태에 불과하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지나간 좋았던 옛날의 향수를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대놓고 마초적 록음악을 하지는 않는, 즉, 거꾸로 '록스타'의 이미지에 대항하는, '슈게이저'의 경우라 해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그림자를 이룬다. 록음악 내에서 '슈게이저'가 마초성에 대한 안티테제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가 다시 록음악을 대중음악계의 전면에 서도록 하는 것은 아니다. 슈게이징 음악과 함께 록음악이 '마초성의 음악'이라는 지위로부터 내려와 거꾸로 이번에는 '비주류 음악'으로 자리매김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요점은, 태생적으로, '남자의 록음악'은 사라진 것에 대한 '향수'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역설이 발생한다. 오늘날 록음악이 되살아날 유일한 방법은 '좋았던 옛날'에 대한 '향수'를 지니지 않은 자가 행하는 록음악을 통하는 것이다. 황소윤의 입지점이 여기 있다. 황소윤이 행하는 록음악은 아무리 '폼'을 잡는다고 할지라도 지나간 과거의 마초성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있다. 애당초 생물학적으로 남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자 록커'가 했더라면 '밥맛 떨어뜨리는 마초의 자기 과시'였을 수도 있는 그의 퍼포먼스가 새로운 세대의 젊은 청중들 사이에서 매력적인 것으로서 비추어질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서 보게 되는 것은 '여성 내부로부터 발생하는 남성적인 것'이라 할 만하다. 한 예로, 황소윤의 팬 대부분은 여성의 신체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 일상화된 '페미니즘'과 함께 우리는 과연 '남자 록스타'를 추종하는 '여자 팬'을 직접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가?' 답변은, 오늘날은 '여자'라는 항의 이분적 반대항을 이루는 '남자'의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남자'라 불리는 신체는 화장술을 잘 배워 보다 예뻐질 예정이고, 그리하여 보다 많은 아이돌 팬들을 '미모'로 '유혹'할 예정이다. 반면, 과거 '영웅'이라고 여겨졌던 무엇은 오늘날 '여자'라 불리는 신체 내부에서 재발명될 운명이다. 인간의 '진화'란 이러한 것을 뜻한다. 이것이 오늘날 '대중음악'이 '록스타'라는 '인물' 혹은 '얼굴'을 다시 얻을 유일한 방식일 것이다.
PS. 1년 여 전 이제 막 20대에 들어선 황소윤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첫번째로 든 생각은 한국의 중고등 공교육이 황소윤이라는 인물을 산출할 수 있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황소윤을 만들어낸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더랬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의 하나는 역시나 그가 '대안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 '촉'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관련하여, 누군가가 인터뷰해 볼 만한 새로운 음악가를 한명 꼽아달라고 하면, 개인적으로 황소윤을 들지 않을까 싶다. 사실 음악을 들을 때 '음악가'는 별로 관심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다. 음악은 음악으로서 그 자체의 맥락 속에서 이해해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인물'이 사라져가는 음악계의 맥락 속에서 음악 중심주의는 역설에 처해진다. 과거에는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 음악가를 괄호 속에 넣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이제는 괄호 속에 넣을 음악가라는 인물 자체가 음악 뒤에 애당초 없더라는 사실과 직면하고 있다. 황소윤이 흥미로운 인터뷰 대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다. 오직 '인물'하고만 할 수 있는 것이 인터뷰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식물과 인터뷰를 하여 광합성 작용에 대해 알고자 하지 않는다. 혹은, 호주의 불타는 숲에서 막 빠져나와 진이 빠지고 목마른 모습의 코알라가 아무리 안타까워보인다고 해도 현재 산불의 상황과 위기에 빠진 코알라의 삶에 관해 알아보기 위해 코알라와 인터뷰를 하지는 않는다. 즉, 동식물은, 인터뷰의 대상이 아니라, 생태학적 혹은 문학적 교감의 대상이거나, 아니면 과학적 관찰의 대상이다.) 어떤 면에서 인터뷰를 하기 위해 황소윤을 불러놓고 물어봐야할 것은 그의 음악이 아니라 그의 삶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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