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록음악이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었는지 확인하는 데 사료적으로 도움이 되는 곡이다. 부시는 메인스트림에서 최상급 인기를 구가하는 밴드는 아니었으나, 시대를 풍미한 대형 밴드들 틈에서 나름의 인지도를 구축할 정도는 됐다. 의외로 지금까지도 활동하는 영국 밴드다. 모든 면에서 미국 그런지풍이라 영국성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당시 우후죽순으로 등장하던 '너바나 아류 밴드'의 하나로 여겨지는 면이 없지 않았다. 실제로 들어보면 그럴 만한 요소를 다분히 지니고 있다. 커트 코베인의 영향력이 그러한 것이었듯, 곡의 구성이나 창법 등을 보면 알겠지만 치밀한 계산에 의해 만들어진 곡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지 곡이 그렇듯, 단순한 기타 리프일 뿐인 것을 디스토션 걸린 톤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분위기로 만회하는 식이다. 비유하자면, 실제 집의 크기는 아주 작고 단순한데, 동선에 자잘한 변화를 많이 주어 마치 집이 다채롭고 큰 것처럼 느껴지도록 만드는 경우라 할 만하다. '기타 톤'이 지글거리며 예상치 못한 잡음을 섞어내게 되면 이러한 착시현상이라 할 만한 것이 일어난다. 거꾸로 말하면, 바로 이 통제되지 않은 잡음의 개입이 오늘날 실제 악기 연주에 기반하지 않은 전자 음악이 결여하고 있는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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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zorblade Suitcase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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