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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와 [귀를 기울이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것이 아니면서 그의 세계관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유일한 작품으로 콘도 요시후미의 1995년작 [귀를 기울이면]을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을 보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얼마나 만족스러워했을지 생각해보는 것은 재밌는 일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각본과 콘티, 그리고 프로듀서까지 맡았기 때문에 미야자키의 세계관이 강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가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것 같은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 있어 콘도 요시후미가 미야자키의 세계관을 완벽히 내면화한 사람이라고 말해볼 수 있다. 미야자키 세계관의 핵심은 문학성에 있다. 그의 작품은 많은 경우 주인공이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져있다. 이는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이 지닌 중요한 .. 2024. 2. 27.
신유물론적 소멸 알렉스 갈랜드 감독의 2018년작 영화 [소멸](Annihilation)은 인간이 비인간이 되는 과정을 신유물론적으로 보여준다. 아주 옛날식으로 말하면 범신론의 세계다.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신들의 세계, 그러나 초월적 신이 아니라 물질 자체가 다자적 신성인 세계 말이다. 인간과 식물과 동물이 하나된다는 건 그런 이야기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세계 속에서 얼마나 많은 등장인물이 동물이면서 식물이고 동시에 인간이고 신이던가. 똑같은 논리가 영화 [소멸]에서 발견된다.* 물론 차이도 있다. [소멸]이 그려내는 범신론적 세계는 신화적 클리세가 아니라 21세기 현대미술 작품 판본으로 그려져있기 때문이다. 사실 [소멸]이 묘사하는 '쉬머'(the Shimmer) 속 세계 장면은 하나하나가 현대 미술작품 같다.**.. 2024. 2. 20.
말이 탄산음료처럼 보글보글 작품의 영어 제목은 [말이 탄산음료처럼 보글거린다](Words Bubble Up Like Soda Pop)다. 일본 작품이고, 감독은 이시구로 쿄헤이다. 한국어로는 [사이다처럼 말이 톡톡 솟아올라]라고 되어있다. 일본어 제목의 직역인 것 같다. 몇 가지가 눈에 띈다. 일단 색감이 소다수 같다. 인스타그램에서 볼 법한 10대 취향 그림체를 가지고 애니를 만들어놓은 모습이다. 둘째로, 음악이 소다수 같다. 달콤하면서 상큼하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내러티브는 어떤까? 작품이 시작되고 상당 시간 동안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배경이 제시되고 인물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들이 무슨 일을 벌일 것인지 짐작할 수 없다. 장난기 어린 모습의 한 아이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한참을 달리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2024. 2. 13.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들 아래 영상은 마이클 무어 감독의 2002년작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가져온 것이다. 당시는 1999년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총기 사건의 원인이 무엇이냐를 두고 시끄러웠던 때다.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던 학생 두명이 총기를 들고 학교에 들어와 12명의 학생과 1명의 교사를 살해한 사건이다. 당시 대단히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미국이 총기 사건으로 유명하다지만 그 이전까지 같은 미성년자 학생이 학교에서 동료 학생 및 교사를 대상으로 이 정도 규모로 사람을 죽인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미성년자에 의한 학교 내 사건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무엇이 이런 일을 일으킨 원인인지를 두고 말이 많았다. 범인들이 평소 마릴린 맨슨과 같은 폭력적 록음악을 들었고, 비슷하게 폭력적인 [사우스파크]라는 만화를 보.. 2024. 1. 15.
푸른 눈의 사무라이 아래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여러가지 요소를 섞어놓은 애니메이션이다. 영상은 영화 [300]의 애니메이션판 같은 느낌이다. 다만 배경을 일본으로 바꾼뒤 그리스 전사들 대신 사무라이를 넣은 모습이다. 다른 한편 게임을 애니로 만들어놓은 것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파울러의 성으로 침투해들어가는 과정이 특히 그러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초창기 작품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이 떠오르기도 한다. 둘 다 적이 숨어있는 성으로 침투해들어가는 설정을 지니고 있다. 이 애니의 최대 매력이 여기서 나온다. 지독하게 폭력적인 장면들을 스타일로 가득찬 영상으로 바꾸어 황홀하게 바라보도록 만들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영상미를 강조하는 유형의 영화는 플롯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지금 보면 '영상미'라.. 2024. 1. 7.
결국, 음악은 체력인가? 록 밴드가 전성기에 있을 때 아래 링크된 곡과 같은 정서를 들려준다. 내 주관적 관점에서 말해보자면, 한 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다. 기계적으로 덧붙여진 구석이라고는 없다고 느껴진다. 곡의 진행은 직관적이나 감정으로 가득하다. 구석구석 참신한 아이디어로 장식되어있다. 그러나 인위적이지 않다. 필로우즈는 1990년대 내내 이러한 음악을 들려줬다. 지금까지도 꽤 괜찮은 음악을 들려준다. 그러나 전성기 때만큼은 아니다. 이는 필로우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부분의 음악가들이 동일한 과정을 거친다. 전성기가 있고, 그 시간이 지나면 음악이 지루해진다. 혹은 맥이 빠진 음악 및 매너리즘에 빠진 음악을 들려주게 된다. 난 이 지점에서 이상함을 느낀다. 어째서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도록 참신하고 감정으로 넘치는.. 2023. 11. 12.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달콤한 복수' 올리비아 로드리고(Olivia Rodrigo)는 현재 미국 메인스트림 팝 씬에서 가장 잘 나가는 가수 중 하나다. 배우이기도 하다. 이제 겨우 20살이다. 곡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10대와 20대가 흥분할 만한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 잘 나가는 혹은 잘 노는 언니, 누나 이미지, 혹은 '나쁜년' 이미지가 기본이다. 그런데 동시에 바람기 있는 남자 혹은 '나쁜남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도 있다. 혹은, 전남친을 다시 볼까 말까 엉망진창 망설이다 다시 그의 침대로 들어가는 내용 등 약한 모습 또한 있다. 다시 말해, 전혀 완벽한 여성의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평범한 10대 및 20대가 올리비아 로드리고에게서 '따라하고픈 멋진 여성'의 모습과 '별볼일 없는 자기 자신의 모습' 둘 모두를 발견하는 것이 가.. 2023. 10. 29.
혁오의 '멋진 헛간' 혁오, 딱히 좋아해본 적 없다. 2014-5년경 차세대 록음악가로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에 비해 방송을 통해 세련되게 말랑한 느낌의 곡들만이 들려온 까닭이다. 그러나 뒤늦게 아래 "멋진 헛간"이란 곡을 듣고 생각을 바꿨다. 그는 록 음악가가 맞다. 2015년 '무한도전'에서 정형돈풍으로 장난스럽게 편곡되어 쓰인 후 이 곡이 애초 오혁이 의도한 판본의 형태로 단 한번도 발표된 적이 없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무한도전'은 한국 사회의 표준적 인간상을 만들어내는 공간이었다.* 한국적 인간의 표준성을 완전히 결여한 오혁조차 그 안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사실 '무도' 안에 록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의미론적으로 아래 곡이 원래 판본일 것이 분명한데 무한도전 편곡 판본이 등장한 이후 아래 판본이 거꾸로 'r.. 2023. 10. 1.
메탈이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 근래 메탈이 어떻게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아래 영상을 한번 볼 만하다. 메탈 음악은 일반적으로 마초적 남성의 반사회적 공격성을 음악이라 불리는 미학적 양식을 가지고 승화시킨 경우로 이해될 수 있다. 물론 메탈에 미학이라는 말을 쓰는 것에는 일리가 있는 동시에 어폐가 있다. 일반적으로 미학은 질서와 균형미를 빼놓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메탈은 기존의 미학적 균형을 깨버리는 데 훨씬 더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자기 나름의 원칙과 세계관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질서정연하기도 한 게 메탈이기도 하다. 메탈은 하나의 공식으로 장착된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메탈이 근래 장르로서 대중적 지지 기반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새롭.. 2023. 8.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