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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들

by spiral 2024. 1. 15.

아래 영상은 마이클 무어 감독의 2002년작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가져온 것이다. 당시는 1999년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총기 사건의 원인이 무엇이냐를 두고 시끄러웠던 때다.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던 학생 두명이 총기를 들고 학교에 들어와 12명의 학생과 1명의 교사를 살해한 사건이다. 당시 대단히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미국이 총기 사건으로 유명하다지만 그 이전까지 같은 미성년자 학생이 학교에서 동료 학생 및 교사를 대상으로 이 정도 규모로 사람을 죽인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미성년자에 의한 학교 내 사건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무엇이 이런 일을 일으킨 원인인지를 두고 말이 많았다. 범인들이 평소 마릴린 맨슨과 같은 폭력적 록음악을 들었고, 비슷하게 폭력적인 [사우스파크]라는 만화를 보았다는 게 첫번째 원인으로 지목됐다. 이는 이미 예전부터 있어온 관점이었다. 록과 메탈은 사탄의 음악이라는 기독교계 미국인들의 주장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들은 이 논리를 바로 동원했고 그러한 맥락에서 마릴린 맨슨이 마치 살인을 사주한 범인인 것 같이 다루어졌다. 아래 영상은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마이클 무어 감독이 마릴린 맨슨을 만나 직접 그에 관한 생각을 묻는 장면을 담고 있다.

20년도 넘게 지난 지금 입장에서 아래 인터뷰를 보며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이 눈에 띈다. 첫째로 마릴린 맨슨이 말하는 방식이 무척 논리적이며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 악마화된 살인범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 독백을 하는 장면에 비견할 만하다. 요점은 해당 장면에서 피조물의 언어가 너무도 논리적이며 이성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 어떤 인간보다도 더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어째서 그가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게 됐는지 그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해당 장면은 사실 [프랑켄슈타인]의 가장 위대한 장면의 하나다.

둘째로, 콜럼바인 고등학교 사건 이후 20년이 넘은 지금 그와 비슷한 학교에서 학생 혹은 졸업생에 의해 벌어지는 총기 살해 사건이 훨씬 더 빈번하게 된 지금은 그 누구도 록음악을 배후로 지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록음악 자체가 시들해져서 큰 영향력이 없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요점은 록의 영향력이 사라진 지금도 여전히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자주 더 끔찍하게 학교에서 총기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총기 사고가 구조적인 이유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즉, 폭력적 록음악은 원인이 아니라 사회적 모순이 표현되는 방식에 불과하다.

사실 서브컬쳐는 사회로 안착하지 못한 좌절된 욕망이 구조적으로 표출되는 창구다. 표현이 어떻게 되는가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을 수 있다. 때로는 폭력적이지만 때로는 대단히 창의적이며 심지어 유토피아적이기도 하다. 이 힘의 도움을 받지 못할 때 예술은 죽은 어용 예술이 된다. 날것의 에너지 때문에 때로 폭력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이 부분만을 강조하여 이 힘을 억누르게 될 때 그 사회의 예술은 별볼일 없어지게 되고, 그 대신 사회 자체가 힘이 센 자가 지배하는 야만 사회가 되고 만다. 혹은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혁명을 불러오게 된다. 

근래 한국에서 예술이 위축되어가고 있다는 신호가 나오고 있다. 근거도 없이 한 배우가 사회악 마약범으로 몰려 사회적 사망선고를 받았다. 그의 사회적 사망은 생물학적 사망으로 이어졌다. 평소 성실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던 배우가 악마화되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마릴랜 맨슨의 경우와 다르기도 하지만 겹치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맨슨은 평소 악마 이미지를 거부하지 않았다. 성실한 이미지 따위 없었다. 물론 이는 미국 사회 특유의 '개척자 정신' 혹은 '투쟁하는 개인'의 전통이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물론 미국의 '프론티어 정신'이 '맨슨화'된 것 자체가 이미 미국 사회의 전성기가 끝나간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맨슨화 혹은 서브컬쳐화된 프로티어 정신을 대하는 미국 사회의 방식이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뿌리인 프론티어 정신을 악마의 현현 정도로 이해했다. 미국 사회의 문화적 및 사회적 몰락은 1999년에 이미 그 증상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던 셈이다. 

반면 이선균의 경우는 한국 사회의 특성을 보여준다. 한국 사회는 '프론티어 정신'에 기초한 사회가 아니다. 개인의 독특성을 강조하는 일은 사회적 미덕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다. 한국의 주류 미디어가 이선균을 악마화하고자 했을 때 노린 지점이 여기다. 주류 미디어는 성실한 한국의 모범적 연예인이 실은 '욕망을 지닌 개인'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어 한 사람을 악마화한다. 그래서 나오는 대표적 키워드가 불륜, 섹스, 마약이다. 미국 사회가 그나마 '개인의 프론티어 정신'을 허락하는 사회인 것은 상대적으로 불륜, 섹스, 마약 같은 것까지는 개인이 알아서 할 일이라 여기며 넘어가는 사회라는 데서 드러난다. 그러나 '개인의 욕망'이 '살인'으로 이어지는 것까지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맨슨의 경우는 미국의 주류 사회가 콜럼비아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서브컬쳐화된 개인의 욕망을 표상하는 마릴린 맨슨과 연결시켜 그를 악마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게 요점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연예인 한 명을 사회적으로 매장하기 위해 살인 사건까지 연결시킬 필요는 없다. 그가 '욕망하는 개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살인은 오히려 악마화의 결과로서 벌어지게 된다.

한국의 문화예술계가 이선균의 죽음 앞에서 대사회적 성명을 발표한 것은 사회적 모순을 다루는 한국 주류 사회의 방식에 대한 경고와 같다. 한국의 주류 사회가 이 경고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여 받아들인다면, 예술이 망가지지 않고 지난 몇년 동안 보인 발전의 양상을 지속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신호를 무시하게 되면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좋든 싫든 오늘날 문화는 욕망의 문제를 사유하는 것으로서 시작한다. (한 예로, 박찬욱 감독이 이 분야의 대가다.) 욕망의 문제는 그 자체로 추악하다. 그러나 예술적,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될 때 그 사회는 문화적으로 성숙하게 되고, 또 그 결과 융성하게 된다. 한국 사회가 최근 문화적 및 사회적으로 전세계적 주목을 받은 것은 욕망을 사유할 줄 알게 된 결과다. 반면 지금 한국의 주류 미디어가 하는 것은 특정 연예인의 욕망을 악마화한 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맞게 이용하는 것이다. 그들 자신의 욕망은 숨긴 채 말이다. 혹은, 그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말이다. 그 결과는 끔찍하다. 한국 사회의 사회문화적 역량 자체가 치명적으로 손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의 문제를 탐욕스러운 주류 미디어가 이기적으로 혹은 독점적으로 다루도록 놔두어서는 안된다. 욕망은 예술가들이 다루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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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wling for Columbine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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