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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음악은 체력인가?

by spiral 2023. 11. 12.

록 밴드가 전성기에 있을 때 아래 링크된 곡과 같은 정서를 들려준다. 내 주관적 관점에서 말해보자면, 한 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다. 기계적으로 덧붙여진 구석이라고는 없다고 느껴진다. 곡의 진행은 직관적이나 감정으로 가득하다. 구석구석 참신한 아이디어로 장식되어있다. 그러나 인위적이지 않다. 필로우즈는 1990년대 내내 이러한 음악을 들려줬다. 지금까지도 꽤 괜찮은 음악을 들려준다. 그러나 전성기 때만큼은 아니다. 이는 필로우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부분의 음악가들이 동일한 과정을 거친다. 전성기가 있고, 그 시간이 지나면 음악이 지루해진다. 혹은 맥이 빠진 음악 및 매너리즘에 빠진 음악을 들려주게 된다. 난 이 지점에서 이상함을 느낀다. 어째서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도록 참신하고 감정으로 넘치는 음악은 음악가의 인생에서 한 시점에만 가능한 것인가? 평생 참신함과 열정으로 넘치는 음악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일까?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첫째로 감정이 나이들어간다는 말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혹은 감정이 무뎌져서 세밀한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음악에 있어서도 세밀한 차이에 기반한 감정의 우여곡절을 들려주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해볼 수 있다. 그런데 대체 감정이 무뎌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감정은 무뎌지는 것인가?

첫째로 비슷한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되어서 감정이 무뎌지는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이 무뎌지는 데는 또 다른 보다 근본적인 맥락이 있다. 여기서 내 가설은 감정이 무뎌지는 배경에 뇌기능의 저하가 있다는 것이다. 감정의 신호를 받아들이고 생산해내는 기관인 뇌가 노화되어 세밀한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되고, 또 세밀한 차이에 기반한 감정을 음악의 형태로 생산해내지 못하게 되는 측면이 있을 것이란 뜻이다. 혹은 좋지 않은 기억 및 그와 연관된 감정이 뇌에 쌓일 경우 해당 감정을 피하고자 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뇌가 특정한 감정을 피하려고 한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뇌가 특정 종류의 자극을 이겨내지 못할 정도로 약해졌다는 말과 같다. 이는 뇌가 처리할 수 있는 감정의 다양성을 훼손하게 될 것이다. 예술가 입장에서 인지할 수 없거나 처리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는 것은 창의성의 관점에서 볼 때 치명적인 일이다.

운동 선수들은 나이가 들면 기량이 떨어져 은퇴를 할 수밖에 없다. 흔히 우리는 음악가 혹은 예술가는 운동 선수와는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특정 나이가 되면 예술가들이 예술 활동에서 은퇴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음악 활동 또한 신체 능력에 종속적이다. 물론 음악가들은 명성이 있는 경우 종종 평생 음악을 한다. 그러나 아무리 명성이 있는 음악가라도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현상은 막을 수 없다. 예술 영역에 있어 신체 능력의 저하는 곧 창의력의 저하를 뜻한다. 내 기준에서 록음악가들을 기준으로 이야기해보자면, 대부분의 명성 있는 나이든 음악가들의 음악은 솔직히 거의 대부분 들을 만하지 않다. 지금까지 활동하는 1980-90년대 데뷔한 영미권 록밴드들 중 근래 신보가 나올 때 내가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밴드는 정말 극히 드물다. 사실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듣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창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가설을 세우고 나니 다음과 같은 질문이 든다: 뇌기능에 종속적이라면 거꾸로 현대 의학의 도움으로 조금이나마 뇌기능을 회복시키거나 지니고 있는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면 음악가들이 나이가 들어서도 보다 나은 감수성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난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본다. 예컨대, 시험을 볼 때 뇌의 능력을 극대화히기 위해 카페인이 많이 든 커피를 마시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카페인이 뇌기능을 회복시켜주는 것은 아니나 단기적으로 그 능력을 극대화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도움이 되고, 그렇게 되면 시험에서 더 나은 결과를 내게 된다. 사실은 음악을 만드는 일도 동일하다. 창의성이라고 하는 것도 실은 뇌의 물리적 능력이 받쳐주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뇌의 기능을 극대화할 수 있을까? 사실 뇌의 인지 기능을 높여주는 물질에 관한 연구는 대단히 많다. 우리가 늘 먹는 미네랄부터 아세틸콜린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합성에 꼭 필요한 아미노산, 고용량으로 장기간 복용하면 뇌세포의 회복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진 오메가3 지방산 등. 그러나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뇌에 에너지 공급이 원활히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이다. 평소 식단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운동 또한 큰 영향을 미친다. 말할 것도 없이 알코올은 뇌 건강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만 말하고 나니 마치 '건강한 뇌가 건강한 음악을 만든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같이 들린다. '체력이 국력'이라는 1970년대식 촌스러운 구호와 비슷하게 들리지 않는가? 음악이 전달하는 감정은 사실 대단히 다양하지 않던가? 우울한 음악, 기괴한 음악, 으스스한 음악 등을 생각해보라. '체력이 음악'이라고 말하는 작자들이 만들어낼 음악이란 '건전가요'일 것이지 않은가? 그래서야 어디 인간 감정의 깊은 골자기들을 탐구해볼 수나 있겠는가? 사실 우울한 뇌는 기능적으로 어딘가 문제가 있는 뇌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우울한 뇌는 훌륭한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다. 다른 그 어떤 건강한 뇌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음악을 만들 수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우울한 뇌가 흥미로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데도 한계는 있다. 20대의 우울한 뇌는 훌륭한 음악을 만들어내지만 50-60대의 우울한 뇌는 그냥 고통에 기능을 잃어가는 뇌일 뿐이지 않던가? 이는 뇌의 건강이 기본적으로 뒷받침되는 시기 동안에나 우울한 뇌가 참신한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란 뜻이다. 즉, 다른 기본 기능이 충실해야 뇌가 우울감과 투쟁하며 독특한 장면 혹은 감정을 창출해내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울한 뇌는 그저 기능을 하지 못하는 고장난 뇌일 뿐이다. 뇌의 능력을 키워야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버틸 힘이 있어야 끔찍한 감정의 골짜기에 내던져졌다 다시 그 골짜기를 기어올라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이 포착해내는 감정의 세밀함은 바로 이 투쟁의 움직을 기록할 때 얻어진다. 

'술을 마시기 위해서 건강 관리를 한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이 안에 음악가 혹은 예술가를 위한 조언이 있는지도 모른다. 고통을 포함한 다양한 감정의 격량을 겪어내고 표현하기 위해 건강 관리를 해야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음악가 혹은 예술가다. 물론, 좋은 음악은 단순히 이해하기 어려운 음악, 감정적으로 힘든 음악, 비주류 음악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좋은 음악이 단순히 모두가 이해하는 쉬운 음악, 감정적으로 가벼운 음악, 주류 음악인 것도 아니다. 좋은 음악은 그 두 축 사이의 긴장을 담아내는 음악이다. 그 긴장을 담아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건강이다. 즉, 건강은 그 스스로 정당성을 지니지 않는다. 건강은 어려움을 이겨내는 역량으로만 존재한다. 사실 우리의 몸은 항상 어려움을 이겨내는 한에서만 건강하다. 온갖 바이러스는 이미 우리 몸 안에 가득하다. 다만 우리의 면역체계가 그들의 발현을 막아내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보자: 다양한 감정의 기복을 견뎌내기 위해 평생 뇌기능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자가 음악가 혹은 예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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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Bivouac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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