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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와 [귀를 기울이면]

by spiral 2024. 2. 27.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것이 아니면서 그의 세계관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유일한 작품으로 콘도 요시후미의 1995년작 [귀를 기울이면]을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을 보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얼마나 만족스러워했을지 생각해보는 것은 재밌는 일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각본과 콘티, 그리고 프로듀서까지 맡았기 때문에 미야자키의 세계관이 강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가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것 같은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 있어 콘도 요시후미가 미야자키의 세계관을 완벽히 내면화한 사람이라고 말해볼 수 있다.

미야자키 세계관의 핵심은 문학성에 있다. 그의 작품은 많은 경우 주인공이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져있다. 이는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이 지닌 중요한 특성의 하나다. 이 특성이 [귀를 기울이면]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한 예로, [귀를 기울이면]에도 10대들의 이른바 '싸가지 없는' 모습이 나온다. 의외로 모범생 주인공인 시즈쿠가 그러한 태도를 보여준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유 좀 사다달라는 엄마의 부탁에 '그럴 분위기 아냐'라고 답한다. 가족들과 식사도 같이 안한다. 방에 혼자 앉아 과자를 먹으면서 가족들에게는 '배고프지 않아'라고 거짓말을 친다. 그러나 시즈쿠의 일탈적 행동은 이유 없는 반항과 같은 것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의 플롯 속에서 의미부여가 된 상태로 주어진다. 시즈쿠의 일탈적 행위는 그만의 꿈을 좇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자신만의 꿈을 추구하는 행위는 자기만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뜻한다. 인간은 자율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자아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아를 갖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기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즈쿠의 아버지는 그런 시즈쿠를 이해하면서도 차분한 목소리로 다음의 메세지를 분명히 한다: 너만의 길을 가는 것은 멋진 일이야, 하지만 남들과 다른 길을 가는 것은 힘든 일이기도해, 그 길의 마지막에 너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네가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추궁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두렴. 개인의 자아가 곧 세계가 될 때 자아는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의 무게에 짖눌려버릴 수 있다. 이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자만이 자아를 가질 자격이 있다. 이것이 근대 소설이 '빌둥스로만'이라는 형태로 다루어온 개인 내면의 문제다. 자아는 책임감 속에서 사회적 형식을 얻어야한다. 미야자키의 세계관은 이 점을 늘 분명히 한다. 마찬가지로 [귀를 기울이면]에서 시즈쿠의 '싸가지 없는' 행동은 자기성찰을 통해 다스려진다. 시즈쿠는 소설 집필을 마친 후 스스로 부모에게 다음과 같이 신고한다: 걱정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이제 학생의 본업으로 돌아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미야자키 감독의 세계관이 지닌 '빌둥스로만'으로서의 성질을 이해하면 어째서 미야자키가, 같은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임에도, [바다가 들린다]를 좋아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내적 성장이 없는 인물을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 속에서 주목을 받지 못한다.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바다가 들린다]는 자기 이익을 위해 남성을 유혹하고 지배하려는 여성 인물을 중심에 두고 작품을 끌어간다. 이기적인 인물은 미야자키 하아오의 세계 속에 설저리가 없다. 미야자키의 세계 속에서 주인공들은 대부분 남녀간의 커플을 이루지만 둘의 결합은 비루한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 꿈을 함께 꾸는 동반자 관계로서 이루어진다. 그런 이유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상대로 자신의 의도를 감추고 상대를 질투하고 지배하려하는 세계는 미야자키 입장에서 결코 허락될 수 없다. 이게 그의 작품을 따뜻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현실의 냉혹함을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루팡3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등에서 악당을 얼마나 악날하게 묘사하는지 보라. 그의 작품이 마치 동화와 같이 따뜻하지만 결코 유치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다. 그의 동화적 세계는 세속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기반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동화적 세계는 감동적이 된다. 바로 이러한 세계의 이중성을 포착하는 장르가 '빌둥스로만'이다.

미야자키의 작품 세계에 대해 조금 더 이야개해보자. 그의 작품 속에서는 세계의 냉혹한 논리가 늘 인간의 내면이 지닌 회상적 자아를 통해 극복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하울이 심장을 되찾은 후 내놓는 말이 대표적이다: '왜 이렇게 몸이 무겁지?' 소피가 답한다: '그게 마음의 무게야.' 하울은 전쟁터에서 전쟁을 하다 반죽음 상태로 돌아온 터였다. 그토록 세속 세계와 거리를 두려했지만 그는 어느새 군인이 되어 다른 이들을 죽이고 있었고 그 또한 죽어가고 있었다. 소피가 반죽음 상태로 돌아온 그에게 심장을 되찾아주는 장면은 소피가 하울에게 그를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을 전해주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담아내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물질은 내면을 통해 비물질, 즉, 사랑의 은유가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은유를 다루지만 물질 세계의 무거움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거꾸로 죽은 물질에 생명을 부여한다. 그것이 내면이 하는 일이다.

동일한 세계관이 [귀를 기울이면]의 주제곡 가사에서 그대로 발견된다. 요점은 두려움 가득한 세계 속에서 '마음'을 먹고 굳세게 살아가는 데 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꿈을 꾸는 일이다. 그러나 이 꿈은 동화적 꿈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동화적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꾸는 꿈이다. 돌아갈 수 없는 동화적 세계에 대한 기억을 칭하는 말이 바로 추억이다. 기억은 내면의 핵심이다. (이 점에 있어 일본어 제목 '귀를 기울이면'보다 영어제목 '마음의 속삭임'이 작품의 취지를 더 잘 담아낸다. 물론 '귀를 기울이'는 대상이 자기자신의 마음이라고 본다면 일본어 제목도 크게 다르지 않은 맥락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이 이 작품이 하고 싶은 말인 셈이다.) 사실 주인공 시즈쿠는 문학소녀다. 빌둥스로만은 원래 영화가 아니라 문학의 장르다. 문학성은 미야자키 하야오 세계의 중심이다. 그는 문학을 애니의 형태로 그려내는 사람이다. 그가 '오타쿠'화된 일본의 신진 애니메이터들의 작품을 보며 못마땅해하는 배경에 있는 것이 바로 그의 문학성이다. 

그러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이후 미야자키의 작품은 그 특유의 문학성을 많이 잃은 모습이다. 아울러 작품의 전개도 힘을 잃은 느낌이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작품이라지만 2008년작 [포뇨]는 1988년작 [토토로]와 달리 장면 하나하나에서 의미와 은유가 그다지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플롯이 느슨하게 진행되다 메시지를 직접 내놓는 식이다. 1984년작 [천공의 성 라퓨타] 같은 작품이 얼마나 빠르고 긴장되게, 그러나 동시에 자연스럽게, 플롯을 진행시켰던지 기억해보면 큰 차이다. 대신 그림체가 더 화려해졌다. 2012년작 [바람이 분다]도 마찬가지다. 현실 묘사가 강해지면서 은유가 사라지고 없다. 대신 꿈에 관한 감독의 '썰'이 은유를 대신하는 모습이다. 물론 이는 주인공이 성인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비슷한 특성이 1992년작 [붉은 돼지]에서도 나타난 바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1980-90년대 작품 중 은유의 층위가 가장 약한 작품이 [붉은 돼지]다. 사실 [바람이 분다]는 [붉은 돼지]의 2010년대 판본인 면이 크다. 하늘을 날고자 하는 열망, 2차 세계대전이라는 작품의 배경, 그러나 전쟁과는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꿈을 추구하고자 하는 주인공 등 설정이 거의 비슷하다. 성별만 다를 뿐 [바람이 분다]의 비행기 설계자로 나오는 주인공 지로는 [붉은 돼지]의 비행기 설계자 피오와 동일한 지위를 지닌다. 그러나 [바람이 분다]에는 결정적으로 포르코와 같은 인물이 부재하다. 포르코는 현실의 냉혹함을 잘 아는 사람인 동시에 유쾌하고 낭만적인 인물, 즉, 꿈의 세계를 타락한 세속의 논리로부터 지켜내는 방어선과 같은 인물이다. 이 인물이, 작품이 지닌 그 모든 리얼리즘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동화적 안정성을 가져다준다. [바람이 분다]에는 포르코와 같은 동화적 인물이 없다. 무엇보다 지로의 상대역 나오코는 폐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생기를 보이기도 하나 근본적으로 유쾌할 수 없는 인물이다. 이 인물은 작품의 말미에 죽는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 속에서 주인공이 죽는 경우는 [바람이 분다]가 유일하다. 동화적 세계가 깨져있다. 이 때문에 [바람이 분다]는 그 모든 꿈에 관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리얼리즘적 작품이다. [붉은 돼지]가 중년에 들어간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관을 기록하는 작품이라면, [바람이 분다]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자신의 인생이 노년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만든 작품과 같다. 둘 다 나이듬에 대한 자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리얼리즘적이나 아무래도 중년이 노년보다 죽음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미야자키는 20세기가 낳은 애니메이션계의 마지막 거장과 같다. (21세기는 그의 세기가 아니다.) 작품을 다루는 솜씨 뿐 아니라 그가 지닌 세계관이 그를 '거장'이라고 밖에는 부르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는 더 이상 일본에 보이지 않는다. 오시이 마모루는 분위기 잡는 철학만 있지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은 없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흥미로운' 작품일 수는 있다. 그러나 안노 히데야키의 오타쿠적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그에게 '거장'의 칭호를 붙일 수 없게 만든다. [진격의 거인] 같은 작품은 초라한 일상의 구속을 깨고 밖으로 나가 위대해지고자 하는 몸부림이 느껴지지만 어딘지 방향을 잘못 설정한 느낌이다. 위대함을 캐릭터의 거대함 및 거대한 폭력성과 혼동한 느낌이랄까. (이는 마치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문명 외부의 폭력적 야만을 선택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이시구로 쿄헤이의 [말이 사이다처럼 톡톡 솟아올라]는 좋은 작품이다. 그러나 주어진 현실을 깨고나갈 힘이 부치는 모습이다. 너무 소박하다. (앞으로도 자신이 쓴 시나리오로 계속 극장판 작품을 만들 기회를 얻는다면 더 나은 작품을 기대해볼 여지가 있다. 하지만 그런 기회가 또 오려는지는 모르겠다. 필모그래피를 보면 간간히 각본 작업을 하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기존의 작품을 애니화하는 감독으로 활동하는 모습이다.) 호소다 마모루의 경우 [서머워즈]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그 이후로는 별로 인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이 지속적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그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은유에 기반한 세계가 아니다. 섬세함은 지니고 있을지 모르지만 문학성에 기반하고 있지는 않다. 미야자키와 이들 사이의 차이는 미야자키와 달리 이들의 작품이 내면을 다루는 문학적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비물리적 의미 대신 외면, 즉, 비주얼이 극대화되고 있다. 일본 애니에 있어 외면의 시대를 연 작품의 하나가 오토모 가츠히로의 [아키라]일 것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들이 더이상 고전적 문학작품을 읽지 않는 느낌이다.*

*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내보인 잔혹성 뒤에 있었던 것이 실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이고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오이디푸스왕이 스스로 자신의 눈을 뽑은 것처럼 자신의 잘못에 대가를 치르고자 오대수는 스스로 자신의 혀를 자른다. 주목할 만한 작품은 단순히 의미없이 폭력적이지 않다. 근래 한국의 영화가 세계적 주목을 받는 것은 박찬욱 세대 감독들이 고전 문학작품과 가깝게 지내는 미덕을 지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1세기 한국의 영화가 21세기 일본의 애니를 압도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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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귀를 기울이면]의 주제곡 "시골길"의 가사다. 번역은 내가 했다. 영역에서 한국어로 옮긴 것이라 일본어 원문의 맛이 나지 않을 수 있다.

홀로 살아가는 꿈을 꿨어 / 혼자라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꿈을 / 슬픔을 내 깊은 곳으로 밀어넣었어 / 내가 할 수 있는 한 강한 척을 했어 / 시골길, 이 오래된 길을 / 그 길의 끝까지 가면 / 그 길이 나를 / 그 마을로 데려다줄 것 같아, 시골길

걷는 게 힘들어서, 멈춰서버리네 / 고향 생각이 나 / 하지만 언덕 위로 이어진 저 길이 / 계속 가라고 말을 해 / 시골길, 이 오래된 길을 / 끝까지 따라가면 / 그 길이 나를 / 내가 살던 마을로 데려다줄 것 같아 / 시골길

내가 얼마나 슬픈지는 중요하지 않아 /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을 거야 / 내 걸음이 빨라진다면, 다른 게 아니라 그건 내가 추억을 떨쳐내려 하기 때문이야 / 시골길, 이 오래된 길이 / 고향으로 바로 이어질거야 / 고향에 가지 않을 거야, 난 갈 수 없어 / 저 시골길을 따라갈 수 없어 / 시골길을, 내일이 오면 / 언제나와 같은 내가 되어있을 거야 / 고향에 가고 싶어, 하지만 갈 수가 없어 / 안녕 / 시골길

Had a dream of living on my own / with no fear of being all alone / pushed my sadness down inside of me / And pretended I was strong as I could be / Country road, this old road / If you go right to the end / Got a feeling it'll take me / To that town, country road. 

Tried of walking, I stop and stand / Thinking back on my hometown / But that road leading up the hill / Is telling me to move on / Country road, this old road / If you go right to the end / Got a feeling it'll take me / To that town / Country road 

It doesn't matter to me how sad I might be / I'll never ever let a tear show in my eye / If my feet are moving faster That's because I only want to push away memories / Country road, this old road / could go right to my home town / I won't go there, I can't go there / Can't go down that country road / Country road, when tomorrow comes / I'll be like I always am / Wnat to go back there, can't go back there / fare thee well / Country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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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sper of the Heart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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