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박문치의 곡에는 1990년대를 단순히 조야하게 '베겼다'고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그 시절을 직접 살아본 사람으로서 너무도 편안하게 그때 그 시절 곡을 듣듯 들을 수 있다. 마치 최근 내가 원했던 이상적 곡이 이런 것이 아니었는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누군가가 '박문치가 누구야?'라고 물으면, '30년 전 10대들 사이에서 최고 우상이었던 박문치도 기억 못하냐?'라고 핀잔 섞인 답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이 말이다. 1990년대에 박문치가 없었던 것은 시대가 그를 이미 잉태하고 있었으나 다만 무슨 바쁜 일이 있어서 제때에 생명체로 진화시키지 못했던 사정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내가 너무 일찍 태어났거나, 아니면 박문치가 너무 늦게 태어났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아래 비디오의 '영상미'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보자. 아래 영상의 '매력 포인트' 중의 하나는 자막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발견된다. 가오리연이 화면에 잡히면 '가오리연'이라고 정확히 언어로 명시를 해준다. 혹은, 63빌딩이 화면에 나타나면 '63빌딩'이라고 명시해준다. 실제로 이미지의 언어화는 1980-90년대의 특징이기도 했다. 이는 이미지가 스스로 의미를 분화시키는 것은 막기 위한 조치다. 즉, 이미지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결정하는 일은 이미지 자체에 맞겨져서는 안된다. 이미지는 영상을 제작한 감독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아야한다. 이것이 이미지가 기표와 함께 의미화되는 방식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검열'이라는 것이 나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흥미로운 것은 아래 영상에 결여된 것이 바로 섹스어필이라는 사실이다. 말할 것도 없이 1980년대 검열의 주요 대상 중 하나는 섹스어필이었다. 그렇다면 박문치의 영상에 섹스어필이 없는 이유는 그의 영상이 검열을 행하고 있기 때문인 것인가? 2010년대 아이돌 음악을 생각해보라. 섹스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그 어떤 자기 검열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해방의 음악을 시연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에 비해 박문치는 얌전히 검열을 따르는 '범생이' 음악인 것인가? 분명 그러한 면이 있다. 사실 박문치의 아래 영상은 '귀엽다'. 아이들이 어른처럼 폼 좀 잡고 싶어하지만 여전히 아이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래 영상에 정확한 '한도'(limit)가 정해져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영상에 주어진 한도가 주는 메세지는 명확하다: '아이는 아이다워야한다.' 아래 영상에 정확한 초점(focal point)이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즉, 아이의 세계는 정확한 '욕망의 대상'을 지니지 않는다. 혹은, 칸트적 의미의 '초월론적 대상' (transcendental object)을 지니지 않다. 아이의 세계가, 루소가 묘사하는 '최초의 인간'(originary man)이 그러한 것처럼, 자연의 영역에 남겨지려는 경향을 지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쉽게 말해서, 아래 영상은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섹시한 신체'를 지니고 있지 않는다. 2010년대 아이돌 음악을 생각해보라. 아이들이 어른들을 완벽하게 흉내내게 될 때 나오게 되는 것이 이른바 '프로 아이돌 음악가'이고 그들의 프로페셔널한 섹스어필이고 마약문화다.
아래 영상이 담아내고 있는 '자기검열'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보자. 이미 말했듯, 아래 영상은 언어를 통해 이미지를 통제하고 있다. 가오리연과 같이 생긴 것은 가오리연이 맞으며 63빌딩처럼 생긴 것은 63빌딩이 맞다고 단언한다. 언뜻 당연한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는 생각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소환되어야하는 것은 프로이트다. 속류 프로이트주의에 따르면 길죽한 모든 것은 남성의 성기를 상징한다. 예컨대, 63빌딩처럼 생긴 것은 한낱 빌딩이 아니라 남성의 성기다. 사실 이 속류 프로이트주의의 대가(master)는 미통당의 하태경 의원이다. 그에 따르면 지난 평창올림픽 때 북한 응원단이 쓴 가면은 한낱 가면이 아니었다. 그에게 그것은 '위대한 영도자 김정은 동무'의 가면으로 현상했다. 말하자면, 그들 응원단은 김정은의 가면을 쓰고서 남한 땅에서 북의 체제를 선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태경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은 '말 그대로의 현실' 혹은 '순수한 현실'이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이미지는 숨은 외설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른의 세계에서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이 이와 같다. 검열은 언어의 '함의'라 불리는 것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 1980년대 군사정권이 검열에 혈안이 되었던 이유를 생각해보라. 그것은 그들이 언어 속에서 숨겨진 외설적 의미를 읽어내는 재주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무의식'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무의식은 죄악의 증거와 같다. 사람을 죽여본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을 내가 죽일 수도 있다고 여길 수 있는 법이다. '검열'은 '무의식'이 의식의 층위에서 취하는 언어다. 즉, '검열'은 '내가 널 총칼로 죽여버리기 전에 알아서 내 통제에 따르라'는 뜻이다.
사실 2010년대 한국 아이돌 음악의 섹스어필은 1980년대적 검열에 대한 저항으로서 정당화된 면이 있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길거리에서 경찰은 치마가 무릎 위로 몇센치나 올라오는지를 자를 가지고 잴 정도였다. 그러한 폭력성에 비하면 아이돌 음악의 섹스어필은 마치 독재에 저항을 하는 것과 같이 보였다. 사실 그러한 의미에서 1990년대 랩-댄스 음악을 들고 나온 10대 및 20대 초반 아이들이 어른들 흉내를 내며 스스로의 방식으로 멋져보이려고 했을 때 2010년대에 와서 그 결과물이 그 어떤 제약도 없는 섹스 및 마약의 추구였던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1990년대는 '내멋대로 사는 것'이 곧 해방인 것처럼 보였던 시대였다. 2010년대 아이돌 음악은 어디까지 '내멋대로 사는 것'이 가능한지 섹스와 마약을 이용하여 실험을 하는 과정과 같았다.
2010년대 아이돌 음악이 내세웠던 섹스어필의 요점은 육체의 이미지가 일으키는 의미의 분화를 시청자가 스스로 감당하도록 만드는 데 있었다. 시청자는, 예컨대, '위아래 댄스'를 본 후 섹스를 실제로 할 육체를 현실 속에서 찾아내도록 부추겨진다. 이미지가 언어적 검열에 의해 통제되지 않을 때 시청자는 섹스를 직접 행함으로써 의미를 완결시켜야한다. 여기서 주어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검열 등을 통해 음지에 남아있었던 벌거벗은 육체의 이미지가 공공연하게 승인될 때 이는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이미지 앞에서 의미의 혼란을 겪게 될 때 사람들은 의미의 완결을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답변은 간단하다: 이미지의 의미화는 섹스할 육체를 현실에서 찾아내는 것으로 해소된다. 그렇지 못할시 시청자는 이미지를 의미화시키지 못하는 무능력함에 시달리게 된다. 즉, '저들은 저렇게 벌거벗고 즐기고 있는데 나는 소외되어있다'는 외설적 의미화가 거꾸로 시청자에게 남겨진다. 그러한 참담함에서 벗어나려면 클럽 등으로 대표되는 유흥 문화의 동참자가 되어야한다. 승리라는 인물이 보여주듯, 아이돌 음악 기획사의 주요 인물이 '클럽'을 직접 운영해야할 논리적 필연성이 여기서 나오지 않는가? 아이돌 음악의 알파와 오메가는 섹스와 돈이다. 이것이 아이돌 음악이, 이미지의 언어화 대신, 이미지의 육체화를 추구하면서 만들어지게 된 논리적-산업적 구조다.
사실 1990년대 댄스 음악은 2010년대 아이돌 음악의 부모와 같다. 1990년대는 단순히 순수하지 않았다. 2010년대에 우리가 본 그 모든 욕망의 씨앗이 이미 1990년대 안에 있었다. 쉽게 말해서, '서태지와 아이들' 없이 YG를 상상할 수는 없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규제하는 1990년대를 상상할 수는 없는 것인가?' 만약 1990년대가 섹스와 마약에 빠지지 않을 때 얻어질 음악은 어떠한 음악일 것인가? 그에 대한 한가지 답변이 박문치라고 말해볼 수 있다. 박문치의 등장은 1990년대가,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스스로 자기 검열을 조직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박문치의 영상은 스스로 언어적 의미의 제한선을 부여하고 있다. 가오리연은 '가오리연'이고, 63빌딩은 '63빌딩'이다. 이것이 아래 "네 손을 잡고 싶어"라는 곡의 '영상미'가 의미하는 바다. 이것이 군사정권에 의한 '검열'이 언어의 문제와 함께 개인의 '도덕'으로 번역되는 순간이다.
물론, 언어의 문제는, 데리다나 폴 드만과 같은 사람이 보여주듯, '기표의 자유 유희' 혹은 '항구적 파라바시스'(permanent parabasis)로서의 '아이러니'로 이어진다. '개인의 도덕'은 아이러니하다. 여기서 남겨지는 마지막 질문은 다음과 같다: '과연 아래 영상을 있는 그대로, 즉, 말 그대로의 것으로서, 비유적 언어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것으로서,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나이브한 리얼리즘' 혹은 '대상 중심 존재론'을 말하는 하먼이라면 가능하다고 답할 것이다. 예컨대, 자신의 곡 내부에 효과음으로 '박문치'를 연호하는 팬덤을 세겨넣고 공연장에서 박문치라 불리는 자기들만의 스타를 즐기는 팬덤 문화를 보라. 그들에게 세계는 말 그대로의 것이다. 세계는 숨겨진 함의를 지니고 있지 않다. 박문치가 스스로 팬덤을 선언할 때 그것은 그들 사이에서 이미 말 그대로의 현실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순진한 리얼리즘'에는 다른 산적한 많은 문제가 결부되어 있기도 하다. 박문치가 앞으로 보일 행보를 시간을 두고 한번 지켜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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