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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speed You! Black Emperor, [G_d's Pee At State's End!]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캐나다의 포스트록밴드 갓스피드유블랙엠퍼러의 새 앨범이다. 사실 이제는 전설적인 밴드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포스트록 분야의 '끝판왕'과 같은 밴드이니 말이다. 누가 그들의 2000년작 [당신의 깡마른 주먹을 안테나처럼 하늘을 향해 들어올려라](Lift Your Skinny Fists Like Antennas to Heaven)가 들려주었던 계시와 같았던 순간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나저나 1990년대서부터 이어져온 이들의 비타협적이고도 아나키즘적인 태도는 여전하다. 앨범 제목부터 그러하다: "국가의 종말에 ㅅㄴ의 오줌이 있기를!" 'ㅅㄴ'은 '신'에서 모음 'l'를 뺀 것이다. 물론 이는 '검은 황제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이라는 밴드 이름의 변형이다. 사실 이들은 앨범 .. 2021. 4. 17.
Spirit of the Beehive, [Entertainment, Death] 참신하고 실험적인, 그리하여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은, 그러나 동시에 그렇기에 그 어떤 친숙한 것들보다 즐길 만한, 음악을 좋아한다면 들어볼 만한 앨범이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티비 채널 돌리는 듯한 경험을 선사하는 음악이라 하던데, 깨나 그럴싸한 묘사다. 실험적이지만, 내향적인 측면 또한 없지 않다. 실험적이라 했지만 인공적인 의미의 미래지향적 느낌이 아니라 이상한 노스텔지아가 있다는 뜻이다. 앨범의 도입부는 바쁘게 채널을 돌리는 것 같지만, 티비를 볼 때 그러하듯, 결국은 어느 한 채널에 머물게 된다. 마찬가지로 아래 앨범의 다소 혼란스러운 도입부를 거치고 나면 향수 어린 감수성과 만나게 되는 듯한 지점들이 있다. 알고 봤더니 내가 보고 있던 티비가 1980-90년대 티비였던 것 같은 느낌 말.. 2021. 4. 15.
다윈, [종의 기원] 중에서 아래 문장을 보면 알겠지만 다윈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이다. 문장을 읽는 맛이 있다. 문장에 대한 욕심이 느껴진다. 문필가라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사실 17-8세기 서구에서 근대적 의미의 자연과학이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과학자들은 학계에서 소수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존의 인문학 전통 속에서 자신들의 새로운 학설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기존 인문학자들이 사용하는 사고 방식과 언어를 사용하여 그들을 이해시키지 못하면 학문으로서 인정받지 못할 위험에 처해있었다. 기본적으로 그러한 분위기 및 전통 속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서구에서는 과학자들도 기본적으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어야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예컨대, 전공을 막론하고 대학에서 필수 교양으로 문학 수업을 듣도록.. 2021. 4. 9.
수학적 아름다움과 비수학적 추함 내게 수학은 애증의 대상이다. 한 예로, 난 중고등학교 시절 수학을 이해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내게 수학이 무엇인지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 또한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 시절 수학 교사들은 그저 튜링 머신처럼 문제풀이 기계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수학을 다룬 것이 아니라 수학 내부에서 일어나는 수의 기계적 작동 방식을 일부 시연해서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난 그들이 수학을 이해한 사람이었을 것이라 믿지 않는다. 그들이 진정 수학을 이해했다면 수학을 그토록 기계처럼 다루지 않았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난 그들로부터 수학에 대한 그 어떤 사랑도 열정도 느껴본 적이 없다. 내가 대학 진학 후, 수학적 객관성의 세계로부터 절연된 채, 주관성이라 불리는 인문학적-철학적 심연으로 뛰어들었던 바탕에는.. 2021. 4. 6.
파스칼, [팡세] 중에서 파스칼의 [팡세]에 실린 구절의 하나다. 영문 번역은 옥스포드 월드 클래식판에서 가져온 것이고, 한국어 번역은 내가 한 것이다. 프랑스어 원문과 영어 번역을 비교해보면 프랑스어 원문을 영문으로 번역하는 일이 아주 수월하게 거의 직역 수준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프랑스어나 영어 번역을 한국어로 직역하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가늠을 할 수 없게 된다. 예컨대, 한국어 직역은 이런 식이 된다: '주어진 기쁨의 거짓 느낌과 부재한 기쁨의 공허에 대한 우리의 무지가 변덕을 일으킨다.' 여기서 서구의 언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다. 물론, 17세기 프랑스 원문의 문체를 거의 그대로 살린 아래 영어 번역의 문체 또한 딱히 현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근래에는 .. 2021. 4. 3.
Floating Points / P. Sanders / LSO, [Promises] 새로 나오는 음악을 내것과 같이 몰입하여 듣기는 쉽지 않다. 음악을 듣는 데 있어 관성과 판단이 생겨서다. 난 이 현상에 대해 양가적 감정을 느낀다. 기타 단 한 소절에도 전율할 수 있었던 시절이 내게서 지나갔다는 것은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들려오는 모든 소리에 그저 홀려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세상만사 모든 현상이 그 자체로 다 옳다고 느끼는 것 또한 부조리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음악은 고민과 고뇌의 산물인 반면, 어떤 음악은 한철 장사의 산물이기도 하다. 깊은 고민이 들어간 음악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겨 지하에 묻어버리는 것이 비극이라면, 한철 장사용 음악을 세기의 명작과 같이 떠받드는 것은 희극이라고 할까.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음악에 홀려 있어서는 안된다... 2021. 3. 29.
한예종 음악원 다큐멘터리 전문가들이 국가의 충분한 지원을 받게 될 때, 그리하여 자기 분야의 일만 신경쓰면 되게 될 때, 어떤 성과가 나오게 되는지 그 한 사례를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찾을 수 있지 싶다. 인간이 모이는 모든 곳이 그렇듯 아래 영상에서 보여주지 않은 학교 내부의 정치적 기류와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아래 영상 속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생각과 언어만큼은 저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노력을 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아래 영상만 놓고 보면 아래 학교는 오직 예술이라는 목표 하나를 가지고 세대와 세대를 잇고자 하고 있다. 계승할 만한 전통이란 그렇듯 순수한 목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집단을 이끌 때 만들어져나올 수 있다. 볼 만한 다큐다. 심지어 영감과 열정을 불러일으키기도.. 2021. 3. 26.
"재림"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Y. B. Yeats)의 "재림"(The Second Coming)이라는 시의 첫번째 연이다. 1919년에 쓰여졌다. 20세기 초반 유럽의 지성사적 분위기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가늠하게 해주는 시다. 세계 1차 대전이 터지고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던 시절이었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19세기에 만연했던 과학적 진보에 기반한 사회 개선 따위의 꿈들이 전부 헛된 꿈과 같이 무너지고 있었다. 19세기식 유럽 문명 자체가 사망선고를 받고 있었다. 이 암울함이 20세기 초 유럽 모더니즘의 한 가지 바탕이다. 서구의 문명은 이미 이때 한계에 봉착했었다. 적어도 문학가들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 이후로도 정치-사회-경제적으로는 팽창을 계속했다. 전세계가 서구식 삶을 .. 2021. 3. 23.
NIN, [The Downward Spiral] 아래 나인인치네일즈(Nine Inch Nails)의 [The Downward Spiral]은 1990년대 미국 대중음악계의 특성을 매우 잘 보여주는 앨범이다. 자기 파괴적 폭력성이 그 핵심이다. 말하자면, 얼트록 계열 음악이 지닌 폭력성은 다른 누구에게 가하는 폭력이 아니라 음악가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에 바탕한다. 1990년대에 백인 청년들이 폭도가 되어 의회로 쳐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이 내향적 특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내향적 폭력은 외적-사회적으로 구현되지 못한 자아, 즉 좌절된 자아 실현에 바탕한다고 말해볼 수 있다. 여기서 요점은 '정치적 행동으로 발전하여 전체 사회 단위에서 이상을 구현하지 못하게 된 자아는 어떻게 자살을 하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것인.. 2021. 3.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