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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병아리"와 세계의 기원 개인적으로 신해철과 넥스트에 열광해본 기억은 없다. 그러나 "날아라 병아리"라는 곡을 들으면 1994년, 이른바 '학창 시절'의 감정이 떠오를 만큼의 기억은 지니고 있다. 하루하루 자살하고 싶었던 시절, 내 주변 세상의 모든 것이 단 하나도 정상적이지 않게 느껴지던 때,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요동치며 내게 다가왔던 그 두려웠던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남자 중학교 교실이란 곳은 그토록 힘의 논리가 횡행하던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점심 시간마다 음악이 나왔다. 방송반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가장 잘 자나가던 곡들이 흘러나왔다. 그 중 하나가 넥스트의 "날아라 병아리"였다. 태어나 처음 경험한 폭력적인 공간을 너무도 감미로운 어쿠스틱 기타 소리가 채우고 있었다. 감상적인 나래이션 및 가사와 더불어 말.. 2022. 4. 3.
허클베리핀, [18일의 수요일] 유튜브에서 허클베리핀의 최근 공연 영상과 마주쳤다. 언제적 허클베리핀인지, 이들이 아직 활동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생각이 난 김에 검색을 해보니 [18일의 수요일]이란 앨범이 나왔다. 너무도 익숙한 앨범 커버 이미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사실 당시 난 이들의 앨범을 구매하진 않았다. [서브]라는 잡지에서 매달 주던 샘플러 시디에 실린 트랙을 한두 개 들었을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서브]라는 잡지가 깨나 기특한 일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매달 시디 하나씩 인디록 밴드들의 신곡을 가득 담아 주었으니 말이다. 지금 같이 쉽게 이름 없는 자들의 음악을 구해 듣기 어려운 시절이었으니 잡지 구독에 동기부여가 충분히 되는 일이었다. 허클베리핀의 [18일의 수요일], 당시 이 앨범이 기억에 남았던 것은 무슨 뜻인지.. 2022. 3. 27.
[아마데우스] 엔딩 아래 영상에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2악장이 이토록 아름답게 들리는 것은 의외로 그 저변에 깔린 악취 때문이다. 누가 이 곡을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이해하고자 했단 말인가. 정신병원에서 흘러나오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2악장, 이것이 [아마데우스]라는 영화가 제공하는 통찰이다. 아름다움의 뒤에는 썩어가는 신체들이 있다. 불경함이 없이 아름다움을 탐닉할 방도는 없다. 아름다움은 추한 자들, 평범한 자들의 것이다. 영화 속 살리에리의 외모가 저토록 추하게 시체와 같이 그려진 것은 그가 아름다움의 진가를 느낄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네 죄를 사하노라'라는 그의 아름다운 대사는 살리에리 자신의 추함을 배경에 두고서만 이해가능하다. 2022. 3. 12.
New Order, [Substance 1987] 뉴오더, 혹은 새질서. 가장 위대한 밴드 이름을 하나 꼽으라면 주저없이 이들을 꼽지싶다. 아래 앨범의 이름도 거창하다. 실체, 혹은 본질, 혹은 요점. 1981년에서 1987년 사이에 발매된 싱글만 모은 앨범이라 그렇게 이름 붙여졌지 싶다. 요즘 기준에서 처음 곡을 들으면 한편으론 만들다 만 데모 곡들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의외로 지금 듣기에 참신한 면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언뜻 어딘지 요점에 맞지 않는 평면적인 괴상함을 실험적으로 늘어놓고 있는 것처럼 들리지만 당시 사람들이 듣기에는 대단히 힙하고 혁명적인 사운드를 들려주는 밴드였을 것이다. (아마도 1970년대에서 1980년대로 이어지는 시기가 영국의 대중음악이 가장 참신했던 시절이 아닐까 추정해본다.) 무엇보다 깊은 인간성이 납작하게.. 2022. 3. 2.
기계 한낱 톱니바퀴 뭉치에 불과한 기계가 스스로 움직여 일어서기 시작하는 순간보다 더 순수하게 상상력이 물질로부터 발생하는 순간을 담아내는 장면도 없다. 오늘날 상상은 기계와 함께 발생한다. 기계 내부에 깃든 상상력을 일컫는 철학적 용어가 바로 주체(the subject)다. 주체가 비의미에 맞닿아있는 것은 그것이 기계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의미가 체감되는 것은 오직 기계적 비의미를 관통하는 한에서다. 인간의 인간성은 비인간의 관점에서만 접근가능하다. 생명은 낯선 것 속에서만 살아있다. 바로 그 고집스러운 낯선 생명의 다른 이름이 기계다. 2022. 2. 27.
'해초를 닮은 드레스' 찰스 디킨스가 그려내는 매력적인 인물은 흥미롭게도 대부분 조연들이다. 주연이라고 해도 그가 그려내는 인물은 19세기 사실주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비주류 조연과 깊은 연관을 지닌다. [리틀도릿]의 에이미가 대표적이다. 에이미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에이미 자신이 지닌 내면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옆을 지키는 메기다. 아래 메기에 대한 묘사를 보라. 마음 아플 정도로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동화적이다. 에이미는 그런 메기와 늘 함께한다. 이는 샬롯 브론테가 그려내는 주인공이 지닌 독립적 성질과 정반대다. 브론테의 경우 주인공이 지닌 주관성을 인물의 핵심 요소라 여기기 때문이다. 디킨스는 여기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 디킨즈의 인물들이 사랑스러운 이유가 이로부터 나온다. 브론테가 그려내는 .. 2022. 2. 23.
죠지, "좋아해" 이 곡을 듣고 있으면 1993년 대전 엑스포에 갔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 난 워크맨을 지니고 있었다. 해가 지고난 후 어딘지 광장과 같이 넓은 곳에 학급 단위로 모여있었다. 적지 않은 아이들의 손에 야광 형광물질이 든 스틱이 들려있었다. 책을 읽으며 줄을 칠 때 쓰는 형광펜색이었다. 어두운 배경에 야광 스틱이 색을 내는 모습은 어딘지 비현실적이었다. 아래 곡은 그 비현실적 시간으로 돌아가는 경험을 선사한다. 2021년에 나온 음악을 들으며 1993년을 추억하다니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마치 그때 그곳에서 죠지의 "좋아해"를 듣고 있었던 듯이 느끼니 말이다. 그만큼 아래 곡은 1990년대 초반의 정서를 완벽히 담아내고 있다. -- [좋아해] (2021) 2022. 2. 20.
B. Fleischmann, "Even Your Glasses Miss Your Eyes" 오래된 곡이다. 개인적으로 플라이슈만이 만들어낸 곡 중 이 곡에 가장 큰 애착을 느낀다. 전자 음악가로서 노래를 잘 부르지도 못하는 그가 이 앨범에서 노래를 최초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 노래는 최초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것이어야한다. 노래는 가수들의 것일 수 없다. 고체가 액체로 변하는 순간, 액체가 기체로 변하는 순간, 무기물이 유기물로 변하는 순간, 생명체가 최초로 숨을 내쉬는 순간, 숨소리가 목소리가 되는 순간, 그러한 순간들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음악은 그 변환의 과정이 만들어내는 소리다. 가수의 노래는 목소리로 돌아가야하고, 목소리는 숨소리로 돌아가야한다. 그렇게 고차원적 생명으로부터 단세포적 유기물로, 무기물로, 그리고 원자의 단위로까지 되돌아가야한다. 가수들의 .. 2022. 2. 16.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음악' 밀로스 포먼 감독의 1984년작 [아마데우스]의 핵심을 이루는 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곡을 묘사하는 장면일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살리에리가 내놓는 모차르트 음악에 대한 감상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내내 끊임없이 모차르트의 음악에 매료된 그의 모습이 묘사된다. 그리고 그의 음악 감상기가 펼쳐져나온다. 시쳇말로 하자면, [아마데우스]는 살리에리의 '팬심'에 관한 영화다. 그의 설명을 듣고 있으면 모차르트의 곡이 지닌 아름다움이 체감되어 느껴진다. 그의 설명 없이 해당 곡을 듣는다면 결코 느끼지 못할 아름다움이다. 사실 이 영화는 의외로 살리에리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겉으로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관한 영화인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은 살리에리의 음악적 식견이 없이는.. 2022. 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