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304 죠지, "좋아해" 이 곡을 듣고 있으면 1993년 대전 엑스포에 갔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 난 워크맨을 지니고 있었다. 해가 지고난 후 어딘지 광장과 같이 넓은 곳에 학급 단위로 모여있었다. 적지 않은 아이들의 손에 야광 형광물질이 든 스틱이 들려있었다. 책을 읽으며 줄을 칠 때 쓰는 형광펜색이었다. 어두운 배경에 야광 스틱이 색을 내는 모습은 어딘지 비현실적이었다. 아래 곡은 그 비현실적 시간으로 돌아가는 경험을 선사한다. 2021년에 나온 음악을 들으며 1993년을 추억하다니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마치 그때 그곳에서 죠지의 "좋아해"를 듣고 있었던 듯이 느끼니 말이다. 그만큼 아래 곡은 1990년대 초반의 정서를 완벽히 담아내고 있다. -- [좋아해] (2021) 2022. 2. 20. B. Fleischmann, "Even Your Glasses Miss Your Eyes" 오래된 곡이다. 개인적으로 플라이슈만이 만들어낸 곡 중 이 곡에 가장 큰 애착을 느낀다. 전자 음악가로서 노래를 잘 부르지도 못하는 그가 이 앨범에서 노래를 최초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 노래는 최초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것이어야한다. 노래는 가수들의 것일 수 없다. 고체가 액체로 변하는 순간, 액체가 기체로 변하는 순간, 무기물이 유기물로 변하는 순간, 생명체가 최초로 숨을 내쉬는 순간, 숨소리가 목소리가 되는 순간, 그러한 순간들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음악은 그 변환의 과정이 만들어내는 소리다. 가수의 노래는 목소리로 돌아가야하고, 목소리는 숨소리로 돌아가야한다. 그렇게 고차원적 생명으로부터 단세포적 유기물로, 무기물로, 그리고 원자의 단위로까지 되돌아가야한다. 가수들의 .. 2022. 2. 16.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음악' 밀로스 포먼 감독의 1984년작 [아마데우스]의 핵심을 이루는 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곡을 묘사하는 장면일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살리에리가 내놓는 모차르트 음악에 대한 감상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내내 끊임없이 모차르트의 음악에 매료된 그의 모습이 묘사된다. 그리고 그의 음악 감상기가 펼쳐져나온다. 시쳇말로 하자면, [아마데우스]는 살리에리의 '팬심'에 관한 영화다. 그의 설명을 듣고 있으면 모차르트의 곡이 지닌 아름다움이 체감되어 느껴진다. 그의 설명 없이 해당 곡을 듣는다면 결코 느끼지 못할 아름다움이다. 사실 이 영화는 의외로 살리에리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겉으로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관한 영화인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은 살리에리의 음악적 식견이 없이는.. 2022. 2. 9. Jon Hopkins, "Sit Around the Fire" 작년 말 홉킨스의 새 앨범이 나왔다. 지난 앨범에서 이미 예상할 수 있었듯 이번 앨범은 보다 명확하게 명상적이 되었다. 거의 신플라톤주의적이다. 난 홉킨스의 작업이 21세기에 전자 음악 일반이 나아가는 한 가지 방향을 매우 잘 보여준다고 여긴다. 전자 음악은 인간 세상을 떠나는 방법, 즉, 인간적이지 않은 세상의 감정을 느끼는 방법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사실 난 음악이 세속적 희노애락의 감정에 가까워질 때 이미 어디서 들어본 감정을 되풀이 하고 있을 뿐이라 여기는 편이다. 21세기에 음악을 만드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을 그려보기 위함이다. 여기에 현실 도피의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사실 근래 세상에서 벌어지는 반목과 갈등을 보고 있으면 너무 피곤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가장 친취.. 2022. 1. 11. 듀스, "다투고 난 뒤" 90년대의 소리다. 불완전한 시대였다. 열등감 또한 가득했다. 그러나 그렇기에 부족함을 온몸으로 채우고자 했던 시대였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기억된다. 1990년대의 소리는 온몸으로, 내 몸 안 세포의 밑바닥으로부터 느낄 수 있다. 내가 먹고자란 소리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음식만 먹지 않는다. 몸은 소리를 먹으며 자란다. 성장기에는 음악이 영양소다. (또한 이미지가, 냄새가, 촉감이 양양소다.) 소리가 성장하는 세포질을 감싸며 적신다. 세포는 소리를 흡수한다. 성장기가 지난 뒤 소멸하는 신체 속에서 음악이 신체 없는 기관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 때문이다. 기억은 음악적이다. 음악은 신체 없는 기관을 깨운다. 죽었던 자가 다시 깨어나듯. 바로 이 죽은 자의 깨어남이 지나간 시대가 시간을 .. 2022. 1. 5. Keith Jarrett, "Part VIII" 2016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있었던 공연 녹음이다. 2016년이면 키스 자렛 트리오가 해산하고 2년이 지난 시점이다. 트리오의 일원이었던 게리 피콕은 2020년에 죽었다. 키스 자렛은 2018년 뇌졸증을 두 번 겪은 후 몸의 왼편이 마비되었다.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다니고 오른손을 쓸 수 있을 정도로는 회복되었으나 여전히 왼손은 사용하지 못한다. 오른손으로 곡을 연주해보고자 했지만 곡을 기억하지 못해 연주할 수 없었다고 한다. 2020년 있었던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더 이상 피아니스트라고 느끼지 않는다는 진술을 남긴 것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다. 더 이상 그의 연주를 기대하기는 어려워진 것이다. 앞으로 그가 과거에 남긴 연주들이 간간히 더 발매가 되긴 할 것이다. 그러나 새 연주는 더.. 2021. 12. 29. Silvestrov, "The Messenger (For Piano Solo)" 분석적 인간은 그 자신의 날카로움을 명상적 음악을 통해 다스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게 내가 아래 실베스트로프의 음악을 경험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난 아래 음악을 자기 전에 곤두선 신경을 다스리기 위해 참선을 행하듯 듣는다. 훌륭한 음악이다. -- Helene Grimaud, piano 2021. 12. 22. 테크노 봉건주의, 명품, 주술, 영성 최근 유럽과 미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가장 주목받는 담론의 하나는 '테크노 봉건주의'(technofeudalism) 혹은 '디지털 봉건주의'(digital feudalism)다. 이는 근래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함께 자본주의가 진화해가는 방향을 묘사하기 위한 용어다. '테크노 봉건주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지금 봉건주의의 형태로 진화 혹은 퇴화하고 있다. 요점은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조차 무너뜨리지 못한 자본주의를 자본주의 자신이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보는 데 있다. 여기서 자본주의가 사실 그 자체로 대단히 혁명적인 기능을 수행하며 등장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자본주의는 중세 봉건주의를 무너뜨리며 중산층 자본가들에게 자유를 허락하는 정치체제의 경제적 바탕으로 여겨졌다. 바로 이 혁명적 배경 덕.. 2021. 11. 22. '요즘 어디서 뭐 하고 놀아?' 아래 링크된 인터뷰는 두 가지 측면에서 흥미롭다. 첫째로, 20대 중반의 청년 스타트업 사업가를 대려다놓고 나이가 훨씬 더 많아 보이는 인터뷰어가 아주 진지하게 '요즘 10대나 20대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놀아요?'라는 질문을 '나도 좀 알고 혹은 끼고 싶은데'라는 태도로 던지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역사상 10대나 20대가 그들이 지닌 놀이 문화 때문에 이렇게 진지한 대접을 받았던 시대가 과연 있었던가? 어른들이 아이들 노는 데 이토록 끼고 싶어했던 시대가 있었던가? 물론 이는 과장된 이야기다. 왜냐하면 아이들 노는 데 관심을 보이는 어른들의 의도가 실은 전혀 아이들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은 '너희들 노는 걸로 큰 돈을 버는 게 가능하다던데, 어디 나를 위한 자리는 없겠니?'에 가깝기 때문이다. .. 2021. 11. 3. 이전 1 ··· 12 13 14 15 16 17 18 ··· 3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