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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디서 뭐 하고 놀아?'

by spiral 2021. 11. 3.

아래 링크된 인터뷰는 두 가지 측면에서 흥미롭다. 첫째로, 20대 중반의 청년 스타트업 사업가를 대려다놓고 나이가 훨씬 더 많아 보이는 인터뷰어가 아주 진지하게 '요즘 10대나 20대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놀아요?'라는 질문을 '나도 좀 알고 혹은 끼고 싶은데'라는 태도로 던지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역사상 10대나 20대가 그들이 지닌 놀이 문화 때문에 이렇게 진지한 대접을 받았던 시대가 과연 있었던가? 어른들이 아이들 노는 데 이토록 끼고 싶어했던 시대가 있었던가? 물론 이는 과장된 이야기다. 왜냐하면 아이들 노는 데 관심을 보이는 어른들의 의도가 실은 전혀 아이들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은 '너희들 노는 걸로 큰 돈을 버는 게 가능하다던데, 어디 나를 위한 자리는 없겠니?'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북 친추로 엄마가 떴을 때 소셜미디어도 끝났다고 느꼈다'는 아래 청년 사업가의 진술은 정직하다. 아이들 노는 데 어른이 끼면 도망가고 싶은 건 당연하다. 물론 아래 20대 청년은 그 자신이 사업가이기도 하다. 단순하게 놀이 문화에 빠진 '요즘 아이'이지 않다. 사실은 그 또한 아이들 노는 걸로 돈을 벌어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어른의 하나다. 물론 그에게는 조금 더 큰 정당성이 있다. 메타버스를 자기 세대의 문화로 체감하여 진실로 이해하는 사람이라 자부하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아래 인터뷰에 달린 댓글이 흥미롭다. 자신을 Z세대라 밝히는 많은 젊은이들이 댓글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의 요점은 자신들 주변에서 메타버스를 그렇게 열정적으로 가지고 노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대체 이 무슨 괴이한 소리란 말인가! Z세대가 아니면 대체 누가 메타버스의 사용자일 것이란 말인가! 어떻게 살해된 시신이 발견된 현장이 있는데 살인범이 없을 수 있단 말인가! 동시에 댓글 속에서 Z세대는 어른들이 '메타버스'라는 말로 자신들이 사용하는 플랫폼을 묘사하는 일에 거부감을 느낀다. 제페토와 로블록스는 알아도 어른들이 주문과 같이 외어대는 도대체 그 신비로운 이상향 메타버스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대단한 게 있다면 나도 좀 즐기고 싶다는 것이다. 방금 묘사된 정황에 따르자면, '메타버스'는, 그 누구도 자기 것으로 체감하여 즐기지 못하는, 그러나 새로운 젊은 세대가 미친듯이 즐기고 있기에 기성 세대를 포함한 모두가 탐내는, 어떤 신기루와 같다. 혹은, 아무도 가보지 못했으나 그에 관한 이야기만큼은 넘치는, '무릉도원'과 같다. 여기서 소위 FOMO(Fear of Missing Out)라는 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나만 빼고 모두가 즐기고 있는 것 같아서 소외된 것 같고 두려워'라는 심리를 일컫는 말 말이다. 말할 것도 없이 욕망은 타자에 대한 욕망을 뜻한다. 물론, 타자(the Other)는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를 일컫는 정신분석적 용어다. 

생각해보면 난 이른바 Z세대들을 거의 매일 만나며 살고 있다. 대학 교실에서 20대 초반 학생들을 상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 대학 1학년은 심지어 2002년생이다. 이들은, 심지어 Z세대도 아니고, Z 다음에 온다는 의미에서인지, 알파(Alpha)세대라고들 한다. 그러나 난 단 한번도 그들이 '메타버스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기성 세대들은 모르는 비밀을 은밀히 즐기며 살아가고 있다'고 신화와 같이 일컬어지는, 바로 그, '신비로운 Z세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난 그들 속에서 내 20대 초반의 모습과 비슷한 면을 발견한다. (물론, 다른 부분도 있지만 말이다. 예컨대, 무엇보다 그들은 미국인들이다.) 전공을 무엇으로 정해야할지, 졸업 후 진로는 어떻게 정해야할지, 당장 학점은 어떻게 해야 잘 딸 수 있을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하는, 세대를 초월하여 작동하는 보편적 질문들을 던지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소셜미디어나 메타버스 상에서 주인공이라 느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이들은 19세기의 고독한 초월주의 철학자 소로우의 미니멀리즘에 관한 고리타분한 글을 읽으며, 그의 꼰대 같은 글쓰기 스타일에 좀 화가 나기는 하지만, 그 취지는 아주 좋다며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들은 소셜미디어 등이 허영을 퍼트리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삶에 별로 도움이 되는 게 없더라는 진술을 한다. 이들에게는 '삶의 의미'를 실존적 관점에서 찾는 게 더 의미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이는 100년 전, 200년 전, 아니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시절에도 있었던 고민이다. 

난 내 학생들에게 '너희들 요즘 어디서 무엇을 하고 노니?'라는 질문을 '거기 나도 좀 가고 싶은데'라는 취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내가 그들의 관심사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그들이 내놓는 생각 속에 아직 잠재적인 형태로만 포착되는 사고의 씨앗이 발현되어 그들 삶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돕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그들의 사고에 가해진 구속구에 금이 가게 되고, 그 결과 미래에 그들 자신이 꿈꾸는 삶을 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닐까 하고 여기는 정도다. 난 그들이 노는 곳에 갈 생각이 전혀 없다. 난 그들만이 즐기고 있다고 여겨지는 보물을 탐내는 데 관심이 없다. 사실, 보다 정확히는, 그런 게 그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나이를 불문하고, 만족이 아니라, 결여에 기반하여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환상과 신기루는 시대를 막론하고 있어왔다. 그리고 100년 후에도, 1000년 후에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최근의 세대가 보고 있다고 여겨지는 신기루만을 특권화하여 '현실'이라고 불러야한단 말인가? 신기루, 시뮬레이션,  유토피아, 혹은 보다 고상한 용어로, '가상'(Schein)을 다루는 것으로 여겨지는 문학의 역사를 보라. 이미 수 천년의 역사가 있다. 가상으로서 문학의 역사가 제시하는 세계의 스펙트럼에 비하면 메타버스가 제시하는 시뮬레이션은 아직 여전히 너무도 단순하지 않은가? 특히나 환멸(disillusionment)과 실망(disappointment), 그리고 탈신비화(demystification)를 그 스스로 사고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러하지 않은가? 생각해보라, 어째서 메타버스에 관한 소설이자 영화인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의 주제가 결국은 메타버스로부터의 깨어남이라는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인지. 여기에 메타버스 자체와 메타버스가 스스로 행하지 못하는 문학적 사유의 차이가 있지 않은가? 메타버스가 단지 어른의 세계로부터 도망쳐 찾아가는 곳에 불과하다면 메타버스는 영영 깨어남에 대해서는 사고하지 못할 예정이지 않은가? 심지어 [피터팬]의 원작에조차 피터팬이 네버랜드에 사는 아이들을 어른이 되기 전에 전부 죽여버린다는 설정이 있다. 메타버스가 사유하지 않고자 하는 지점이 바로 이 '죽음의 문제'이지 않은가?

돌이켜 보면 나 또한 10대 시절 어른들이 침입하지 않아야만 하는 많은 것들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그 형태가 요즘 10대들이 노는 방식과 달랐을 뿐이었다. 한 예로, 과거 소셜미디어가 없었던 시절 10대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더 알기 위해 종이로 된 잡지를 사서 보았다. 사실 난 90년대 내내 온갖 게임 잡지 및 음악 잡지를 사서 봤다. 요즘 아이들이 페북, 인스타그램, 카카오스토리, 스냅챗, 틱톡, 유튜브, 제페토, 로블록스를 그 성질에 따라 구분한다면 1990년대는 온갖 서로 다른 성질의 잡지들이 있었다고 말해볼 수 있다. 예컨대, 아래 20대 사업가는 '제페토 내 캐릭터 얼굴만 봐도 기성 세대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 또한 '음반의 커버 아트만 봐도 그 음악의 장르가 무엇인지 대충 다 맞출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말하자면, 예나 지금이나 그 정도 식별력은 어느 분야에서든 항상 있어왔다는 뜻이다. 물론, 요즘과 차이도 있다. 요즘은 잡지 편집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콘텐츠보다는 이른바 '독자마당'이라 불렸던 요소가 훨씬 더 극대화된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과거에 동호회라는 것을 통해 천천히 이루어졌던 만남이 스냅챗 등을 통해 보다 즉흥적으로 그리고 보다 익명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차이도 있다. 그러나 난 본질에 있어 달라진 것은 없다고 본다. 예나 지금이나 노는 일은 서로 만나 일말의 규약 속에서 자기 자랑을 기꺼이 하고 또 남의 자랑을 기꺼이 봐주거나 하는 것에 그 요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과거 어른들은 나에게 '네가 보는 게임 잡지가 그렇게 재미나다던데 나도 좀 보면 안될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왜 과거 어른들은 나에게 '네가 듣는 록 음악이 그렇게 힙하다던데, 나도 좀 들으면 안될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1990년대에도 '어른들은 몰라요' 혹은 '어른들이 끼면 난 도망칠 거에요'라는 주제는 아이들 사이에서 강력했다. 서브켤처를 생각해보라. 한국에서 1990년대는 서브켤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였다. 서브컬처의 핵심 정서는, 아주 유치하게 말하면, 결국 '어른들은 몰라요'다. 여기서 서브컬처가 오늘날 온라인상에서 유행하는, 어른들은 알지 못하는, '부캐 문화'의 기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당시 '아이들만의 제국'에 대해 배워보겠다며 나서는 어른은 없었다. 어째서 그랬던 것일까? 여기서 미국에서 1990년대에 얼트 록이 제시했던 서브컬처가 음악 시장에 의해 차용되어 팝 음악화되는 과정을 밟게 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이른바 어른들이 아이들 노는 '메타버스'에 대해 알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대부분의 어른들에게 메타버스는 '주식투자' 혹은 '창업'의 문제이지 않던가? 반면 1990년대에 내가 한국에서 얼트 록을 들을 때 얼트 록은 한국에서 돈이 되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른들이 내가 듣는 '힙한 록 음악'을 탐내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얼트 록은 돈이 되는 물건이었다. 얼트 록은 그렇게 대중 사이에서 트랜디한 '부캐'로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다 새로운 '부캐'에게 밀려 서서히 사라지게 됐다. 그에 비해 2020년대에 메타버스는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돈이 되는 아이들의 놀이로 여겨진다. 돈이 되기에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온다.' '1970년대생이 온다.' '1960년대생이 온다.' '1950년대생이 온다.' '1940년대생이 온다.' '1930년대생이 온다.' 그러다, 그 끝에 죽은 자들마저, 예컨대, '1900년대생'도 올지 모른다.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과거가, 죽음이, 전통이, 역사가, 어른들이, 미래에게, 생명에게, 상상력에게, 공상과학에게, 아이들에게 달려든다. 역사는 결코 메타버스로 도망간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21세기에 6.25와 반공주의의 망령이, 일제 시대의 망령이 찾아오는 것을 환영할 신세대는 없다. 이 지점에서 아이들은 경악을 하며 도망을 가고 싶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또 다른 부캐를 만들고 싶다. 반면 어른들은 그저 도래한 미래를 붙잡아 박제하고 싶다. 과거로 만들고 싶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양계장식으로 혹은 공장식으로 대량생산하여 찍어내고 싶다. 그렇게 거위의 배를 째고 싶은 게 어른들이다. 반대로 그저 그런 어른들을 보고 쉰내 난다며 도망가고만 싶은 게 아이들이다.

어째서 과거 어른들은 고무줄 놀이, 공기 놀이, 사방치기 놀이, 술래잡기 놀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한다고 여겨지는 아이들, 놀이터에서 흙장난을 한다고 여겨지는 아이들, 미끄럼틀을 탄다고 여겨지는 아이들에게 가서 진지하게 '너희들 요즘 놀이터라 불리는 대단히 영험한 무릉도원과 같은 곳에 가서 신비로운 놀이를 한다고 하는데, 나에게 좀 알려주지 않을래?'라고 질문하지 않았던 것일까? 어째서 어른들은 '너희 요즘 학교 화장실 칸막이라 불리는 신비로운 곳에 가서 담배라고 불리는 환상적인 연기를 내뿜는 무엇을 불에 붙여 빤다고 한던데 나에게 좀 알려주지 않을래?'라고 는 묻지 않는 것일까? 어른들 자신도 다 겪어본, 다 아는, 그렇게 해서 그 미몽으로부터 깨어난, 지나간 과거일 뿐이라고 여긴 결과다. 그러나 이제는 아이들이 하는 일에 대해 그러한 신비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하교길에 10대들이나 먹는 불량한 식품 정도로 여겨졌던 떡볶이도 거대한 프랜차이즈 사업 아이템이 되는 것이 21세기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고무줄 놀이를 21세기의 힙한 사업 아이템으로 만들어볼까 고심하는 어른들도 있을 것이다. 요즘 어른들은 아이들을 신주 모시듯이 한다. 아이들은 미래의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돈을 낳는 황금 거위다. 아이들은 미래의 고객으로서 모셔진다.

어쩌면 고객지상주의야말로 사회 내에서 청소년 인권을 가능케하는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1990년대에 10대 아이들이 학교에서 교사에 의해 공식적으로 구타당할 수 있었을 때 부족했던 것은 인권의식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듣는 록 음악이, 아이들이 보는 게임 잡지가, 아이들이 보는 만화책이 미래에 돈이 될 것이라는 사실만 알았더라도 '폭력 교사'와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 세 영역이 바로 오늘날 BTS와, 제페토와, 웹툰이 뜻하는 바이지 않은가? 오히려 그들은 나긋나긋하게 이렇게 물었을 것인다: '요즘 너희들이 보는 신비로운 잡지, 나도 좀 보면 안될까?' '요즘 너희들이 듣는 신비로운 음악, 나도 좀 들으면 안될까?' '요즘 너희들이 먹는 신비로운 떡볶이 나도 좀 먹으면 안될까?' '나랑 인터뷰 좀 하면 안될까?' 얼마 전 출판시장의 유행어 중의 하나는 '1990년대생이 온다'였다. 그래, 그들은 올 것이다. 그리고 갈 것이다. 그리고 2100년대생도 올 것이다. 그리고 갈 것이다. 오늘날 '세대'는 보편성을 잃어야만 한다. 세대는 유행하는 사업 아이템으로 포장되어 시장에서 팔려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로 마무리해보자. 내게 기성 세대는 단순히 쿨하지 못하기에 도망가고 싶은 대상이 아니었다. 내게 기성 세대가 내보인 폭력과 무지는, 내 삶을 걸고 답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여겨지는, 의문의 대상이었다. 내가 공부를 시작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내가 만난 어른들은 어째서 그토록 한결 같이 폭력적이고 무지했던 것인가? 내가 대학에서 알게 된 것은 그것이 한국 사회가 지닌 모순의 역사가 축적된 결과였다는 것이었다. 난 대학에서 발견한 실타래를 타고 가면 의문을 해결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학자라는 직종을 내 멋진 커리어로 삼아야겠다는 힙한 경영학적 마인드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공부를 하고 있는 게 아니란 뜻이다. 난 다만, 알지 못하는 상태, 무지의 한 가운데에 남겨지는 것을 두번 용납할 수는 없었을 따름이었다. 안다는 것이 곧 해방이었다는 뜻이다. 앎이 곧 가장 근본적인 탈출이었다는 뜻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내게 음료가 있다면 그건 커피이지 와인이 아니다. 와인은 깨어남이 아니라 잠듦을 뜻한다.) 난 '본캐'에서 해방되어 '부캐'로 도망가는 것에 무엇인가 빠진 게 있다고 느꼈다. 그보다는 앎을 통해 '본캐'와 '부캐'라는 이분법 자체에서 해방되고자 했다. 그렇게, 알고 싶다는 충동 하나로, 지도가 갈 수 있다고 말해주는 곳까지, 그리고는, 사회적 삶 일체가 그 형상을 잃기 시작하는 추상성의 세계로까지 갔다. 기성세대로부터 도망쳐 그들이 없기에 힙하다고 여겨지는 장소를 사업 아이템으로 팔아야겠다는 생각은 불가능했다. 내게 힙한 장소는 기성 세대가 사회의 곳곳에 거미줄 같이 쳐놓은 무지의 틀을 지적으로 깨는 일이 있기 전에는 도달할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가, 사업의 문제가 아니라, 앎과 삶의 문제인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거꾸로 말해볼 수도 있다: 쿨하지 못한 것을 피해 색다른 곳, 예컨대, 메타버스 속으로 이동하는 움직임만으로도 자기만의 삶을 사업가적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사회 내에서 더 이상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사람의 발목을 잡는 폭력적이고도 집단적인 무지가 거대하게 작동하지는 않게 되었다는 것, 더 이상 그 집단적 무지로부터 깨어나기 위해 분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사회 내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의 비율이 늘었다는 것, 그것이 한국 사회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선진국의 삶에 진입했다는 뜻이다. 

* 그런데 1990년대를 수놓았던 기라성 같은 '폭력 교사'들은 당시 대체 무슨 '빽'을 믿고 그렇게 막 나갈 수 있었던 것일까? 그들은 마치 뒤에 '보스'를 숨겨둔 '졸개'와 같지 않았던가? 사실 그들이 모시던 '형님'이 누구였는지는 명확하다. '서울대'라 불리는 '신'이 그것이었다. [벌새]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라. 교사는 외친다: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 아이들이 역겨움 속에 후창한다: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 오, 주님, 제 보잘 것 없는 찬송가를 받아주옵소서! 그러나 오늘날의 역설은 서울대 나와 대기업에 들어가도 스타 웹툰 작가보다 훨씬 더 돈을 못벌더라는 것이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서울대'라 불리던 '형님'이 '자본주의'라는 '형님'과 호기롭게 한 판 붙었다가 당혹스럽게도 무릎을 꿇었던 것인가? 황색지 저널리스트 탐정을 고용해서 뒷조사를 좀 해볼 '스캔들'이지 않은가? 그들이 만들어내는 헤드라인은 다음과 같으리라: '충격, 서울대 출신, 고졸 웹툰 스타 작가에게 깨져!' '충격, 서울대 출신이 고졸 웹툰 스타 작가에게 덤비면 벌어지는 일!' 헤겔이 '정신은 뼈'라고 했던가? 가장 고상한 것은 가장 저열한 것과 동일성 속에서 조우하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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