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304 [기생충], [오징어 게임], 상징, 알레고리 [오징어 게임]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을 보면 왜 미국의 작품은 늘 젠더와 인종에 대해서만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불만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자본주의와 계급의 문제가 너무도 자명하게 작동하고 있는데 왜 모든 것을 개인의 정체성 문제로 환원시키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늘 똑같은 이야기 밖에 없고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지 않냐는 것이다. 이러한 댓글을 보고 있으면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 이 모든 것이 30-40년 전부터 마르크스주의 문화 비평가들이 줄기차게 해왔던 이야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정체성의 정치(identity politics)에 대한 비판은 1990년대에 마르크스주의 비평의 중심 과제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 당시 그러한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은 엘리트 문화 비평가뿐이었다. 미국에.. 2021. 10. 27. 믿음에 구워먹는 고기 혹은 록음악 몇 가지 사실들: 난 가공식품은 먹지 않는다. 이 말은 내가 가공식품을 싫어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난 가공식품을 자연식품보다 좋아한다. 맛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한 적 없는 듯한 맛이다. 천상의 맛이라고나 할까. 식품첨가물의 맛은 '맛의 이데아'라고 할 만하다. 기존에 '미원'이라 불렸던, 그러나 한때 MSG라는 화학적 이름으로 다시 명명되며 사람들 사이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던, 식품첨가물의 그 센세이셔널했던 맛의 기억을 떠올려보라. 그러나 천상의 맛에는 대가가 따른다. 가공식품에 들어가기 마련인 온갖 식품첨가물이 몸에 염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난 가공식품이 지닌 천상의 맛이 그것이 내 몸에 들어와 일으키는 염증과 바꿀 만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잘 안 먹는다. 물론, MSG로 .. 2021. 9. 3. 선적 시간에서 비선적 시간으로 푸른새벽이 내놓은 가장 완성도 높은 앨범은 2006년작 [보옴이 오면]이다. 당대 주류 음악계가 촌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보옴이 오면]과 같은 앨범이, 주류 음악계가 아니라, 인디 음악계를 통해 나왔기 때문이었다. 당시 인디 음악은 주류 음악보다 훨씬 더 완성도 높으나 다만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인 음악을 뜻했다. 근래 인디 음악이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해보라. 인디 음악은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음악과 같이 여겨진다. 카더가든이라는 가수가, 이미 충분히 높은 완성도의 음악을 하고 있었음에도, 인디음악가로서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한 채 '출세하겠다'는 일념하에 주류 음악 경연에 출연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인디 음악은 음악 자체의 잠재.. 2021. 6. 15. 서태지, "Rock and Roll Dance" 초등학교 시절 추억이 깃든 곡이다. 내게 이 곡은 소풍날 아이와 워크맨으로 친구와 이어폰을 한쪽씩 나누어 듣던 화창한 날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아이와'라 하니 이상한 느낌이 든다. 소니에 인수되었다가 한번 사라졌던 경력이 있는 제조사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일본의 군소 업체가 소니로부터 상표권을 사들여 명맥만 유지되고 있다.) 일본 물건이 전반적으로 별볼일 없어진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아이와 워크맨은 원조 소니 워크맨과 디자인과 성능면에서 '쌍벽'을 이룰 정도였다. 거대한(?) LCD 화면이 달린 날렵한 디자인에 매료되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LCD 화면이라고 해봐야 흑백에 기껏 라디오 주파수 및 기타 기본 재생 정보 몇가지를 표시해주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그 정도.. 2021. 6. 8. "어메이징 그레이스" 아래는 존 뉴턴(John Newton)의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라는 찬송가의 가사다. 어려서부터 들었고 워낙 곡조가 좋기에 기억하는 곡이다. 특히 그리스의 가수 나나 무스꾸리(Nana Mouskouri)가 불렀던 판본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했던 것은 무스꾸리가 들려주었던 은총의 느낌이 정작 교회에서 실제로 찬송가로 불려졌을 때는 전혀 찾아오지 않더라는 데 있었다. 어째서 그랬던 걸까? 아마도 그 이유가 찬송가의 한국어 번역에 있지 싶다. 사실 한국어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은 "어메이징 그레이스"와 같은 곡이라고 할 수 없다. 아래 가사 번역을 비교해보라. 첫 번째 것은 영어 원문에서 내가 직접 번역한 것이고, 두 번째 것은 공인 찬송가 판본이다. 한국어 찬.. 2021. 5. 31. 김마리, "너의 이름은 맑음" '포크라노스풍'이라 명명하고 싶은 곡의 하나다. 지극히 사적인 느낌을 낸다. 이 곡은 대중과 예술가 개인의 만남으로 의도되지 않았다. 개인과 개인이 만남이 있을 뿐이다. 10대 감수성의 일기를 곡으로 만든다면 나올 만한 영상과 가사다. 한편으로 가사는 너와 나의 사랑 이야기 같이 들린다. 그러나 정작 영상 속 등장인물은 단일하다. 친구들과 동료들이 있어야 할 학교는 이미 폐교되어 텅비어 있다. 오로지 혼자 노는 모습이다. 마치 내가 사랑하는 '너'가 알고 보니 '나'이더라는 듯이 말이다. 영상 속에 삽입된 비디오를 보라. 마치 셀카처럼 등장인물 자신의 영상을 담고 있다. 이는 아래 곡의 세계관 속에서 2인칭과 1인칭이 동일할 가능성을 뜻한다. 10대 시절 일기가 결국에는 모든 것을 뽀송뽀송한 1인칭의 아.. 2021. 5. 22. The Chemical Brothers, "The Darkness that You Fear" 한국인의 영어 차용 방식은 종종 품사를 구분하지 않는 특성을 보인다. 최근의 예로는 '피지컬'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의 체구가 좋을 때 흔히 '피지컬이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내가 듣기에 이상한 말이다. 피지컬(physical)이라는 말 자체는 '신체의' 혹은 '물리적인'이라는 형용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영어로 '체구'를 뜻하는 말은 따로 있다. 피지크(physique)가 그것이다. 사실 영어 형용사를 명사로 차용 방식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추측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피지컬'의 반대말로 의도된 '멘탈'(mental)이라는 말이 동일하게 형용사를 명사로 차용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멘탈이 강하다/약하다'라는 말에서 '멘탈'은 '정신'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알다.. 2021. 5. 18. 연진 x BMX Bandits, "Do You Really Love Me?" 2000년대 중반 한국 인디씬의 한 가지 분위기를 가늠케 해주는 곡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당대에는 가장 달콤한 팝 음악이 의외로 인디씬에서 발견되었다는 데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래 음악에 일반 대중에게 어필하기에 모자란 점이라고는 없다. 음울한 정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 불편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정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당시 기준으로 완성도 면에서도 전혀 아마추어적이지 않았다. 차트에서 1등을 하겠다는 각오가 느껴지는 곡이 아니라는 점을 빼면 사실 메인스트림 가요계에서 들려오는 곡들보다 훨씬 더 팝적으로 참신하고 흥미로운 것이 2000년대 초중반까지 인디 음악이 지니고 있었던 특징이었다. 말하자면, 인디 음악은 메인스트림보다 앞서 나가는 음악이었지 딱히 골방에 갇힌 이상한 아이들이 하는 음악.. 2021. 5. 7. 허밍어반스테레오, "하와이안 커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곡이다. 원곡보다 아래 믹스에 더 애착을 느낀다. 사랑에 빠진 두 남녀 보컬은 그 어떤 고저도 없이 속삭이는 반면 전자오락실풍 배경음이 더 들떠있는 모습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러나 숨기고 싶기도 한, 감정들이, 입을 거치지 않은 채, 온몸을 통해 폭죽이 터지듯 삐져나오듯이 말이다. 연애란 10대 시절 전자오락를 하던 아이들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오락실에서 화면에 정신이 팔린 채 스틱을 휘두르고 버튼을 두드리던 몸짓을 생각해보라. 그 몸짓은 옆에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마구잡이로 움직인다. 의식이 통제할 수 없는 흥분된 몸이란 바로 그러한 몸을 뜻한다.) 여기서 1990년대풍 이별 후 폭풍과 같이 찾아오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진지하게 노래하는.. 2021. 5. 3. 이전 1 ··· 13 14 15 16 17 18 19 ··· 3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