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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 음악, 존속의 형식, 윤지영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의 인디 음악에 마음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404나 쾅프로그램 정도가 관심을 두고 들은 마지막 한국 인디 음악가였지 싶다. 스치며 들을 때는 전반적으로 수준급의 팝 성향 인디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 옛날보다 많이 늘었다는 인상을 받았더랬다. 우효란 음악가의 "민들레"가 한 예다. 잘 만들어진 곡이다. 전반적으로 그의 곡들은 듣기 좋다. 대체로 달콤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음악 안에서 마음이 머물 곳을 발견하지는 못한다는 데 있다. 근본적으로 나와 다른 세상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가끔 옆에서 바라볼 수는 있겠지만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되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근래 들려온 팝 성향의 곡에 대한 내 전반적 인상이 그러했다. 팬시한 식당에 가서 팬시한 음식을 맛있.. 2020. 6. 22.
뉴트로의 시공간, 음악, 박문치, 아프로퓨처리즘 박문치의 음악은 기존의 대중음악--특히 2010년대 대중음악--과는 다른 이해법을 요구한다. 여기서 그를 이해하고자 할 때 반드시 참고야야할 곡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박문치 인트로"다. 무엇보다 박문치의 음악이 기반하고 있는 시공간 개념을 보여주는 곡이기에 언급할 가치가 있다. 여기서 박문치가 흔히 '뉴트로 장인'으로 소개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뉴트로'는 한국의 21세기가 '시공간을 어떻게 이해하여 다룰 것이냐?"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택한 용어와 같다. 과거의 사회과학적 용어를 이용해서 말해보자: '뉴트로'는 직선적 '진보의 시간'이라 여겨졌던 시공간 개념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여전히 적용될 수 있는지를 묻는 암호명과 같다. 뉴트로의 시공간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던져지는 질문은 다.. 2020. 6. 19.
[떠돌이 까치]: '깡'의 전사(pre-history), 설까치와 최엄지 비의 등장 이전 '깡'의 '전사'(pre-history)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면, 1987년 제작된 [떠돌이 까치]라는 작품을 볼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은 지금 보기에 낯설다. 오늘날 보기 어려워진 마초적 남성이 주인공으로 설정되어있기 때문이다. 일단, 외모에서부터 다르다. 설까치의 외모는 전혀 '예쁘지' 않다. 그는 10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비슷한 나이 또래의 아이돌 그룹 남자 멤버들이 보여주는 '귀엽고 예쁜' 면모라고는 지니고 있지 않다. 혹은, 설까치는 오늘날 웹툰에서 묘사되는 10대 남성 캐릭터의 미모를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 거칠기 짝이 없는 까치집과 같은 머리와 외모를 한 그는 오직 '예쁜 엄지'에게 반하도록 설정되어있다. 거꾸로 말하면, 설까치의 외모를 보고서, 그것이 남자가 되.. 2020. 6. 13.
민수의 혼란, 김오키의 혼돈, 비의 '깡,' 그리고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민수라는 가수가 있다. "민수는 혼란하다"라는 곡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이른바 '민수의 혼란'을 김오키가 추구하는 우연성, 즉 '김오키의 혼돈'과 비교해보자. 아래 공연 영상에서 보듯 '민수의 혼란'은 인간적이다. 무엇보다 20대 초반의 남녀관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즉, 민수의 고민은 내가 정말 저 아이를 사랑하는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혼란은 사람 중심이다. '내'가 있고, '나'는 '너'를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나'도 모르는 답을 '너'에게 묻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겠는 날 너에게 물어." 관건은 '나'라고 불리는 인간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나'는 더 이상 사람으로서의 '나'와 동일하지 않다. 여기서 '나'는 사람(.. 2020. 6. 11.
박문치, 1990년대, 언어, 이미지, 검열 아래 박문치의 곡에는 1990년대를 단순히 조야하게 '베겼다'고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그 시절을 직접 살아본 사람으로서 너무도 편안하게 그때 그 시절 곡을 듣듯 들을 수 있다. 마치 최근 내가 원했던 이상적 곡이 이런 것이 아니었는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누군가가 '박문치가 누구야?'라고 물으면, '30년 전 10대들 사이에서 최고 우상이었던 박문치도 기억 못하냐?'라고 핀잔 섞인 답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이 말이다. 1990년대에 박문치가 없었던 것은 시대가 그를 이미 잉태하고 있었으나 다만 무슨 바쁜 일이 있어서 제때에 생명체로 진화시키지 못했던 사정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내가 너무 일찍 태어났거나, 아니면 박문치가 너무 늦게 태어났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아래 비디오의 '영상미.. 2020. 6. 6.
뉴트로, 공상과학적 과거, [88/18], 서울올림픽 아래 [88/18]이라 이름 붙여진 '서울올림픽 3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영상을 통해 어떻게 '복고'가 '세련됨'의 원천이 될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요즘말로 치면 '뉴트로'는 '레트로'와 다르다. 어째서 그러한가? 아래 영상의 8할을 차지하는 것은 1980년대에 찍혀진 영상이다. 그 자체로는 무척이나 촌스러운 것들이다. 만약 해당 영상을 통째로 본다면 지겨워서 금방 정지 버튼을 누르고 말 것들이다. 그러나 아래 다큐멘터리 속에서 80년대 영상은 새 생명을 얻고 있다. 그 원인은 편집 기법에 있다. 다큐멘터리의 의미 지평을 완결시키는 '나래이션'이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80년대 영상은 현대 미술관에서 관람하는 일련의 박제된 이미지와 같이 제시된다. 파편으로 박제된 이미지는 세련되다. 땀내나고.. 2020. 6. 4.
황소윤, 대중음악, 인물, 그리고 록음악 밴드 '새소년'으로 널리 알려진 황소윤의 솔로 앨범, [So!YoOn!]이 이미 한참 전인 작년 봄에 나왔었는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새로운 것'에 대한 내 관심은 항상 한 걸음 늦다. 게으른 것인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현재 한국의 대중음악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그 방식을 확인하고 싶다면, 이 친구가 어떤 음악을 하고자 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황소윤이 흥미로운 근본적 이유는 구태여 '철지난 록음악'을 자신의 음악적 기본값으로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황소윤이라는 인물 자체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래된 것'과 맞닿아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20여 년 전에 록 음악을 즐겨 들으며 자랐던 내 입장에서 황소윤은, 그 자체 '새로운 것'이라기보다, '오래된 미래'와 .. 2020. 1. 24.
유튜브풍, 지구인 되기, 전우주적 자본주의 프렌치 키위 주스(French Kiwi Juice)를 보고 있으면, 기존의 20세기풍 프랑스 예술가들이 그의 작업물을 두고 혀를 끌끌 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 예로 그는 음악가로서 자신의 이름을 영어로 작명했을 뿐 아니라 모든 곡의 제목을 영어로 단다. 또 가사도 영어로 만들어 부른다. 영어로 지은 이름 조차 '프랑스식 키위 주스'라는, 마치, 카페의 메뉴에서나 찾아볼 법한, 인간이 아닌, 사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는 미국식 상업주의에 대항하여 프랑스식 지적 삶의 가치를 주창했던 기존의 전통적 프랑스 예술가-지식인들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예컨대, 사르트르나 카뮈가 이런 식으로 가볍게 영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실제로 프렌치 키위 주스의 음악을 들어.. 2020. 1. 17.
음악의 시공간화 혹은 FKJ (French Kiwi Juice) 어째서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카리스마 가득한 이른바 '천재적 음악가'의 출현을 보기 어렵게 된 것일까? 이름만 들어도 모두가 아는 한 시대의 음악가, 음악가 개인의 천재성이 번뜩여 아무도 모방할 수 없을 것 같은 음악을 내놓는 음악가를 오늘날 등장하는 새로운 세대에게서 찾아보기는 어렵다. 사실, 전통적 '리더쉽'의 부재라고 할 만한 현상은, 정치 뿐 아니라, 음악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도 벌어지는 일이다. 예컨대, 2000년대 이후 등장한 록 밴드 중 내 뇌리에 한 시대를 새롭게 정의내려 이끌고 갔다고 기억되는 밴드는 없다. 록 음악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중 음악 전반이 그렇다. 반대로 오늘날은 수많은 다양한 이름 없는 음악가들의 시대인 것 같다. 이제는 누가 만든 음악인지, 해당 음악의 독창성과 그.. 2020. 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