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라는 가수가 있다. "민수는 혼란하다"라는 곡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이른바 '민수의 혼란'을 김오키가 추구하는 우연성, 즉 '김오키의 혼돈'과 비교해보자. 아래 공연 영상에서 보듯 '민수의 혼란'은 인간적이다. 무엇보다 20대 초반의 남녀관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즉, 민수의 고민은 내가 정말 저 아이를 사랑하는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혼란은 사람 중심이다. '내'가 있고, '나'는 '너'를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나'도 모르는 답을 '너'에게 묻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겠는 날 너에게 물어." 관건은 '나'라고 불리는 인간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나'는 더 이상 사람으로서의 '나'와 동일하지 않다. 여기서 '나'는 사람(person)의 범주를 지나 '주체'(the subject)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이렇게 말해볼 수 있다: '나'는 이미 언어 내부에 위치한 '주어'다. 여기서 주체의 문제는 흔히 '정체성'이라 불리는 '술어'(the predicate)을 찾을 때 봉합될 것이다. 이것이 근대적 의미의 개인(the individual)이 발생하는 방식이다.
김오키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그의 음악은 많은 경우 답을 내는 것 자체에 관심이 없다. "점도면에서 최대의 사랑"이라는 곡의 제목을 생각해보라. 주어(the subject)가 아예 없다. 주어가 발생하면 술어를 찾으려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주어가 없는 이유로 그의 음악은 질문에 질문을 중첩하여 덧붙이는 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김오키의 혼돈'은 '민수의 혼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을 때 얻어진다. 그의 음악은 주어가 설정하는 답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질문 자체가 목적이다. 이것이 그의 음악이 우연성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그의 음악에는 정체성을 지닌 혹은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인간이 애당초 없다. 흐름의 절단과 절단된 파편의 반복이 소리의 세계를 만든다. 예컨대, "For My Angel" 같은 곡에는 주제로서의 '멜로디 라인'에 따른 전개가 없다. 즉, 그의 곡은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여정으로서의 '시간성'(temporality)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의 음악은 시공간의 외부에 위치한다. 이것이 그의 음악을 듣게 될 때 인간적 문명 세계 밖, 미지의 공간에 위치하게 되는 것과 같이 느끼게 되는 이유다.
다시 민수로 돌아가서 인간적으로 말해보자. 아래 영상 속 공연 모습은 매력적이다. 밴드 멤버 하나 하나가 그저 소박한 인간으로서 행복을 구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영상을 보고 있으면 저들의 행복에 전염이 되어서 어깨를 들썩이게 된다. 여기에는 그 어떤 대단한 문명사적 혹은 산업적 제스춰도 없다. 다시 말해, '내가 최고'라는, '내가 이 동네 끝판왕'이라는, 2010년대 주류 음악판에서 횡행했던, 속류 힙합 자의식이 없다. 비의 "깡"이란 곡을 생각해보자. 그가 내세운 '깡다구'는 사실 그가 한때 내세웠던 '월드스타 비'를 현실화하기 위해 좋던 싫던 택해야만했던 남성적 자의식을 칭하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이유로 애당초 '월드스타 비'라는 표어는 비 자신에 의해 구현되지 못할 운명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진짜 '월드스타'는 '월드스타'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깡'이 아무 의미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깡'을 보다 세련되게 이어받은 후속세대들, 예컨대, BTS와 같은 이들이 '월드스타 비'라는 타이틀을 전세계인들 앞에서 그 어떤 부끄러움도 없이 현실화하기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깡'은 타고난 부끄러움을 감추어 이른바 '위대해지기' 위해 남성들이 필요로 하는 자질과 같다. 사실 '깡'은 2010년대가 요구했던 자질이기도 했다. 달리 말하면, 2010년대는 한국 음악 산업이 자신의 '위대함'을 세계인들 앞에 물리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용트림'을 하는 시절이었다. 반면 지금 시점에 비의 "깡"의 촌스럽게 보이는 것은 남성적 '용트림'의 시간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더 이상 용쓰지 않아도 한국의 음악 산업은 이미 완성도에 있어 세계적 수준에 이른 상태다. 2020년에 심지어 한국은 정치-경제적 선진국 클럽인 G7에 새로운 맴버로서 초청될 수준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점에 필요한 것은 더 이상 '깡'이 아니다. 거꾸로 어떻게 '깡'을 비틀지가 관건이다. '깡'은 구시대적이다. 비의 '깡'이 지닌 남성적 힘의 과시가 10-20대 세대 사이에서 흥미의 대상이 되는 역설이 벌어지는 것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다. 즉, 그의 '깡'은 공감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여 낯선 대상이다. 그래서 신기하고 재밌게 다가온다.
최근 등장한 세대는 어째서 비가 보여주는 저러한 '깡'이 필요했던 것인지, 과거 세대의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한다. 비의 "깡" 안무를 한번 보자. 안무의 하이라이트는 근육질의 팔 끝에 달린 주먹으로 바닥을 짚어가며 하체를 질질 끌고가는 장면이다. 너무도 힘으로 넘쳐 멋지기 짝이 없다. 그의 악다문 주먹과 강인한 팔의 힘에 끌려가는 하체가 바로 그 부끄러운 몸뚱어리, 멋진 화장으로든, 멋진 안무로든, 멋진 근육으로든 가리고만 싶은 뭄뚱어리를 보여주지 않는가? 여기 무대 바닥에 내던져진 몸뚱어리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관점이 필요하다. 다음과 같은 사고 실험이 가능하다: 다만 끌려갈 뿐인 복지부동의 몸뚱어리는 '한국인은 역시 안 돼'라는 말로 요약되는 '식민지 근성에 빠진 육체 덩어리'와 같지 않은가? 반면, 열등감에 빠져 부끄러워 움직이기 싫어하는 몽뚱어리를 멋지게 끌고가는 근육질의 팔이란 '후진국 한국 사회'라고 스스로를 자학하는 몸에 규율을 부과하며 거칠게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컴플렉스'의 물리적 구현물과 같지 않은가?
2017년 말에 나온 곡인 "깡"이 마치 IMF가 터졌던 1997년 말에 나온 곡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은 곡을 관통하는 '깡다구' 정신이 시대를 초월하는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비의 음악 세계는 그가 가수로 데뷔한 1998년 이래로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쉽게 말해서, 그의 세계관은 '깡으로 월드스타가 되고야 말겠다'라고 정리할 수 있다. 사실 '깡'은 한국 사회의 근저에 깔린 시대 정신이기도 했다. 1990년대 말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자신에게 인종차별적 발언을 한 미국 선수에게 이단옆차기를 날려가며, 한 시즌 18승을 이루어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로 했던 것이 바로 '깡'이지 않은가? 박세리가 1998년 US 여자 오픈에서 우승하기 위해 맨발로 연못에 들어가 샷을 날리기 위해 필요로 했던 것이 바로 '깡'이지 않은가?
1990년대까지 한국 스포츠계를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강조되었던 문구가 무엇인지 기억해보라. 그것은 (실력으로는 되지 않으니) '정신력으로 극복하자'라는 마법과 같은 말이었다. 쉽게 말해 '정신력으로 세계 제배'가 바로 '깡'의 정신이다. 이는 IMF 사태가 지나간 후 태어난 최근의 젊은 세대 입장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정서다. 오늘날은 '정신'의 시대가 아니라 '신체'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비의 신체가 내보이는 근육질이 실은 플라톤적 형상(Idea)의 문제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의 근육은 나약한,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신체를 가리는 갑옷이다. 어째서 그가 틈만 나면 '웃통을 까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여기서 알 수 있지 않은가? 실은 그가 옷 아래에 갑옷을 입고 있다는 데서 역설이 발생한다. 이미 갑옷을 입고 있는데 어째서 그 위에 거추장스럽게 옷을 더 입어야한단 말인가? 그는 벗었을 때 거대해지고, 입었을 때 왜소해지는, 역설의 사내다. 이것이 남성의 논리, 혹은, 남성의 정의(definition)이지 않은가? 헐크가 그러하고, 슈퍼맨이 그러하다. 그들은 모두 옷 안에 뭔가를 숨기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es; Id)을 드러내기 위해 항상 옷을 찢어야만 한다.
역설적이게도 2020년에 비의 '깡'은 그 강렬함 때문에 촌스럽다. 비의 "깡"이 촌스러워 관심과 놀이의 대상이 되는 시점에 새로운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니체와 같은 사람이 말한바,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의 측면이다. 아래 민수의 공연 영상이 오늘날의 감수성을 구현하는 것은 바로 이 '깡'에 대비된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특성을 내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10-20대는 더 이상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무한한 노력을 통해 세계를 제패하고자 하지 않는다. 뉴트로 문화를 생각해보라. 이들은 1990년대를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자기 것으로서 받아들인다. 여기서 1990년대가 실은 열등감에 대단히 시달렸던 시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1990년대는 '소니'에 미치지 못하는 '삼성', '토요타'에 미치지 못하는 '현대.' '너바나'와 '스매싱 펌킨스'와 '라디오헤드'에 미치지 못하는 '서태지,' '델리스파이스,' '언니네이발관,' '크라잉넛' 등으로 요약되는 시대였다. 반면, 뉴트로 문화는 바로 이 열등감 가득했던 1990년대를 새로 발견한 '멋진 우리 조상님'으로 여긴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 어떤 열등감도 없다. 바로 이 열등감의 부재가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을 내놓게 되는 한가지 배경이다.
마지막으로, 1990년대를 몸소 겪었을 김오키의 경우가 암시하는 바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자. 인간적인 민수의 혼란과 달리 김오키의 혼돈은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층위에 머물지 않는다. 여기서 니체의 인간론에 있어 또 한가지 중요한 축을 이루는 것이 '초인'(Übermensch)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쪽에서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측면을 보라고 말하지만 (Ecce homo), 사실 니체의 결론은 단순히 인간적이지 않다. 그의 인간론은 비인간론으로 귀결된다. 말하자면, 인간 너머의 것이 무엇일지 음악적 관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음악에 있어 뉴트로도 음악 산업적 현재도 아닌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보아야한다. '깡'은 이미 답이 아니다. 그러나 동일한 말을 너무도 인간적인 '뉴트로'에게도 해야한다. 사실 1990년대에는 많은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 그 중 잘 기억되지 않는 사람 중 하나는 노이즈가든의 윤병주다. 그 또한 당시 '깡'의 한 가지 판본을 보여준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최종적으로 택한 노선은 '깡의 추구'이라기보다 '무(nothingness)의 추구'라는 형태를 띠며 발전되는 특성을 보였다. 그의 노선이 정답이라는 뜻이 아니다. 참고해볼 요소가 있다는 뜻이다. 윤병주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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