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1

선적 시간에서 비선적 시간으로

by spiral 2021. 6. 15.

푸른새벽이 내놓은 가장 완성도 높은 앨범은 2006년작 [보옴이 오면]이다. 당대 주류 음악계가 촌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보옴이 오면]과 같은 앨범이, 주류 음악계가 아니라, 인디 음악계를 통해 나왔기 때문이었다. 당시 인디 음악은 주류 음악보다 훨씬 더 완성도 높으나 다만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인 음악을 뜻했다. 근래 인디 음악이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해보라. 인디 음악은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음악과 같이 여겨진다. 카더가든이라는 가수가, 이미 충분히 높은 완성도의 음악을 하고 있었음에도, 인디음악가로서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한 채 '출세하겠다'는 일념하에 주류 음악 경연에 출연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인디 음악은 음악 자체의 잠재성이 발현되는, 그렇기에 그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지위에 자부심을 가지도록 만들어주는, 장과 같았다.

1990년대에 인디 음악가들이 품었던 포부와 자부심은 '록스피릿'이라는 구호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실 '록스피릿'이란 것에는 1980년대식 메탈음악의 정서에 기반한 전사(pre-history)가 있다. 그러나 일단 그 부분은 넘어가자. 1990년대 크라잉넛의 사례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올해 초 공중파 방송 등에 나와 들려준 크라잉넛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 2000년대 초반 인디 음악가들 사이에는 음악을 하다가 굶어죽어는 한이 있어도 주류 방송에는 나가지 않겠다는 태도가 있었다. 대안 음악가로서 자부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디 음악은 촌스러운 대중 음악을 갈아치울 새 시대의 대안이었다. 여기서 당대 인디 음악과 주류 음악의 관계가, 동시대 내 존재하는 서로 구분된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선적 시간 내에 개재하는 과거와 미래의 문제였음이 드러난다. 즉,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대중문화는, 인디 및 주류로 구분되는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진보의 곡선 내로 수렴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하루가 멀다하고 인터넷상 개인 채널을 통해 기하급수적으로 공개되고 있는 영상 및 음원들로 인해 완성도 높은 것과 하루살이처럼 사라질 것들이 뒤섞이게 된 결과 선적 시간의 흐름을 가늠할 수 없게 된 근래의 문화적 양태와는 다른 것이다.

사실 선적 시간으로부터 비선적 시간으로의 이동은 한국이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과정을 그대로 반영한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이미 선진국으로 대접받고 있다. 한국은 2년 연속으로 선진국 클럽인 G7에 초청되었다. 회의석상에서는 의장국의 바로 옆자리를 차지할 정도의 위상을 누리고 있다.) 개발도상국이라는 말에 담긴 직선적 발전의 시간관이 이미 전제하듯 해당 단계에서는 문화 또한 단일한 방향성을 지니는 경향을 보인다. 선진국의 문화를 모델로 삼아 그에 근접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진국의 단계에 들어가게 되면 문화는, 더 이상 모방할 대상이 없게 되는 이유로, 그 자신만의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 BTS로 대표되는 하이브가 미국의 유니버설 그룹과 협업을 하게 된 정황을 생각해보라. 유니버설 그룹이 하이브에게 손을 내민 것은 '팬덤 문화'로 대표되는 21세기 대중음악의 새로운 흐름을 읽어내고 창출해낸 것이 미국이 아니라 한국의 대중음악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대중음악계는 지금 더 이상 미국의 대중음악을 모방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의 대중음악이 한국의 대중음악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선진국의 단계에서 문화는 더 이상 천재적 개인에 의지하지 않는다. 예컨대, 최고의 문화 수입상 서태지와 같은 인물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BTS는 '천재 개인'의 예술적 고뇌가 만들어낸 산물이 아니다. 테크놀로지와 산업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마찬가지로 이들 테크놀로지를 이끄는 것은, 천재 예술가가 아니라, 전세계에 퍼져 있는, 이름 없는, 수 억의 팬들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선진국의 단계에서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문화적 실험이 보다 중요해진다. 이는 사실상 예술가와 팬의 구분이 불분명해지고 있다는 뜻과 같다. 예술가는 팬의 한 명으로서 태어난다. 아마추어 팬이 성장하면 그것이 예술가다. 테크놀로지의 발전 덕분에 일반인들이 창작물을 보다 쉽게 만들어내고 또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제 한 명의 천재 개인 예술가를 대체하는 것은 천 명의 실험적-예술적 삶을 사는 보통 사람들이다. 포크라노스라는 레이블의 작업을 생각해보자. 과거였다면 아마추어 음악가로서 잊혀졌을 이들의 음악을 유튜브를 통해 끝도 없이 소개하고 있다. 사실상 일반인들이 만들어낸 음악을 공개하고 있다. 이제 음악은 천재 예술가 엘리트와 대중이 만나는 장이지 않다. 음악은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그리하여 보다 사적인 기억을 다루는, 영역이 되고 있다. 즉, 이 단계에서 예술은, 시대를 앞서가는 사고 혹은 전위적 사고의 형식이 아니라, 개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상적 대화의 양식과 같다. 조금 달리 말하면, 선진국의 단계에서 문화의 경험은 사소하게 변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예술은 특별하지 않다. 예술은 일상의 한 요소다. 애플이 만들어내는 전자제품이 지닌 미적 형식이 오늘날 사람들이 예술을 경험하는 일상적 방식이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는 꼭 좋은 현상만은 아닐 수 있다. 개인의 경험이 보다 넓은 공적 전망을 상실한 채 자기만족적 층위에 갇히게 되는 현상이 또한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실 사적 성질의 음악은 점차 잊혀질 것들, 그리고 잊혀진다 해도 세상이 굴러가는 데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들에 불과하기도 하다. 개개인의 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진다고 해서 큰 일이 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푸른새벽의 [보옴이 오면]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보자. 사실 아래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이 지금 듣기에 출중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여전히 들을 만한 것은 사실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옴이 오면]은 가사가 아니라 소리가 말을 하게 되는 순간 주목할 만하다. "사랑"이란 곡과 "하루"란 곡의 차이가 여기 있다. 전자가 가사와 함께 청승의 감정에 근접하는 경향을 띠는 것에 비해, 후자는 가사 없이 소리로 감정을 전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푸른새벽이 지닌 포스트록적 정서가 바로 여기 가사 없는 노래라는 층위로부터 나온다. 사실 포스트록은 인간 보컬 자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보컬을 사용할 경우 여러 다른 소리의 하나로서, 마치 색다른 소리를 내는 악기의 하나인 것처럼, 복무할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푸른새벽의 경우 포스트록적 분위기를 지니고 있긴 하지만 포스트록이라고 하기에는 보컬이 다소 도드라지는 특징을 지닌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컬이 소리를 의미화하는 중심으로 복무할 정도는 아니다.

푸른새벽에 있어서 소리 자체가 도드라지게 되는 것은 가사가 의미화에 실패하는 것에 비례한다. 언어적 의미화를 중시하는 가사가 배경으로 밀려나게 될 때 음악은 소리를 통해 보다 직접적으로 감각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소리를 둘러싼 실험적 관점이 등장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다. 사실 근래 쏟아져나오는 사적 음악이 결여하고 있는 요소 중 하나는 소리 자체에 대한 실험적-미학적 추구다. 거꾸로 말해보자. 선진국 단계에 이른 음악 시장에서는 역설이 하나 발생한다. 음악이 불분명한 가사와 함께 음향 실험으로 나아가지 않을 때 겉보기에 명증한 의미를 지닌 듯 보이는 가사가 실제로는 자기만족적 사적 경험에 매몰되어 있을 뿐인 경향을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선진화된 문화의 영역에서는 개인의 다양한 관점을 '진보'의 관점에서 통합하여 세계를 이해가능한 방식으로 제시하는 선적 시간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음향 실험이 공적-사회적 전망을 잃어버린 가요로 하여금 유아론적 자아에 갇히지 않게 해주는 방도로 작동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배경 속에서다.

--

[보옴이 오면] (200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