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사실들: 난 가공식품은 먹지 않는다. 이 말은 내가 가공식품을 싫어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난 가공식품을 자연식품보다 좋아한다. 맛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한 적 없는 듯한 맛이다. 천상의 맛이라고나 할까. 식품첨가물의 맛은 '맛의 이데아'라고 할 만하다. 기존에 '미원'이라 불렸던, 그러나 한때 MSG라는 화학적 이름으로 다시 명명되며 사람들 사이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던, 식품첨가물의 그 센세이셔널했던 맛의 기억을 떠올려보라. 그러나 천상의 맛에는 대가가 따른다. 가공식품에 들어가기 마련인 온갖 식품첨가물이 몸에 염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난 가공식품이 지닌 천상의 맛이 그것이 내 몸에 들어와 일으키는 염증과 바꿀 만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잘 안 먹는다. 물론, MSG로 이야기할 것 같으면, 과학자들은 분자구조상 건강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한다. 비타민 E를 만드는 데 쓰이는 d-토코페롤과 dl-토코페롤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하나는 자연에서 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석유를 원료로 만든 합성물이다. 그러나 구조자체는 동일하다. 사실 식품첨가물을 식약청은 안전한 물질로 규정한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조금만 먹는다면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조금씩 먹어서 평균 일년에 23kg의 식품첨가물을 먹는다는 통계가 있다.
최근 들어 난 지하철보다 버스를 선호하게 됐다. 지하철을 타는 건 목적 지향적이다. 반면 버스를 타는 것은 과정 지향적이다. 버스를 타는 일은 낭만적이다. 혹은, 현상학적이다. 예컨대, 서울에서 버스를 타면 온갖 볼거리가 눈 앞에 펼쳐진다. 여유도 없이 빽빽하게 도로변을 메운 건물들, 행인의 눈길을 끌고자 노력하는 팬시한 외모의 건물 안 상점들, 길 위의 수많은 사람들, 서로의 욕망이 화답하길 희망하는 선남선녀들의 걸음걸이들. 이 모든 것이 이동하는 버스 속 창을 통해 비추어질 때 일종의 '스펙터클'이 발생하게 된다. 이동하는 차량의 속도로 인해 같은 곳, 같은 장면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화하는 장면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버스는 스펙터클을 지닌 운송 수단이다. 속도로 치면 비행기가 훨씬 더 빠르다. 그러나 비행기는 너무 높은 곳에서 너무 빨리 난다. 그래서 볼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고속철로 말할 것 같으면, 버스보다 빨라서 보다 빠르게 변화하는 스펙터클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고속철이 지나는 대부분의 길은 논과 밭, 산 등으로 이루어진 지형이다. 한 마디로 도시가 아니다. 아무리 빨리 지나가도 비슷비슷한 장면이 이어질 뿐이다. 오직 도시에서 달리는 운송 수단만이 극장에 온 것과 같은 스펙터클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최적의 것은 버스다.
그러나 목적의 관점에서 볼 때 버스는 신뢰도가 낮은 게으른 운송 수단에 불과하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 도달할 확률이 지하철을 탈 때보다 떨어진다는 뜻이다. 이 점에 있어 도시에서 지하철의 목적지향적 능력을 따라갈 운송 수단은 아직까지 잘 없다. 그러나 지하철을 타는 일 또한 대가를 치루지 않으면 안된다. 마치 지옥에 온 듯한 시커먼 세상의 모습을 지하철 창문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볼 것은 크게 두가지다. 첫째는, 창문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이다. 지하철은 나르시시즘의 공간이다. 둘째는, 스마트폰의 스크린이다. 시커먼 동굴의 공간을 잊고 다른 세상에 접속하는 일이 벌어진다. 여기서 사회적 관계의 망은 지하철 차량 내 나의 옆에 물리적으로 위치한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스크린을 통해 현상하는 데이터의 흐름 안에 위치하게 된다. 지하철은 시체들이 쌓인 거대한 관과 같이 변한다. 반면 시체들이 보는 스크린은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천상의 공간과 같다. 스크린 안에서 세상은 물리성을 잃고 데이터화된다. 그렇게 물리적 세계는 가공된다. 어째서 최근 '메타버스'가 그토록 핫한 키워드가 되었는지 그 배경이 여기 있지 않은가? 사실 스마트폰 스크린을 위한 최적의 공간은 지하철이다. 그보다 더 완벽한 공간도 없다. 혹은, 건축가들이 가장 좌절할 만한 공간이 바로 지하철이 다니는 지하 통로이지 않은가? 날이 갈수록 공학의 영역을 넘어 미학마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고자 하는 것이 동시대 건축의 정체다. 그러나 땅 속 철로 내에서 미학의 패권은 오롯이 스마트폰 스크린에게로 넘어간다. 땅 속 철로가 그 어떤 미학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땅 속 철로는 순수한 기능과 목적으로만 이루어진 미학의 영도를 이룬다. 오늘날 건축가들은 미학적 경험을 두고 컴퓨터 공학자들과 경쟁을 한다.
10년도 더 된 아침의 [헌치]란 앨범을 들으며 가공되지 않은 음식을 먹는 느낌을 받는다. 사실 내가 생각하는 록음악의 매력이란 것 자체가 그러한 덜 가공된 느낌에 있다. 완벽하게 청자의 '니즈'에 마추어 프로듀싱될 될 때 록은 팝이 된다. 록음악이 낯선 미지의 것에 대한 감각을 선사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분명 식품첨가물이 선사하는 '천상의 맛'은 아니다. 록은 목적을 향해가는 중간에 발생하는 '질감'의 문제를 끼고 있다. 물론 록은 목적지향 또한 지닌다. 아래 [헌치]란 앨범에서 아침이 어째서 매력적으로 들리는지 생각해보라. 그것은 너절한 패배자의 음악과 같이 들리던 곡이 기대치 않은 순간에 너무도 순진하게 유토피아적 후렴구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타고 있다. 그곳에 고기를 구워먹자"라고 노래하는 "불신자들"을 보라. 믿음을 연료로 삼아 구워먹는 고기, 대체 이 음식은 무엇이란 말인가? 고기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의외로 무엇에 고기를 굽느냐에 달렸다. 숯에 구운 고기와, 연탄에 구운 고기는 전혀 다른 맛을 낸다. 그렇다면 던져야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고기를 굽는 최고의 연료는 무엇인가? 아침에 따르자면, '믿음'이 고기를 구워먹는 최고의 연료다. 고기는 믿음에 구워먹을 때 천상의 맛을 낸다. 록은, 음식으로 치자면, 형이상학의 불길에 요리하는 고기 덩어리와 같다.
언젠가부터인가 사람들은 듣기 좋은 음악을 선사하는 음악가를 '맛집'에 비유하기 시작했다. 음악을 듣는 것은 음식을 먹을 때와 별로 다르지 않은 물리적 현상이다. 음악은 더 이상 목적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목적(telos)과 달리 물리성은 가공되기 전 물질이 지닌 질감의 문제를 선사한다. 그렇다면 팝과 록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록의 경우 가공되기 전의 원재료를 보여주면서 곡을 시작한다는 데 있다. 예컨대, 언뜻 들으면 아침의 [헌치]는 조리가 덜 된 음식과 같이 보인다. 마치 접시 위에 생고기 한 덩어리, 생당근, 생감자 등을 아무 가공 절차도 없이 올려놓고서 음식이 다 되었다고 내놓는 것과 같은 순간들을 지니고 있다. 이 소박하고도 거친 질감이 '인디 록'이란 것의 정체다. '쉐프'들이 보기에 음식이라고 할 수도 없는 '유치한 음식' 혹은 '무례한 음식'이다. 그러나 아침이 음식 조리를 안 할 것이라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다만 그들은 의외의 순간에 음식을 조리할 뿐이다. 순서는 다음과 같다: 손님에게 덜된 음식을 내놓는다. 손님은 음식을 주저하며 먹기 시작한다. 그후 주방장이 예고도 없이 다시 찾아와서 손님이 손에 쥔 생고기 덩어리에 토치 불길을 붙여버린다. 그게 록음악이 '믿음'이라는 형이상학을 연료로 음식을 조리하는 방식이다. 내가 록음악을 사랑하는 이유는 록음악이 단순히 팬시하게 생긴 '미슐랭 쓰리스타 맛집' 음식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식당에서 내놓을 것 같지 않게 생긴 음식을 제공한 후 형이상학적 연료로 갑작스럽게 음식을 조리하기 때문이다. 록은 목적을 질감의 관점에서 새롭게 다루는 양식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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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ch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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