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바흐(J. S. Bach)가 만든 음악의 정반대에 뉴에이지 음악이 있지 싶다. 뉴에이지 음악은, 수학적-구조적이라기보다, 연속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 전통의 시발점에는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가 있다. 신플라톤주의의 요점은 프쉬케(psychē)와 소마(sōma), 즉, 정신과 몸 사이의 단절을 상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달리 말하면, 신플라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주관과 대비되는 의미의 객관적 음악 구조물이란 것은 애당초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이 경우 수학적 구조는 불분명한 경계를 지닌 신체에 직접 연결된다. 그 결과, 예컨대, 아래 하루카 나카무라(Haruka Nakamura)의 음악에서 보듯, 음들의 연결은 딱히 분명한 시작점과 종결점을 지닌 형태로 발전되지 않는다. 시중종의 완결된 구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언제나 중간이 있을 뿐이다. 예컨대, 이 경우에는 꼭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을 이유가 없다. 어디에서 시작하든, 어디에서 끝내든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음은 완결된 구조로서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 구조 없는 신체는 언제나 항상 중간에 있을 뿐이다.
이 중간에 대한 감수성은 오늘날 철학과 문학의 영역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신유물론적 정서의 요점이기도 하다. 정확히 신유물론이라 칭해지진 않지만 양자역학 등의 이론 물리학에 기반을 둔 캐런 베러드(Karen Barad)가 내놓은 얽힘(entalgement)이라는 개념이 좋은 예다. 사실 그녀가 내놓은 주요 저서 제목부터가 [우주와 중간에서 만나기](Meeting the Universe Halfway)다. 한편 '우주와 중간에서 만나기'라는 구절 자체는 앨리스 풀턴(Alice Fulton)의 시 "폭포수 실험"(Cascade Experiment)에서 가져온 것이기도 하다:
Because truths we don't suspect have a hard time / making themlseves flet, as when thirteen species / of shiptail lizards composed entirely of females / stay undiscovered due to bias / against such things existing, / we have to meet the universe halfway. / Nothing will unfold for us unless we move toward what looks to us like nothing: faith is a casacde. / The sky's high solid is anything / but, the sun going under hasn't budged, / and if death divests the self / it's the sole event in nature / that's exactly what it seems.
왜냐하면 우리는 진실이 그 자신이 (존재자들 사이에서) 느껴지도록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 의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온전히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채찍꼬리도마뱀 13종이, 그러한 것이 있을리 없다는, 편견 때문에 발견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주와 중간에서 만나야한다. 우리가 우리 눈에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을 향해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우리에게 펼쳐지지 않을 것이다. 신념은 폭포수와 같다. 가라앉는 태양은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하늘 높은 곳의 단단한 형상은 무엇이든 된다. 만약 죽음이 자아에게서 무엇인가를 박탈한다면, 자연에서 일어나는 유일한 사건은 우리에게 그러하게 보이는 바로 그것이다.
오묘한 이야기이지 않은가? 이렇듯 시(poetry)의 세계는 의외로 과학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과학은 객관주의 과학이 아니다. 예컨대, 먹방의 관점에서 음식 리뷰를 하면서조차 내용물의 크기를 자로 재는 과학적 행위를 생각해보라. 어떤 면에서 현대인은 이미 과학자다. 동시에 최악의 과학자다.) 인간적 감수성을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는 비인간적 세계와의 조우를 다루는 것이 시와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다시 뉴에이지 음악으로 돌아가면, 청자는 아래 음악 속에서 얼마든, 심지어 영원토록, 머물 수 있다. 애당초 삶과 죽음 사이의 단절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혹은, 청자의 존재 자체가, 자아(the self)의 개입 없이, 이미 음악 속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사실 아래 음악은 인간의 관점에서 들으면 그저 지루한 음악이라 여겨질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아이돌 가수의 음악을 듣고 싶은 사람이 아래 음악을 실수로 재생하게 된다면 '뭐 이런 게 다 있어'라며 꺼버릴 것이다. 말하자면, 표준적 인간을 위한 음악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음악인가? 조금 달리 질문해볼 수도 있다. 예컨대, 바흐의 음악은 누구를 위한 음악인가? 과연 그의 음악은 인간(person)을 위한 음악인가? 인간보다는 아마도 주체(the subject)를 위한 음악이라 해야할 것이다. 객체를 바라보는 분석적 주체 말이다. 주체는 경험적-감각적 인간을 뜻하지 않는다. 주체는 21세기 한국의 아이돌 음악을 즐길 수 없다. 구조적으로, 분석적으로 흥미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거꾸로 말해볼 수도 있다. 현대인들은 바흐의 음악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바흐의 음악은 일상의 음악이 아니다. 예컨대, 9시 뉴스에 보도되는 사건사고를 최고로 잘 이해하기 꼭 필요한 음악 양식이지 않다. 예컨대, 그의 음악이 코로나 집단 발병 뉴스의 배경 음악으로 쓰이게 되면, 사실이라고 보도된 것조차 사실성을 잃은 채 다른 세계로 흘러가게 된다. 그의 음악은 클래식 음악 애호가나 찾아듣는 다른 세계의 음악이다.
존재양식은 단일하지 않다. 겉으로 보기에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다 똑같은 인간일 것이라 생각해선 곤란하다. 예컨대, 다른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과 만날 때 우리는 친숙함을 가정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일은 우주의 비결정적 중간 지점을 떠나 하루 빨리 종결 지점에 이르고자 하는 반창의적 제스처에 불과하다. 오히려 당신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눈 앞의 사람이 사실은 다른 종(species)에 속할지 모른다는 가정을 해야한다. 이 낯섬이 우주와 중간에서 만나는 방식이다. 채찍꼬리도마뱀을 생각해보라. 무성생식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모든 것을 유성생식의 관점, 즉, 남녀의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그렇기에 무성적 도마뱀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 인간은 유성생식을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성차가 있기에 존재자로서 여겨진다. 그렇다면 거꾸로 무성생식의 관점에서 인간을 본다면 어떤 결과가 얻어질 것인가? 그러한 시각 속에서도 과연 인간은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무성생식적 비존재가 된다면, 인간은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인가?
다양한 존재양식이 있듯 음악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다. 어떤 음악은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경험을 위해 만들어진다. 어떤 음악은 분석적 주체를 위해 만들어진다. 어떤 음악은 인간이 아닌 것을 위해 만들어진다. 인간이 아닌 것은 동물과 식물이 될 수도 있지만 원자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음악을 들을 때 던져야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난 지금 무엇으로서 이 음악을 듣고 있는가? 이 음악에 반응할 때 나는 인간-사람인가? 아니면 주체인가? 아니면 흙으로서인가? 음악을 들으며 내 몸의 원자가 공기 중으로 얽혀드는 것을 느낄 수 있는가? 몸이 소멸하는 동시에 재생하는 그 흐름을 상상할 수 있는가? 물질적 상상력은 바흐의 음악이 다루지 못하는 영역의 하나다. 반만 완성된 물질이 일으키는 상상력의 작동 자체를 다루기보다는 그 불완전한 우주를 가져다가 완벽한 세계로 가공해내는 것이 그의 음악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음악 속에서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만물을 기획한 수학자의 음성을 듣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반면 뉴에이지 음악은 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융합을 다룬다. 신화의 세계를 생각해보라. 신화 속에서 종교는 인류학, 동물학, 식물학의 형태를 띠고 있다. 중간적 우주란 그러한, 완전히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들의 우주를 뜻한다.
* 시의 번역은 행갈이를 전혀 신경쓰지 않고 의미 위주로 했다. 마침표를 분명하게 사용하지 않는 문장의 특성으로 인해 중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부분들이 있다. 아마 내가 번역한 것과 달리 번역할 소지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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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tination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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