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수학은 애증의 대상이다. 한 예로, 난 중고등학교 시절 수학을 이해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내게 수학이 무엇인지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 또한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 시절 수학 교사들은 그저 튜링 머신처럼 문제풀이 기계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수학을 다룬 것이 아니라 수학 내부에서 일어나는 수의 기계적 작동 방식을 일부 시연해서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난 그들이 수학을 이해한 사람이었을 것이라 믿지 않는다. 그들이 진정 수학을 이해했다면 수학을 그토록 기계처럼 다루지 않았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난 그들로부터 수학에 대한 그 어떤 사랑도 열정도 느껴본 적이 없다. 내가 대학 진학 후, 수학적 객관성의 세계로부터 절연된 채, 주관성이라 불리는 인문학적-철학적 심연으로 뛰어들었던 바탕에는, 말할 것도 없이, 수학이 지닌 기계적 성질이 일으키는 무신경함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배경이 있었다.
수학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수학이 순수한 논리적 자율성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수학 외적 지시대상도 지니고 있지 않은 폐쇄성의 세계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경험 세계를 지우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해, 수는 수학 외적 사물과 아무 관계도 없다. 우리는 흔히 연필이 한 개, 두 개 등이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이 수학인 줄 안다. 그러나 수학은 바로 그 연필이라는 지시 대상이 완전히 사라질 때 비로소 시작된다. 물론 뉴턴 이후 수학은 물리학의 언어가 된다. 그러나 여전히 수학과 물리학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수학적으로 기술 가능한 세계가 꼭 물리적으로 존재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수학적으로는 n차원의 세계가 가능하지만, 물리적으로는 3차원이 물리적 우주의 표준으로 여겨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물리 세계가 수학적으로 기술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물리 세계의 모든 면모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의문을 던지는 것 또한 가능하다. 인간 경험의 비논리성을 생각해보라. 우리는 때로 자다가 가위에 눌리고 꿈에서 귀신을 본다. 우리는 특정한 장소, 특정한 사물, 특정한 존재 앞에서 기쁨이나 두려움을 느낀다. 물리학적 관점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이렇듯 경험은 늘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동요한다. 그리고 이는 수학적으로 기술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오류로 치부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객관적으로 기술될 수 없는 것의 세계는 수학의 한계 혹은 수학의 외부로서 이해되어야한다.
말할 것도 없이 주관은 세상을 의미론적으로 이해하도록 만들어주는 바탕이다. 주관의 발생은 수학적 객관의 세계로부터 소외된 영혼이 다시 객관을 찾아헤매는 여정과 같다. 근대 이후 철학 및 문학을 공부하는 일의 본질은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주관성의 매개 속에서 이해하고자 노력한다는 데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깊은 곳으로부터 체감되어 이해되지 않는 지식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눈 앞의 것이 체감되어 내 삶 속에서 이해가 될 때까지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물론, 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만약 무엇인가가 그 본질상 체감되어 느껴지지 않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러한 것은 세계 외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사라져야 하는가? 내게 수학이 그러했다. 그것은 체감되지 않기에 세계의 일부가 아니었다. 사실 학부 시절 내게 수학과 과학은 공부할 필요가 없는 학문에 불과했다.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인문적 사고 또한 논리에 기반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인문학은 논리를 체감하여 삶 속에서 의미의 문제로서 다룰 수 있게 해주기에 수학보다 우월하다고 여겼다. 사실 철학 및 문학은 수학을 포괄하는 상위의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을 공부하지만, 사실 난 감상적이라기보다 논리적인 사람이다. 한 예로, 몇해 전 여러 다양한 전공의 박사과정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MBTI란 것을 돌려봤을 때 난 이론 물리학을 전공하는 박사과정생보다도 훨씬 더 지독하게 논리적인 '과학자형'인 것으로 밝혀졌다.
MBTI는 논리적-분석적 사고에 기반하여 고안된 테스트다. 그러나 내 로고스 지향적 사고는 의외로 MBTI 테스트를 만들어내는 논리성과 불화한다. 그 이유는 실증주의 과학에 기반한 사고를 곱게 보지 않는 인문학적 사고의 특성과 관계가 있다. 내 눈에 실증주의 과학이 하는 일이란 그저 사람을 정의내리고 결정내리는 재판관의 일과 같다. 그러한 일은 인간이 지닌 잠재성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발현되는 방식을 고려하지 않는다. 인간은 가소성(plasticity)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인간성은 규정되어 있지 않다. 반면 인간이 규정되는 것은 범주를 정하고 범주의 정의를 내리는 일을 통해서다. 그것이 흔히 사회라 불리는 무엇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한국 사회는 인간을 학벌에 따라 규정한다. 미국 사회는 인종에 따라 규정한다. 범주 구분의 장점은 인간의 사고방식과 행위방식을 예측 가능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심지어 한번 범주가 구분되면 규정된 정의에 맞추어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게 된다. 예컨대, 명문대생은 자신이 명문대생이라는 자의식 때문에 명문대생처럼 행동한다. 또 그렇게 해서 산출되는 결과에 사회는 화답한다. 반면 이른바 비명문대생은 자기비하의 감정 등에 빠진 채 살아간다. 그렇게 산출되는 별볼일 없는 결과에 걸맞는 사회적 삶의 양식이 그들의 삶을 규정지으며 찾아오게 된다. 이처럼 범주 구분은 인간을 사회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만든다. 계급이나 젠더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회학적으로 규정된 인간이 인간의 모든 면모인 것은 아니다. 사회학적으로 범주화된 인간 이전에 위치한 철학적 존재의 문제를 생각해봐야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몇년 사이 난 수학에 이끌리고 있다. 물론, 난 수학이 지닌 자율적 논리 체계를 수를 가지고 다루지 않는다. 혹은, 물리적 현상을 수학 공식을 통해 기술하지도 않는다. 난 실증주의-객관주의 과학에 끌린 적이 전혀 없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미 말했듯, 내 관심사는 인간에게 고유한 주관성의 문제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어째서 뒤늦게 난 수학적 사고에 이끌리는 것인가? 내기 수학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간단하다. 오직 수학적 객관으로부터만 주관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부터 주체는 수학 안에 새겨져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수학은, 보다 폭넓은 의미에서, 객관 세계의 수학성을 뜻한다. 사회학적 범주를 통해 구분되는 인간 유형들, MBTI식 알고리즘을 통해 자신의 성질과 성격을 인지하게 되는 현상, 게시물의 인터넷 조회수를 통해 그 사람의 사회적 존재를 인지하게 되는 현상, 모든 것을 수치화된 등수의 문제로서 이해하고자 하는 현상, 모든 가치를 양화된 가격으로 환원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현상 등을 보라. 21세기는 숫자가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시대와 같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서열에 기반한 사고를 문제삼고, 이미 주어진 범주로 사물들을 재단하는 것을 문제삼고, 숫자화된 재산의 크기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일에 문제제기를 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숫자가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뜻과 같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이 흔히 말하는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다. 이 둘의 대립은 흔히 문과와 이과의 대립과 같이 여겨진다. 둘 사이의 대립 앞에서 내가 지니는 문제의식은 간단하다. 이 둘의 대립은 대립물의 동일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는 수학적 객관 자체를 주체의 문제로서 볼 수 있어야한다. 주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객관성에 대립된 주관성과 동일한 말이지 않다. 오히려 주체는 수학적 객관 내부에 흔적처럼 남겨진 불확정성 자체와 같다. 플라톤주의 수학이, 예컨대, 헤겔적 관점에서, 주체의 문제로서 이해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문학자로서 물리학자 김상욱의 강연을 보고 있으면, 마치 유혹에 빠진 듯, 다음과 같은 대안 현실(alternative reality) 혹은 평행 우주를 그려보게 된다: '만약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났다면 난 인문학을 공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난 자연과학자가 되었을 거다.' 기이하게도 최근 들어 난 내 학자로서의 숨겨진 본질이 어딘지 모르게 실은 수학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고 느낀다. 내가 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눈 앞에는 전자현미경을 두고, 손에는 메스를 든 채, 문학의 숨결을 파괴하고 해체하는 외과의사적 살인을 저지르는 일과 같다고 느끼기도 한다. 혹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내기 위해 문학의 살결을 뒤적거리고 있다고 느낀다. 사실 이는 서구의 근대 문학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전혀 신성모독적인 발언이 아니다. 서양의 문학은 이미 19세기에 공상과학이라는 장르를 스스로 태동시키지 않았던가. 내 수학적 태도가 문제되는 것은 동양의 문학을 다룰 때다. 예컨대, 동양화나 조선 시대 문학을 이해하는 데 수학이나 물리학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서구의 근대 철학 및 문학은 완전히 다르다. 사실 서양의 근대 철학은 수학이나 물리학에 대한 이해가 없을시 그 온전한 의미를 알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혹은 아주 단순한 예로, 원근법이 서양 예술의 역사에 끼친 영향을 기억해보라. 그러나 이는 서구의 철학, 수학, 물리학, 예술 등이 통섭가능하다는 말을 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서양의 인문학은 수학과 맞닿아 있지만 인문학이 수학을 대하는 태도는 과학자들이 수학을 대하는 태도와는 근본에 있어 차이를 지닌다. 아래 영상 속에서 김상욱이 유시민과 무한소(the infinitesimal)를 둘러싸고 보여주는 태도의 차이가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유시민은 제논의 역설이 제시하는 무한소 개념 앞에서 일종의 지적 매력을 느낀다. 그에 비해 김상욱은 그러한 매혹이 그저 수학적 오류의 일종일 뿐이라 여긴다. 실제로 무한소는 현대 수학에서 사실상 폐기된 개념이다. 김상욱의 지적처럼 해당 개념 없이 다른 모든 현상을 기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또한 무한소에 대해 정확히 유시민과 동일한 감정을 품고 있다. 무한소가 수학적 오류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 무한소는 수학적으로 말이 안되는 이야기인 것이 맞다. 그렇다면 어째서 난 무한소를 둘러싼 사유에 매력을 느끼는 것인가? 이 문제를 통해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이 수학적 요소를 두고 서로 조우하는 동시에 통섭불가능성을 발견하며 갈라서는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무한소의 문제는 아무 수학적 효용도 없으면서 기존의 수학 체계를 완전히 망가뜨린다는 데 있다. 칸토어가 무한소를 수학에 침투한 질병, 즉, 콜레라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 있다. 김상욱이 말하듯, 무한소는 그저 오류일 뿐이다. 거꾸로 말하면, 만약 누군가가 무한소에 끌리는 것을 느낀다면 그것은 무한소의 수학적 오류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일 뿐이다. 예컨대, 무한소는 극한 개념(the limit)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빠지는 수학적 오류다. 그런 이유로 김상욱은 수학자나 물리학자는 무한소가 제시하는 것과 같은 오류에 빠지는 것을 좋아하지도, 애당초 빠지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무한소는 휴지통에 버리면 만사가 해결되는 그런 잘못된 수학적 관념일 뿐이다. 쉽게 말해서, 수학적 용어라고 할 수조차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유시민은 수학적 체계에 오류를 일으킨다고 해서 무한소가 지닌 그 자체의 논리적 정당성이 어떻게 무시될 수 있느냐고 말한다. 학자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말한다. 난 이 지점에서 정확히 유시민과 동일한 관점을 공유한다. 수학과 철학의 차이가 여기서 발견된다. 철학은 결코 논리 체계를 붕괴시키는 현상의 등장을 무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철학은 논리 체계가 위기에 처해지는 지점에서 철학적 사고를 전개한다. 이것이 영미권 논리실증주의나 분석철학 등과 대립된 의미의 대륙철학이 위치하는 지점이다.
철학적 사고의 관건은 수가 발생하는 과정을 개념화하는 데 있다. 그에 비해 수학은 결코 발생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수학의 바탕은 물질(matter)이 아니라 무(nothing)이고 제로(zero)이다. 다시 말해, 수학의 시작점에 있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플라톤적 이데아 혹은 신학적 창조의 제스처다. 말할 것도 없이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뜻한다. 유한한 존재 혹은 수는 무한히 작은 물질이 개념으로서의 무한, 즉, 제로로 환원될 때 태어나게 된다. 극한 개념이 무한소를 다루는 방식을 보자. 예컨대, 김상욱은 제논의 역설이 지닌 오류를 설명하기 위해 미적분 개념을 개념을 사용한다. 즉, 뒤늦게 출발한 토끼가 거북이를 따라잡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1/2 (초) + 1/4 + 1/8 + 1/16 + . . .]으로 표기될 수 있다. 요점은 해당 수식을 얼마든 계산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즉, 여기서 시간은 이미 유한하게 결정되어 있다. 즉, '1/2 (초)'라는 것 자체가 이미 유한한 시간의 단위다. 같은 비율로 짧아지는 시간의 단위, 예컨대, 1/4(초), 1/8(초) 등으로 표현된 시간 또한 이미 무한하지 않다. 계산 가능한 정확한 비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얼마든 그들을 더하는 것이 가능하다. 여기에 논리적 오류는 없다. 이로부터 미분에서 말하는 dy/dx가 이미 정확히 계산 가능한, 유한한 수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dy/dx는 무한하지 않다. 한계(limit)를 지닌 유한한 수일 뿐이다.
그렇다면 제논은 무엇이 헛갈렸던 것인가? 문제는 그가 시간을 이미 비율을 지닌 수로서 표현해놓고서 정작 그것이 지닌 수학적 정합성 자체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무한소는 그저 허깨비였던 것일 뿐인가? 무한소가 애당초 지시하고자 했던 문제 의식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F=ma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공식의 관건은 가속도에 있다. 문제는 뉴턴 역학의 등장과 함께 우주에 자연스럽게 정지에 있는 사물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는 데 있다. 모든 것의 기본값은 등속직선 운동이다. 이제 우주는 물질 사이에서 발생하는 동적 역학의 문제다. 달리 말하면, 빅뱅에 의해 내던져졌을 때의 힘을 제외하면, 내던져진 물질들이 이루는 중력장이 곧 우주의 시공간을 이룬다고 말해볼 수 있다. 중력장 속에서 가속도는 등속으로 운동하는 물체에 가해지는 속도의 변화를 뜻한다. 이는 절대적 정지 상태 혹은 무(nothing)-공백(void)-제로(zero)으로부터 최초로 그 자체의 힘으로 일정한 움직임이 발생하게 되는 현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여기서 운동은, 자율적-자기의지적이라기보다, 관계론적인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제로는 신학적-개념적인 반면 운동은 항상 이미 수없이 많은 물질적-역학적 관계들을 포괄하고 있다는 데 있다. 쉽게 말해, 바로 이 둘 사이의 차이에 수학과 물리학 사이의 차이가 놓여있다. 수학은 이데아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데아적 수학을 물리성의 세계에 적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러한 관점에서 사실 물체들 사이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는 관계론적 움직임 위에 또 다른 움직임이 가해지는 일을 이해하고자 하는 작업은 수학에 기반한 뉴턴 역학의 관점에서 볼 때 기존 움직임과의 단절 뿐 아니라 연속성을 동시에 사고해야하는 간단하지 않은 문제를 제기한다. 즉, 가속도라 불리는 것이 지시하는 변화는 플라톤적-신학적 새로움의 기원(혹은 과거의 종말)인 동시에 물리적-물질적 과거와의 연속성 속에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어진 변화를 수학적 개념에 따라 '가속도'라고 칭하게 되면 이미 우리는 가속도를 문제적이지 않은 것으로서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뉴턴 역학에 있어 가속도는 미분 개념을 통해 통제 가능하게 된 유한한 수의 한 가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뉴턴 역학에서 물체의 질량과 가속도만 알면 해당 물체가 특정한 유한한 시간이 지난 후 어디에 위치해있을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즉, 힘(F)은 유한하게 양화된 수들이 맺는 연속적 관계 속에서 계산 가능하다. 이것이 이데아적 수학과 물질적 물리학이 조화를 이룬 세계의 모습다. 그러나 인문학자는 여기서 좀 다른 생각을 한다. 예컨대, 우주에서 등속 운동을 하는 물체에 가속도가 발생할 때 이는 순간적으로 연속성에 비연속성-단절이 가해진다는 말과 같지 않은가? 아무런 개념적 범주화도 가해지지 않은 우주에서 최초 순간적으로 등속 운동의 균형이 깨지며 속도가 덧붙여지는 그 순간의 혼돈을 떠올려보라. 그 찰나(instant)의 순간은 그 순간 그 자신에게 고유하다. 찰나는 그 어떤 기존의 연속성도 전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연속성에 대한 요구를 불러일으킨다. 유한한 시간의 연속성으로부터 단절된 찰나는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과 같다. 그러나 사건은 뉴턴 역학 내로 포괄되며 극한과 함께 유한한 양적 연속성을 부여받는 수순 속에 있기도 하다.
요점은 인문학은 연속성 자체를 단절의 발생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반면 수학이나 물리학은 단절을 근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단절은 유한한 수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연속체 내에 발생하는 초월성의 문제를 지시한다. 이를 받아들일시 수학적 체계 자체가 붕괴할 수 있기 때문에 수학은 결코 이를 허락치 않는다. 단절의 발생은 통섭불가능한 것의 발생과 같다. 초끈 이론(superstring theory)을 생각해보라. 양자역학적 미시세계와 뉴턴-아인슈타인적 거시세계에 연속성을 부여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크기를 지니지 않는 점 개념을 버리고 크기를 지닌 끈을 도입한다. 미시세계가 문제되는 것은 크기 없는 원자가 지닌 에너지가 예측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아무 것도 아닌 점은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크기가 없는 점은 있는 동시에 없다. 이는 유려한 대칭성과 연속성으로 이루어진 수학적 세계가 보장될 수 없다는 뜻과 같다. 수학자나 물리학자는 이를 해결해야할 문제, 즉, 연속성을 다시 찾아내야할 문제로서 받아들인다. 그러나 거꾸로 인문학자는 바로 여기서 단절적 초월성이 시작되는 현상을 발견한다. 즉, 철학적 사고는 수학적 연속성이 붕괴하는 지점에서 비로소 개시된다. 철학적 사고에 있어 제로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철학에 있어 제로는 유한으로 셈해지는 무한과 같다. 즉, 제로는 유한한 수의 세계 속으로 침투해들어간, 무한이 보낸, 스파이와 같다. 달리 말하면, 유한한 수는 무한히 작은 것(the infinitely small)으로부터 태어난다. 수학은 그 사라진, 무한히 작은 것의 흔적을 제로 속에 남겨두고 있다.
제로의 문제와 관련하여 유시민이 인용하고 있는 [놀랍도록 줄어드는 사나이](The Incredible Shrinking Man)의 대사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영화 속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아주 가깝다, 무한소와 무한대는. 하지만 문득 나는 그것들이 사실은 동일한 개념의 두 극단임을 알았다. . . 창조의 이 모든 광대한 위험은 나름의 의미가 있어야 했다. 나 역시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리고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아진 지금의 나도 역시 의미가 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0은 없다. 나는 여전히 존재한다." 이 영화에서 제로는 부정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화자에게 제로는 존재의 반대말 혹은 의미의 반대말과 같다. 그는 자신이 제로일 수 없다고 느낀다. 이는 기독교에서 예수의 죽음 이후에 부활이 찾아오는 논리를 거부한다는 뜻과 같다. 즉,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제로 혹은 죽음은 보편자(모든 것 혹은 무한한 것)를 체현하기 위해 물질이 반드시 거쳐가야하는 초월적 단절의 단계와 같다. 여기서 작품 속 화자가 말하는 "하느님"이 기독교적 신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은 물질이 지닌 잠재성 자체를 의미한다. 이로부터 주인공이 무한소를 통해 무엇을 의미하고자 하는지 추론해볼 수 있다. 즉, 그에게 있어 무한소는 무한을 의미하는(signifying) 제로의 상태에 이르지 않은 물질의 잠재성 자체를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여기서 잠재성은 세어지지 않은 것들의 세계와 같다. 아직 수가 되지 못한, 그 어떤 수학적 보편자의 응시에도 노출되지 않는, 죽었다고 말할 수도, 살았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들, 그러나 그 자체로 이미 의미로 충만한 것들의 세계를 뜻한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속에는 수 많은 세어지지 않은 존재들이 있다. 사회 계급이라는 개념-범주 외부에서 살아가는 존재들, 젠더라는 개념-범주 외부에서 살아가는 존재들, 인종과 민족 외부의 존재들 등. 인문학이 수학을 다루는 것은 세어지지 않은 존재들을 그들 자신의 이름으로 개념화하기 위해서다. 인문학이 무한소와 관련된 사유를 단순히 수학적 오류로 치부하여 제거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마지막으로, 유시민으로 돌아가자. 어째서 그는 한때, 학자적 면모에 어울리지 않게, 그리고 결코 하고 싶지 않았건만, 정치의 세계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고 느꼈던 것인가? 그것은 그가 세어지지 않은 자들을 대변해보고자 했기 때문이지 않은가? 그들을 위해 그 자신이 제로가 되고자 했던 것이지 않은가? 그러나 동시에 제로가 되는 일의 고통 속에서 그 자신의 삶을 잃어버렸다고 여겨 평범하고도 유한한 수의 하나로 되돌아가기를 택한 것이지 않은가? 최근 그가 유한성과 삶의 덧없음을 강조하게 된 맥락이 여기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무한소 앞에서 끌림을 느끼기도 한다. 그가 말하듯, "사랑은 모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어지지 않은 것들은 단순히 모호한 것, 즉, 수학적 오류이지 않다. 사랑은 보편자에 의해 세어지지 않아도 그 자신이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여길 줄 아는 물질 자체의 잠재성을 뜻한다. 역설적이지만 존재는 보편자의 관점에서 보기에 먼지에 불과하기 때문에 여전히 잠재성을 지닌다. 인문학은 여기 보편자와 잠재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진동 속에 위치한다. 수학은 세어질 수 없는 것들을 아름답지 않다고 여긴다. 그러나 인문학은, 흔히 '추하다'고 여겨지는 것 속에서, 세어질 수 없는 것들에 고유한, 전혀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고자 한다. 인문학은 수학으로부터 버려졌으나 수학 내부에 여전히 존속하는 잠재성을 발굴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의 관점에서 수학이 애증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다.
* 무한소에 관한 이야기는 42:00 경에 시작하여 대략 20여 분간 이어진다.
* 유권자의 투표 행위에 기반하는 한 민주주의 사회는 수학적 세계라 할 수 있다. 동일한 방식을 따라, 정치의 영역에는 다른 모든 수를 대변하는 제로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을 우리는 정치인이라 부른다. 여기서 유권자들은 어떤 제로가, 나를 대신하여, 고통을 체현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어야한다. 그리고 그 고통에 공감할 수 있어야한다. 대의제 민주주의 하에서 고통의 공감은 셈해짐(counted)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아래 영상의 시작부에 삽입된 노무현 대통령의 영상이 보여주듯,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 및 투표의 수를 세는 일(counting)의 중요성은 결코 간과될 수 없다. 오직 세어진 숫자만이 지방 정부를 선택하고 구성하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세어지지 않은, 수의 세계 외부에 남겨진 잠재성은 아무런 힘도 지니지 못한다. 그렇기에 투표를 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이것이 민주주의 하에서 벌어지는, 숫자에 기반한, 대의 (representative)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달리 말하면, 안타깝지만, 현실정치는 근본에 있어 잠재성을 다루지 않는다. 현실정치는 전혀 인문학적이지 않다. 그보다 훨씬 더 기계적이고 무심한 것이 현실정치다. 숫자에 기반한 민주주의가 때때로 최악의 결과를 낳기도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체감되지 않는 무심한 숫자를 투표 행위를 통해 체현(embody)하여 최소한으로라도 온기를 불어넣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체현의 논리조차 알지 못하는, 영혼을 상실한 채 그저 거대한 숫자로 표현되는 탐욕만을 기계장치와 같이 추구하는 인간들이 지배하는, 중우 정치로 빠질 위험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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