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을 보면 왜 미국의 작품은 늘 젠더와 인종에 대해서만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불만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자본주의와 계급의 문제가 너무도 자명하게 작동하고 있는데 왜 모든 것을 개인의 정체성 문제로 환원시키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늘 똑같은 이야기 밖에 없고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지 않냐는 것이다. 이러한 댓글을 보고 있으면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 이 모든 것이 30-40년 전부터 마르크스주의 문화 비평가들이 줄기차게 해왔던 이야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정체성의 정치(identity politics)에 대한 비판은 1990년대에 마르크스주의 비평의 중심 과제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 당시 그러한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은 엘리트 문화 비평가뿐이었다. 미국에서 그들의 호소에 화답하는 대중은 없었다.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미국의 대중은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등 개인의 신체에 기반하여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의미론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삶을 사는 방식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들에게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의 주장은 당위성에 기반한 고리타분한 계급 담론과 같이 들릴 뿐이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은 그렇게 비평의 영역에서 약화되어갔다. 그러다 2020년대에 와서 대중 일반이 그러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내 자본주의적 삶의 조건이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는 뜻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기생충]은 서구 엘리트 비평가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은 작품이다. 그러나 난 [기생충]을 보고 난 후 이 작품이 서구의 전통적 엘리트 비평가들 사이에서 비평의 중심에 서기는 어렵겠다고 느꼈더랬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현실을 그토록 적나라하게 다루는 작품이 문학 등의 영역을 통해 상징 및 알레고리에 대한 고찰에 기반한 의미론을 오랜 시간 발전시켜온 서구의 비평가들 입장에 깊은 지적 유희를 제공하는 텍스트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는 문학 비평 전통을 기준으로 서구의 영화 비평계를 이해하고자 한 것이기에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시네마토그래피의 관점에서 볼 때 [기생충]이 여러 의미론적 장치를 이미지, 인물, 배경 등을 통해 전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계급적 차이에 따라 배경 속 인물이 상하로 배치되거나 이동하는 장면을 담아내는 테이크 등을 보라. 상징주의 시네마토그래피가 있다. 그러나 각각의 인물이 내면에 있어 그 자신에게 고유한 질적 차이를 내보이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지시하는 계급이 다를 뿐이지 계급의 형태로 집단을 지시한다는 점에서는 계층의 고하를 막론하고 [기생충] 내 인물은 모두 상징적으로 안정화되어있다. 예컨대, [기생충] 내 그 어떤 인물도 '햄릿형' 실존의 동요를 내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여기서 비유적 언어의 전통에 상징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른 비유의 언어에 비할 때 상징이 가지는 미덕은 이해하기가 쉽고 직관적이라는 것이다. [기생충]이 대중성을 지닐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기생충]은 어려운 엘리트주의 실험적 영화가 전혀 아니다. [기생충]은 상징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알레고리의 층위를 고도로 다루는 지적인 비평가 취향의 영화가 아니다. 생각해보라, 언제부터인가 봉준호 영화 내 인물들이 동화나 민담에서 발견될 듯한 어떤 유형화(typification)를 따르는 듯이 느껴지기 시작하지 않았던가? 그와 함께 그의 영화가 대중적이 되었다고 느껴지기 시작하지 않았던가?
근대 이후의 내러티브에서 알레고리는 주관성의 문제와 결부되어 논의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요점은 알레고리가 논의되려면 '근대적 개인'이 내러티브의 중심에 놓여야한다는 데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근대 개인은 중산층의 삶 혹은 그 이상의 배경을 요구한다. 여기서 이러한 질문을 해볼 수 있다: [기생충]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반지하에 사는 기태인가? 아니면 으리으리한 저택에 사는 박사장인가? 박사장은 중산층 이상의 배경을 지니고 있기에 개인의 내면을 전개시키는 물적 조건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기생충]의 내러티브는 박사장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기생충]은 박사장이 개인으로서 겪게되는 내면을 묘사하는 심리 스릴러물이 아니다. 박사장은 오히려 내면 혹은 별다른 내적 고뇌가 없는 천박한 사장님에 더 가깝다. 그들 가족 구성원 대부분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남겨지는 것은 기태 및 그의 가족이다. 그렇다면 그는 [기생충]의 주인공-개인인가?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주인공으로서 그의 문제는 가난으로 인해 내면을 발현시킬 위치에 있지 못하다는 데 있다. 그는 하층민이다. 여기서 중산층의 진지함 대신 거꾸로 하층민의 '코믹함'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그는 가난 앞에서 고뇌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가족은 그 어떤 체면치레나 도덕적 양심의 문제도 없이 상층부 지배 계급의 '기생충'이 되어 그들과 한몸으로서 살아남는 데 골몰할 뿐이다.
달리 말하면, [기생충]에 근대적 개인은 없다. [기생충]은 주인공 인물-개인이 없는 영화다. 이것이 [기생충]이 알레고리가 아니라 상징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방식이다. 예컨대, [기생충]에서 인간성은, 내적 심리 혹은 고뇌의 형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냄새 나는 벌레의 이미지 혹은 기생충의 이미지를 통해 발현된다. 기생충은 자본주의적으로 합리화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근대적 개인이 전개시키는 내면의 작동을 기록하기 위한 알레고리가 아니다. 그보다 기생충은 상층민의 신체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하층민의 유기적 삶이 지닌 일체성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즉, 기생충으로서 하층민은 상층민과 유기적 한 몸체를 이룬다. 기생충과 숙주는 공생적 생태계를 이루는 두 요소다. 그들은 적대하지 않는다. 라이프니츠(G. W. Leibniz)가 말하듯,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 (Natura non saltum facit). 기생충과 숙주는 혁명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상징 속에서 사회의 유기적 총체성이 전면에 나서게 되는 방식이다. 그에 비하면 개인의 주관성은 유기성에 가해지는 위협과 같다. "하나의 삶"(one life)을 주창하는 코울리지(S. T. Coleridge)가 알레고리를 싫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서구 영화의 내러티브들, 서구의 엘리트 비평가들이 좋아하는 내러티브 일반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들의 내러티브는 대부분의 경우 인물의 심리라고 여겨지는 것을 통해 서사를 전개하는 경향이 있다. 데이빗 핀쳐(David Fincher)의 [나를 찾아줘](Gone Girl)라는 작품 혹은 그가 일부 연출에 참여하기도 한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를 생각해보자. 서구인들 사이에서 세상의 만사는 개인이 지닌 심리적 동요 및 갈등에 기반한 암투와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 [나를 찾아줘]에서 내면은 결혼 생활의 긴장감이 일으키는 심리 드라마-내러티브의 형태로 현상한다. [하우스 오브 카드]의 내러티브는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특정 정치인 개인이 지닌 내적 야심의 형태로 현상한다. 쉽게 말해서, 서구 내러티브의 중심에 있는 것은 심리를 지닌 개인이다. 이 때문에 서구의 내러티브에서 내면을 지니지 않은 개인, 예컨대, 하층민 출신 인물은 주인공으로 주목을 받기 어렵다. 서구의 내러티브에서 기태 및 그의 가족과 같은 인물을 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다. 서구의 내러티브 구조에서 그들 하층민은 '아웃사이더'로 치부되어 그저 사라진다. '병풍', 즉, 주인공을 위한 배경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반면 [기생충]에서 하층민 인물들은 주목을 받는다. 한국의 내러티브는 개인의 내면이 일으키는 알레고리의 문제에 딱히 더 큰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내러티브에서 인물은, 내면을 지니고 있든 말든, 주목을 받을 수 있다. '개인'이 받는 '스포트라이트'와 같은 주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수 비가 그토록 사랑하는 '나를 감싸는 화려한 조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상징'이 되어 개인 이상의 것으로서 주목을 받는다. 상징적 인물론이 기본값이기 때문에 한국의 내러티브는 개인을 뛰어넘어 '계급론'을 펴는 게 가능하다.
한국의 작품이 지닌 내러티브가 하층민으로 전락하고 있는, 그리하여 '개인'으로 서지 못하게 된, 전세계의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이유는 한국의 내러티브가 집단성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중산층으로서 개인의 내면을 지니고 있지 않은 자들은, 예컨대, 심리 스릴러물을 보며, 스릴 있고 재미있다고 느낄 수는 있어도, 그것을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서 공감하여 받아들일 수는 없다. 문제는 이들이 전지구적으로 훨씬 더 큰 인구를 차지한다는 데 있다. 여기서 다시 [기생충]에 대한 내 평가로 돌아가보자: [기생충]은, 훌륭한 영화이지만, 전통적 서구 엘리트 비평의 중심에 서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기생충]이 근본에 있어 개인의 내면 혹은 주관성에 기반한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기생충]은 개인에 관한 영화라기보다 장소에 관한 영화다. 지상과 지하를 오가는 연결점으로서 건축물이 '서스펜스'의 대상으로 현상하는 이야기 말이다. 박사장의 저택 및 그의 건물 지하로 이어지는 숨겨진 계단실을 생각해보라. 바로 이 지점에서 '개인'일 수 없는 하층민 혹은 땅 속에서 살아가는 지구인들이 [기생충]에 지대한 관심을 보내는 일이 가능해진다.
여기서 최근의 [오징어 게임] 열풍이 [기생충]이 지니고 있는 한국식 내러티브의 특성이 극대화된 결과에 가깝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즉, [오징어 게임]은 자본주의 하에서 하층민으로 전락해가는 지구의 수많은 비개인들의 삶을 대변하는 보기 드문 작품이기에 그토록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지 다른 게 아니다. 헐리우드 내러티브에는 그들 비개인을 위한 자리가 없다. 그들의 자리는 삭제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의 내러티브 안에는 그들을 위한 자리가 있다. 개인적 내면의 층위를 떠나 생존을 위해 지하 세계 혹은 게임장-도박장으로 내려가는 인물들을 위한 내러티브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에 기반한 전통적 서구 엘리트 비평가층이 한국의 콘텐츠를 둘러싸고 지금 전지구적으로 벌어지는 현상 앞에서 어리둥절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개인의 내면에 기반하지 않은 이야기 구조가 어째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개인주의에 파묻힌 나머지 그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개인주의가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 여기게 된 사고의 기반이니 당연한 일이다. 개인주의의 외부로 나갈시 자신들이 더 이상 세계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니 말이다.
쉽게 말해서, 한국의 내러티브는 집단성에 기초한다. 그게 전세계인에게 지니는 한국식 내러티브의 매력이다. 서구 비평의 관점을 학습해온 한국의 비평가들이 흔히 '한국식 신파'라고 비판해온 것들을 생각해보자. 신파는 근대 개인의 내면에 기반하고 있지 않기에 촌스럽다고 여겨진다. 옆에서 누가 울면 같이 따라서 울고 싶어지는 반비판적 혹은 반지성적 감정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내적 분석(analysis)이 아니라 외적 흉내내기(mimesis)에 기반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전염적-집단적 감수성은 전통적 서구식 비평가들이 가장 못견뎌하는 요소다. 지금까지 엘리트 비평가들은 늘 이러한 관점에서 작품을 비평해왔다. 한국의 서구식 엘리트 문화 비평가들이 전통적 한국의 감수성 앞에서 수치심을 느꼈던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는 [기생충]과 같은 작품에 신파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기생충]의 내러티브가 지닌 집단성 혹은 상징주의가 그 밑바닥에 있어서 실은 한국의 집단적 신파 정서로까지 이어지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기생충]은 한국식 집단 정서를 상징주의적으로 잘 승화시켰기에 그 예술적 가치를 지니게 된 경우라는 뜻이다. [기생충]은 권세 앞에서 좌절하며 질질 짜는 신파의 집단 정서가 눈물을 그치고 부끄러움도 모른 채 온갖 수단을 동원해 권세 속으로 스며들고 말겠다는 블랙 코매디 정신으로 대체될 때 나오게 되지 않는가?
[오징어 게임]으로 가보자. [오징어 게임]은 자본주의 하에서 신음하는 인간 군상에 관한 상징주의적 이야기다. 자본주의적 현실이 상금을 타기 위해 사람들이 뛰고 구르는 [오징어 게임]의 기하학적-미학적 세트장으로 전환되는 방식을 보라. 주술에 빠지게 만드는 듯한 화사한 색감을 보라. 바로 이 프레임이 이 작품이 제공하는 상징주의 미학의 틀이지 않은가? 그러나 이 상징적-주술적 구조물 속에서 벌어지는 집단의 생존 투쟁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온 것이다. 사실 생존의 위기에 처해진 집단적 삶에 관한 이야기는 근대 개인의 내면에 기초한 이야기에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이다. 전쟁을 배경에 둔 고대 서사들을 생각해보라. 혹은 재앙과 재난에 관한 민족 서사들을 보라. 어느날 드래곤 혹은 음험한 마법사가 찾아와 마을 전체가 저주에 걸리게 되는 상황을 그려내는 민담들을 보라. 차이가 있다면 오늘날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빠진 흑마술과 같은 주술이 '자본주의'라고 불린다는 것 뿐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신체 포기 및 데스 게임 참여에 대한 동의가 사람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라 불리는 흑마술이 작동하는 방식이지 않은가?
지금 우리가 한국의 콘텐츠에 열광하는 지구인들을 통해 보는 것은 21세기에 반엘리트주의 집단성이 되돌아오는 방식이다. (한국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민중성'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에 한국의 내러티브는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그 이유는 21세기가 더 이상 개인주의 엘리트의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평균적인 보통의 삶에도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국의 내러티브가 제공하는 집단적 삶의 모습에 반응하고 있다. 그들이 젠더, 인종, 섹슈얼리티의 문제에 시큰둥한 것은 젠더. 인종,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최소한의 인간적 삶이 마련된 바탕 위에서 작동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중산층의 삶에 미치지 못할 때 인간은 주관성 혹은 내면을 전개시키지 못한다. 그러한 조건 속에서는 자신의 인종이 무엇인지, 자신의 성이 무엇인지 따위를 고민하고 있을 겨를이 없다. 예컨대, 오늘날 인터넷에서 횡행하는 사고 방식이 어째서, 개인주의에 기반한 분석적 심리 및 그로부터 발현되는 개성이 아니라, 밈(meme)이라 불리는 상징인지 생각해보라. 혹은, 벌레 '충'자를 사용해서 인간 개인을 벌레의 부류로 끌어내리고자 하는 일베식 상징주의 어법을 생각해보라. 이는 자본주의 하에서 빈부격차가 갈수록 커지게 되면서 개인의 내면이 설 공간이 점점 줄어드는 현상과 동시적이다. 오늘날 삶은, 개인의 실존이 아니라, 집단의 생존이 걸린 상징의 문제다.
벌레가 되어가는 작금의 상징주의적 상황으로부터 21세기에 한국의 내러티브가 어떠한 역할을 해야할 것인지가 도출된다. 21세기 예술은 날이 갈수록 인간 이하의 벌레가 되어가는 상징을 인간 혹은 인간 이상의 비인간(inhuman)--혹은, 벤야민이 말하는, 해방적 신적 폭력(divine violence)--으로까지 고양시키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하지 않는가? 그렇게 집단적 삶의 양태를 복구시켜야하지 않는가? 지금 횡행하는 상징주의적 사고 방식은 근대 개인의 내면이 몰락하고 있다는 신호와 같다. 엘리트주의 비평이 기반하는 중산층의 삶은 갈수록 몰락하고 있다. 오늘날 전통적 엘리트 비평이 영향력을 잃어가는 원인이 사실은 여기 있다. 개인의 주관성은 비평과 분석을 필요로 하는 대상이다. 개인의 내면을 분석적으로 치열하게 이야기해야하는 것은 개인주의가 도덕적 양심을 도출하지 않을시 무척이나 악날하게 이기적이 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개인주의자에게 비평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비평적 작업은 중산층의 삶이 바탕에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예컨대,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개인의 주관성이 아니라 집단의 상징이다. 지금 집단성의 상징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은 오늘날 개인의 도덕적 내면을 떠받치는 물적 토대 자체에 균열이 가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한국의 문화가 전지구적 삶을 이끄는 새로운 모범이 되고자 한다면 '불가능해지고 있는 개인주의'라는 문제를 보다 치열하게 고찰해야한다. 반대로 한낱 장사나 하고 돈이나 벌어보려는 관점에서 지금 한국의 콘텐츠가 얻고 있는 전지구적 관심에 접근했다가는 금방 그 영향력을 잃고 말 것이다.
* 쉽게 말하면, 서구인들에게 세계는 그 자체로 정신병자들의 세계와 같다. 이 정신병적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면 어떤 작품이 나오게 될까? 그 한 가지 판본을 신원호가 제시하는 순진무구함의 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특히 시즌 2를 보라. 시즌 2의 특징은 시즌 1에 비해 인물이 혹시라도 내적으로 지니고 있을 수 있는 악의 및 계략에 대한 의심과 의혹이 완전히 제거된 세계라는 데 있다. 계략은커녕 그 어떤 '밉상 캐릭터'도 없다. 예컨대, 시즌 1에서 추민하라는 인물이 내보였던 일말의 불안정한 내적 긴장이 시즌 2에서 어떻게 양석형을 향한 일편단심 사랑과 함께 단단하게 굳어가는지 보라. 좋은 말로 그녀는 굳건하게 사랑스러운 인물이다. 그러나 나쁜 말로 그녀는 해석의 중의성을 잃은, E. M. 포스터(Forster)와 같은 비평가가 말하는, 입체적 인물(the round character)에 대조된, 평면적 인물(the flat character)다. 동일한 이야기를 양석형이라는 인물에게도 적용해볼 수 있다. 시즌 1에서 그가 매력적인 인물이었던 것은 이혼남으로서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을 것 같은 어두운 과거를 저변에 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즌 2에 오면 그는 그저 너무도 당연하게 원래 그 자신의 본질이 그러한 것이었던 것처럼 추민하의 일편단심 사랑를 받아들인다. 어두운 과거라 불리는 내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그 어떤 의미론적 의식-사건도 없이 말이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자연스럽게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 2는 드라마로서의 서스펜스와 긴장을 거의 대부분 상실하게 된다. 반대로 그 때문에 너무도 마음 편안하게 신파의 감정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물론, 신원호가 제시하는 신파의 세계는 촌스럽지 않다. 신원호는 한국의 전근대 신파 정서를 스타일의 차원에서 '근대화'(modernize)한 사람이라 할 만하다. (첨언하자면, 물론, 난 그의 작품을 즐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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