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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과 날라리 미국 음악

by spiral 2023. 6. 15.

아래 마이클 머드라노(Michael Medrano)의 "Do Your Thing, Babe!"와 같은 곡은 차트의 정상을 찍는 유형의 음악과는 다르다. 사실 거꾸로다. 마이너한 취향을 지닌 사람들이 듣는 음악에 더 가깝다. 그러나 대단히 감각적이고 세련된 측면을 지니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음악은, 한국 청자들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힙한 이국적 분위기에 도취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홍대나, 연남동, 우사단길 같은 곳에 위치한 인스타그램풍 인테리어가 잘 된 카페나 클럽 같은 공간을 기획하는 사람들의 취향과 일치한다. 물론 아래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마이클 머드라노라는 친구는, 한국 기준에서 봤을 때, 한 가지 큰 결점을 지니고 있다: 그의 외모와 스타일은 한국인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 콧수염부터 시작해서 공연시 입고 나오는 카우보이풍 복장에 퀴어 드레스 코드가 가미된 취향--예컨대, 탱크탑을 입고 빤짝이가 가득 묻은 팔뚝을 드러내는 취향, 사진을 찍을 때 팬티만 입은 채 털복숭이 알몸을 드러내는 취향 등--은 결코 '인스타풍'으로 여겨질 수 없다. 그의 스타일은 미국미국한 로스엔젤리스 언더그라운드 B급 클럽 문화풍이다. 하룻밤 섹스를 노리는 느낌이 무척 강하다. 마지막 노랫말을 보라: "결국 우린 알몸이 될 거야"(I know that we are gonna end up naked)다. 순 날라리 음악이다. 이렇게 말해볼 수 있다: 한국인이 보기에 마이클 머드라노에게서 힙한 부분은 어디까지나 음향 효과에 한 한다.

미국에서 마이클 머드라노의 음악을 듣는 사람은 동일한 음악을 한국에서 인스타풍 배경음악으로서 듣는 사람과 종류와 부류가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나 할까. 사실 1990년대에 흑인 랩음악이나 백인 얼트록 등이 한국에 건너온 방식이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한국에서 세련됨을 쫓는 이른바 '문화적 엘리트'들이 듣는 미국 음악이란 것이 정작 미국 본토에서는 많은 경우 비주류 저항적 음악이거나 비주류 날라리 음악이라는 뜻이다. 이는 그 역을 보면 확실해진다. BTS는 한국의 기업이 만든 산업적 기획의 산물이지만 정작 미국으로 넘어가서는 비주류 계층의 정서--비백인, 젠더프리 비이성애 그룹--를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 그렇게 해서 풀뿌리 팬덤을 쌓을 수 있었기에 성공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미국 사회에서 대중문화적 세련됨은 날것의 그러나 그렇기에 자유로운 밑바닥 인생으로부터 나온다. 반면 한국 사회에서 세련됨은 그러한 미국식 비주류 문화를 중산층의 문화적 엘리트들이 수입함으로써 도입되었다. 1990년대는 그러한 미국 문화 수입 활동이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 그때 20대의 나이에 있었던 자들이 지금 거대 기획사를 차려서 이른바 K팝이란 것을 지휘하고 있다. 그 한 정점이 BTS다.

미국의 비주류 저항 및 날라리 음악과 한국의 세련된 중산층 주류 대중음악를 잇는 대표적인 인물로 박진영을 들 수 있다. 박진영은 늘 자신을 '딴따라'라고 칭했다. 1995년에 발매된 그의 두번째 앨범은 제목부터 '딴따라'였다. 1990년대의 맥락에서 그가 '딴따라'라는 말을 전면에 내세웠을 때 해당 구호는 자기비하와 자기옹호를 모두 담고 있었다. 1990년대까지도 대중문화는 이른바 '배우지 못한' 자들이 활동하는 영역이었다. 쉽게 말해서, 대중문화의 영역은 광대의 문화로 여겨졌다. 그러나 1980년대 AFKN을 통해 마이클 잭슨 등을 보고 들으며 자란 박진영 입장에서 대중문화는 문화적으로 가장 세련된 자들이 활동하는 영역이었다. 만약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광대라 불려야한다면, 광대는 사회적 존경을 받아야 마땅한 '쿨한' 부류로서 재정의되어야했다. 딴따라의 전면적 승인 및 문화적 이미지의 승격, 이것이 1990년대에 박진영이 개입한 지점이다. 사실 '딴따라'에 대한 승인은 민중문화가 대중문화의 형태로 재정의되는 순간과 같다. 과거 민중문화의 주된 양식은 문학이었다. 보다 정확히는 시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대중성의 관점에서 문학과 시는 쇠퇴하게 된다. 반면 영화와 대중음악이 융성하게 된다. 이것이 김대중 정부의 대중문화 부흥정책을 통해 국가적 및 제도적으로 승인되는 것이 1998년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문구보다 더 이 시절의 정책을 잘 담아내는 구호도 없다. 한국에서 영화, 음악, 온라인 게임 등의 대중문화는 전부 이 시기에 산업으로서 기반을 다지게 된다. 서태지가 "문화 대통령"으로 자리매김된 것 또한 김대중 정부 시절이다.

박진영은 광대와 아이돌 사이의 매개자와 같다. 이는 그의 출신 배경을 보면 보다 명확해진다. 그의 특징은 이른바 '고학력 딴따라'라는 데 있다. 그는 소위 말하는 '학벌'을 지니고 있다. 그는 연세대학교 출신이다. 그는 어린 시절 미국에서 2년 반을 보내며 영어도 어느 정도 익혔다. 사실 이는, 1990년대를 기준으로, 그를 한국 사회의 엘리트로 여겨지게 만들기에 충분한 배경이다. 그러나 이 상태에서 그가 한 일은 '딴따라질'이었다. 이는 박진영 입장에서 자신의 '딴따라질'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의 이른바 엘리트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을 만족시키고자 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과거 한국에서는 '서울대를 나오면 떡뽂이 장사를 해도 성공한다'는 말이 있었다. 박진영의 경우는 '연세대를 나오면 딴따라질을 해도 멸시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경우와 같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배경은 박진영의 JYP를 이른바 3대 기획사 중에서 연습생의 사회적 책임감을 가장 중시하는 기획사로 만드는 동력으로 작동하게 된다. 예컨대, YG 출신이 약물과 관련해 얼마나 많은 구설수에 올랐는지 생각해보라. JYP 출신은 상대적으로 그러한 오명으로부터 자유롭다. 이는 해당 회사가 단순히 '딴따라' 전통으로부터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JYP에서는 단순히 음악적 끼가 출중하다고 해서 대접받지 못한다. 그 외에 한가지가 더 있어야한다. 그것을, 전통적 한국의 용어로, '인성'이라고 말해볼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JYP가 엘리트 중산층이 '딴따라'를 문화적으로 재정의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나오게 된 회사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박진영의 음악 인생은 미국의 하층민 대중음악이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중산층 엘리트에 의해 수입될 때 어떤 사회적 코드 변환이 일어나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요점은 한국의 중산층 엘리트가 미국 비주류 하층민 음악을 수용할 때 그들의 음악적으로 세련된 '스타일'만 수입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데 있다. 이는 박진영의 음악에, 예컨대, 흑인 음악 특유의 '소울'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그의 음악은 흑인 음악 특유의 소울만 수입한 경우다. 즉, 흑인 음악의 소울을 낳은 사회적 모순과 그에 대한 고찰 등은 수입하지 않았다. 미국의 비주류 음악을 낳은 바탕에는 미국 사회의 인종, 계급, 젠더 모순이 있다. 한국으로 들어올 때 이 부분이 제거된다는 뜻이다. 음악적 스타일만 받아들이는 방식이 한국에서 '딴따라'질이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만든 배경인 것은 사실이다. 하이브의 방시혁이 미국 CNN과 인터뷰 중에 개인의 자유 및 자율성을 제약하는 K-팝의 공장식 기획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받았을 때 '미국 가수들은 한국 가수들보다 자유롭게 살지는 모르지만 거꾸로 알콜이나 드럭 등의 문제에 종속되어 시달리지 않느냐'는 요지의 반문을 던진 적이 있다. 이는 그의 회사에 있는 가수들이 '순 날라리'들이 아니라는 뜻과 같다. 이는 그의 회사가 사회적 시선을 중요시 여기는 한국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사실 미국의 음악가들은 '순 날라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미국 사회가 그 자체로 날라리 사회일 것이라 착각해서는 안된다. 이는 미국의 대중문화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 보스턴 지역에 사는 2-300년 전 이주해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는 백인 미국인들의 보수성은 대단하다. 그들은 상류 사회의 엘리트주의적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예컨대, 아이비리그 대학을 나와 판검사직, 의사직 등에 종사하는 특성, 사회적 시선을 의식하는 특성 등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이와 달리 미국의 대중음악계는 상류사회에 대한 반발을 기본으로 삼는 근본 없는 날라리들이 모이는 곳이다. 이러한 날라리적 특성을 전형적으로 대표하는 공간이 캘리포니아이고, 그 중에서도 로스엔젤리스다. 물론 그렇기에 온갖 참신하고 세련된 음악이 나오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밑바닥 출신 음악가들이 알콜과 드럭 등의 문제로 아주 쉽게 무너지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데 있다. 한마디로 자기통제와 규율이라고는 없는 삶을 살다 무너지고 만다. 예컨대, 얼마나 많은 미국의 아역 스타들이 무절제한 삶에 의해 배우로서 롱런하는 데 실패하는지 기억해보라. 터미네이터2]의 에드워드 펄롱, [나홀로집에]의 맥컬리 컬킨 등.

물론 미국 대중문화의 특징은 개인의 자율성이 시험에 오르고 또 타락하는 과정 자체를 문화적 소재로 삼는다는 데 있다. 사실 이 전통은 서구 문화 자체의 특징이다. 그 한 기원이 존 밀턴의 [실락원]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은 타락이라는 주제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빌둥'은 타락으로부터만 가능해진다.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볼 때 K-팝 시스템은, 방시혁이 아무리 아티스트 개인의 자율성을 보장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주장한들, '아버지로부터의 버려짐'을 근간에서부터 사고하고 그러한 과정 자체를 문화화하는 시스템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과거 서구 사회는 문학, 특히 '빌둥스로만'을 통해 타락을 사고하고 구원에 대해 이야기할 사회문화적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한에서 그들은 자신 있게 K-팝의 공장식 사육에 대해 지적할 자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근래 서구 사회는, 특히 대중문화의 영역은, 더 이상 빌둥의 역량을 지니고 있지 않다. 미국의 대중문화계는 문학성을 잃은지 오래다. '빌둥스로만'은 더 이상 대중문화 양식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빌둥'이 사라질 때 남겨지는 것이 순간적으로 참신하고 세련되지만 욕망 추구에 의해 자기파괴에 이르게 되는 현상이다. 마이클 머드라노의 아래 곡을 보라. 대체 이 곡에 어떤 자기반성의 형식이 작동하고 있는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순간적으로 기분 좋은 곡일 뿐이다. 그게 아래 곡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아래 곡은 클럽에 가서 하루밤 '플러팅'하며 '익사이티드'되는 순간을 잡아내는 곡과 같다. 가끔씩은 아주 좋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전부가 되면 곤란하다. 지속가능한 삶의 양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콜과 드럭과 섹스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면 인간은 별볼일 없는 종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때려잡자, 알콜, 드럭, 섹스'라는 주장을 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선 곤란하다. 사실 근래 한국에서 경찰과 검찰을 중심으로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쌍팔년도 액션영화 내러티브를 구사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표면적으로 이러한 시도는 말이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최근 어릴적부터 미국물을 먹고 자란 한국의 상류층 자제들의 마약을 둘러싼 행태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법이 '때려잡자, 마약범'일 수는 없다. 그러한 구호는 그저 '때려잡자, 공산당'의 또 다른 판본일 뿐이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소리다. 중요한 것은 대체 무엇하러 애당초 미국에 아이들을 보내는 것인지, 과연 그것이 올바른 선택인지부터 질문을 던지는 데 있다. 과거 유학은 '엘리트'들의 전유물이었다. '후진국 한국'의 뜻있는 소수 엘리트들이 '선진국 미국'에 건너가 미국 상류사회의 지적 특성을 익히기 위한 과정과 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런 취지는 사라진지 오래다. 한국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책임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미국에 가게 되면 애당초 개인 욕망을 위한 것이 유학이었던 만큼 개인의 쾌락 추구를 위해 마약을 하게 되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전개가 아니다.

여기서 더 큰 문제는 '본받을 모범'으로 여겨졌던 과거에 비해 최근 미국 사회가 그 자체로 많이 망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미국의 대중문화는 전통적으로 서구사회가 문화적-사회적 안전장치로서 준비했던 빌둥스로만 프로그램을 상실해가고 있다. 개인의 욕망 추구만이 남겨진 저질스러운 개인주의 및 자유주의의 산물이 현단계 미국의 대중문화다. 물론 미국의 대학에서는 교양으로 문학을 가르친다. 그러나 문학에 진지한 관심을 보이는 학생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인 유학생은 더욱 그러하다. 마약이란 것은 사회적 책임감에 대한 의식 없이 미국물을 먹게 된 한국인들이 한국에 돌아가 뿌리는 씨앗이지 다른 게 아니다. '유학'이라는 형태로 작동하는, 주류 사회의 성공 공식으로서 껍질만 남게 된 한국의 사대주의적 사고 및 그 뒤에 있는 속류 엘리트주의가 미국의 마약문화를 한국으로 불러들이는 주된 동력이다.

근래 미국에서조차 K-팝 시스템을 직간접적으로 도입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보자. 이는 그들의 대중문화가 '교양'을 상실한 결과 '욕망하는 개인'을 통제할 방도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개인들이 규율 없이 욕망하게 되면 그 사회는 몰락하게 된다. 미국 사회는 지금 그러한 신호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전통적으로 개인의 욕망보다는 사회성을 발전시켜온 한국의 문화가 훨씬 더 나은 시스템으로 작동하게 된다. 사실 지금 미국은 K-팝을 도덕적으로 비평하고 있을 여유 따위 없다. 미국은 지금 세계적 패권을 잃어가고 있다. 쉽게 몰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패권 상실의 신호는 미국 내 대중문화에서부터 느껴지는 바다. (사실 이는 미국의 길거리만 걸어보아도 느낄 수 있는 바다. 혼자말을 하는 것과 다름 없는 방식으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구걸하는 백인 노숙자들 그룹, 위협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흑인 그룹 등 미국의 거리만 걸어도 이 나라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7-8년 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문학성과 빌둥을 상실한 대중문화, 알콜과 드럭과 섹스가 전면에 오는 문화, 이런 것들이 강해질 때 그 사회는 결국 몰락하게 된다. 미국 대중문화의 '스타일'만 수입한 한국의 문화수입 방식이 차라리 다행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다.

* 이전에도 말했지만 BTS가 처음부터 미국의 주류 백인 중산층 집단에게 어필하는 음악을 했기에 미국에서 성공했다고 믿는다면 오산이다. 백인 중산층 집단이 대체 뭐가 아쉬워서 비영어권 비백인 음악을 듣는단 말인가?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 사회에는 인종간 갈등이라는 문제가 있다. 중산층 백인이 미국 사회의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미국 사회에는 그들에게 동화될 수 없는 비주류 집단이 있다. 그 때문에 비백인 그룹의 경우 주류 질서를 거스르는, 자기들만의 음악적 바탕을 마련하고자 한다. 재즈 및 랩 음악 등의 서브컬처가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된다. 역설적이지만 미국 대중문화에 활력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 주류 질서에 저항하는 비주류 노선이다. BTS가 미국에서 성공했을 때 그 바탕에 있는 것은 21세기 들어 문화의 영역에 있어 미국 특유의 백인-흑인 갈등 구도가 제3의 요소, 즉 비백인-비흑인 요소에 주도권을 내주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미국에서 비백인-비흑인 인구가 늘어난 결과다. 늘어난 미국 내 비백인 그룹이 BTS라는 이름 하에 모이게 된 결과가 BTS 현상이라 말해볼 수 있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한 가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미국에 거주하는 사람 입장에서 한국 출신 BTS에 딱히 반감을 가질 이유가 없었기에 BTS를 중심으로 여러 다른 그룹이 마음을 모을 수 있었을 것이라 추정해볼 수 있다. 물론 BTS는 전세계적 현상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한국에 반감을 가질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손쉽게 제3자가 한국을 자신들을 대변할 중재자적 집단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는 지금까지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이미지가 침략적이지 않으면서 경제적-문화적으로 높은 수준을 달성한 상태라는 것과 일치한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이는 근래 미국과 중국이 패권을 두고 대립하는 와중에 한국이 미국의 하수인 역할을 자처하며 미국 이외의 국가를 상대로 무식하게 호전적인 언어를 내놓기 시작하면 한국이 비주류 국가-그룹 사이에서 행사하던 문화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서, '선한 영향력'은 무식하고 호전적인 나라가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얼마 전 서울에서 있었던 비상 사태 문자 사고를 생각해보라. 지금 한국은 스스로 나서서 전쟁과 갈등과 반목과 증오로 점철된 고약한 이미지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만들어 전세계를 상대로 뿌리고 있다. 전쟁이 있는 곳에서 문화는 사망하게 된다. 모든 문제를 힘으로 찍어누르고자 하는 세계관을 지닌 현정부가 기존에 한국이 쌓아온 선한 이미지에 '똥칠'을 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한다. 국제 사회에서 지금 한국의 이미지가 망가져가고 있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 과연 누구인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국은 참고할 지점이 있는 나라다. 후하게 말하면, '위대한 나라'로서의 특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맹신해서는 안된다. 이 나라는 더 이상 20세기의 강력한 패권국 미국이 아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지금 세계 질서는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그저 미국 꽁무니나 좇는 사대주의 놀이를 했다가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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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Your Thing, Babe!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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