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메탈이 어떻게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아래 영상을 한번 볼 만하다. 메탈 음악은 일반적으로 마초적 남성의 반사회적 공격성을 음악이라 불리는 미학적 양식을 가지고 승화시킨 경우로 이해될 수 있다. 물론 메탈에 미학이라는 말을 쓰는 것에는 일리가 있는 동시에 어폐가 있다. 일반적으로 미학은 질서와 균형미를 빼놓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메탈은 기존의 미학적 균형을 깨버리는 데 훨씬 더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자기 나름의 원칙과 세계관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질서정연하기도 한 게 메탈이기도 하다. 메탈은 하나의 공식으로 장착된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메탈이 근래 장르로서 대중적 지지 기반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새롭게 정리해낸 미적 세계의 모습은 여전히 누구나가 쉽게 공감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음악가로서 대중적으로 성공하고 싶다면 하지 않는 게 나은 게 메탈인 게 사실이다. 록도 별로 다르지 않은 처지에 놓여있다. 즉 록과 메탈은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음악과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메탈은 대중 속으로 다시 파고들 수 있을 것인가? 그 한 답을 아래 영상에서 찾을 수 있다.
아래 영상에서 메탈은 대중 사이로 파고들기 위해 그 자신을 지우고 있다. 만화 주제곡을 사랑하는 가장 순진한 아이들의 친구와 같이 꾸미고 있다. 즉, 귀여운 인형탈을 쓰고 있다. 그리고 만화 주제곡에 반주를 넣어주고 있다. 옆에는 유치원 선생님 같은 분이 사회를 보고 있다. 그러나 메탈은 그 자신의 반사회적 본질을 숨기지 못한다는 것이 아래 영상의 요점이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중반을 지나면서부터 드럼 연주가 점차 이상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요의 세계를 조용히 보좌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먹어치워버리더니 메탈 세계로 전유해버린다. 동심은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지고 없다. 세상을 때려부수는 시커먼 타격감의 그림자만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메탈은 곡이 끝나고도 자신을 드러내지는 못한다. 메탈은 귀여운 인형탈을 벗을 수 없다. 그런 한에서 관중의 환호를 받는다. 이는 인형탈의 매개 속에서 메탈의 반사회성이 전혀 다른 맥락을 획득하게 된다는 뜻과 같다. 요점은 아래 영상 속에 그려진 메탈의 지위가 현실과 타협하기 위해 인형탈 알바를 하며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지만 내면에서만큼은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모습과 겹쳐진다는 데 있다. 여기서 메탈은 보통의 사람들은 공감하지 못하는 특이한 인물들이나 하는 비주류 음악 장르의 하나로 여겨지지 않는다. 메탈은 보통의 사람들이 마음 속에 품은 채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에 대한 은유가 된다. 보통 사람이 진정한 영웅이라는 장르물에 관한 은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은유가 될 때 메탈은 동시대성을 얻게 된다.
아래 영상 속 드러머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맥시멈 더 호르몬이라는 밴드의 드러머인 쿠마모토 나오라는 설이 있다. 근거는 없다. 개인적으로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그러나 실제 인물이 누가 되었든 아래 영상 속 '냥고스타'라 불리는 인형탈 드러머보다 더 인기가 있지는 않을 것임은 확실하다. 맥시멈 더 호르몬의 드러머라고 가정해보자. 해당 밴드의 일본 내 지지도는 어느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시대를 대표하는 밴드와 같은 지위를 누리는 것은 전혀 아니다. 여기서 이들의 음악이 메탈과 펑크 등의 공격성을 최대한으로 유지하면서도 다른 여러 팝 장르 또한 뒤섞어 잡탕의 음악을 들려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동시대에 메탈만으로는 대중의 마음을 사기가 어렵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메탈은 사회 내에서 순수하게 구현될 수 없다. 메탈은 숨겨진 본질로서밖에는 유지될 수 없다. 메탈이 세상 앞에 나서려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팝적 요소를 잡탕으로라도 섞어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형탈을 걸치는 편이 더 나은 방법일 수 있다. 인형탈과 함께 메탈은 감추어진 것, 직접 드러날 수 없는 것에 대한 은유가 된다. 즉, 청중은 '냥고스타'가 실제로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한에서 그 혹은 그녀에게 공감하여 환호를 보낸다. 혹은, 맥락을 조금 달리해서 말해보자면, '냥고스타'는 '양복을 입은 메탈' 혹은 '양복을 입고 대기업에 입사하여 얌전히 자신을 다스리고자 하는 메탈'과 같다.
사실 아래 영상은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행사 자리가 아니다. 저 드러머는 행사 알바로 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잘 살펴보면 처음부터 드러머를 위해 기획된 행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튜브에서 검색을 해보면 냥고스타가 나오는 영상은 전부 같은 설정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밴드 구성원 없이 드러머 혼자 인형탈을 걸친 채 녹음된 음악에 맞추어 드럼을 연주한다. 영상은 대부분 관객이 '드러머 직캠'으로 촬영한 것이다. ('직캠'은 영상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 이미 청중들 사이에 많이 알려진 유명인이며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만약 유치원 학예회 행사와 같은 것이었다면 '드러머 직캠'은, 예컨대, 드러머의 학무보가 '아이고 예쁜 우리 새끼'라는 관점에서 찍어올린 게 아니고서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냥고스타 직캠'은 그러한 성질의 영상이 아니다.) 동료 밴드 구성원이 등장할 경우에는 동료들도 동일하게 인형탈을 쓰고 있다. 다시 말해 모든 게 설정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메탈은 음악 장르를 칭하는 이름에서 '캐릭터'의 이름으로 다시 자리매김된다. 요점은 '캐릭터'는 '이야기'를 배경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는 행사 알바를 하지 않고서는 메탈이라는 음악의 '본질'을 지켜갈 수 없게 된 메탈의 처지에 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한국식으로 말해보자. 오늘날 메탈이 대중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는 펭수가 되어야한다. 메탈은 어린이들의 친구, 혹은 만인의 친구 펭수가 된 후에야 그 자신의 본질을 지킬 수 있다. 오늘날에는 사실 모든 것이 그렇다. 박사학위를 예로 들어보자.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하는 데 있어 공식적으로 대학원에 소속되어 박사학위를 받는 과정을 밟는 것 자체는 필요하지 않다. (이공계에서 돈이 많이 드는 실험을 해야하는 경우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대학의 연구실에 소속되지 않으면 비용이 많이 드는 물질을 다루는 연구 행위 자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다른 사람의 연구 결과를 공부하겠다고 한다면 구태여 박사학위 과정을 밟을 필요는 없다. 박문호 선생의 경우를 보라. 그는 독학의 제왕과 같다.) 그런 것 없어도 각자 알아서 얼마든 공부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박사학위의 지위는 펭수의 지위와 같다. 사회적으로 대중들이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제작된 인형탈과 같은 것이 박사학위다. 쉽게 말하면 박사학위는 교수라는 직함을 얻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인형탈과 같다. 공부 자체를 하는 데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물론 문제는 교수직이라도 있어야 생계 문제를 해결하여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메탈 또한 마찬가지다. 메탈을 하는 데 인형탈은 본질적이지 않다. 그러나 안정되게 메탈을 계속하고 싶다면 인형탈을 쓰는 게 필요하다. '메탈 키즈들이여, 메탈이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펭수가 되어라.' 21세기에 메탈은 어린이들의 친구 펭수의 음악이 되어야한다.*
* 이 말을 20세기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20세기였다면 펭수는 말 그대로 아이들의 친구였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세상의 특징 중 하나는 어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즉, 21세기는 '키덜트' 혹은 '어른이'들의 세기다. 펭수에 열광하는 것은 바로 이 '어른이'들이지 말 그대로의 어린이들이 아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21세기에 메탈은 어른이들의 친구 펭수의 음악이 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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