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철학을 기반으로 공부하지만 동시에 난 과학과 수학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기도 하다. 과학과 수학을 고려에 넣게 되면서 알게 된 사실의 하나는 문학 비평가들의 철학 이해가 20세기적이라는 것이다. 문학 비평가들 사이에서 대부분의 경우 철학은 하이데거 이후 미학적 존재론으로 옮겨갔을 때의 철학이 기준이다. 이는 문학 비평가들 사이에서 니체 이전 철학은 거대 담론과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나쁜놈 철학' 정도로 퉁치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다. 문학 비평가 중에도 니체 이전, 예컨대, 칸트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있다. 그러나 그의 미학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다. 칸트의 철학 체계 일반이 수학 및 과학 전통과 어떠한 관계 속에서 나오게 된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여기서 문학비평은 순수한 미학의 문제이거나 혹은 역사의 지평 속에서 드러나는 미학적 존재의 문제로 국한되게 된다.
역사와 미학의 영역에 갇히게 된 인문 영역으로부터 잘려져나온 것은 수학적 존재론의 세계다. 20세기식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결별이 이렇게 이루어진다. 문제는 둘의 발전 방향이 정반대였다는 것이다. 20세기를 거치며 인문학이 수학적 존재론을 폐기하자 그 전통을 이어받은 것은 수학과 물리학 영역이다. 이들은 지금 학문으로서 존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인문학은 그렇지 못하다. 학문이 아니라 교양으로 여겨지는 면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예컨대, 과연 문사철 학과는 어느 정도나 대학원에 진학할 학문 후속 세대 양성을 위해 학부 교육을 하고 있는가? 학부 졸업 후 취업할 학생들을 대상으로 대학원에서 공부할 역량을 키워주기 위한 관점에서 전문적 학과 교육을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요점에서 벗어나는 일이 되고 말지 않는가? 그랬을 때 나오게 되는 것이 '교양 교육으로서의 문사철'일 것이다. 솔직히 학생들의 대학원 진학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즉 특정 연구 분야에서 논의되는 전문 담론의 언어를 가르치지 않을 것이라면, 학부 수준에서, 예컨대, 박사학위를 받은 문학 연구자라면 자기가 박사학위를 받을 때 공부한 분야가 아니더라도 어떤 작품이든 읽고 교양의 관점에서 가르칠 역량을 충분히 지니고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대학원 교육에 대한 전망이 없다면, 예컨대 문학 학과가 지금 유지하고 있는 커리큘럼이 전제하는 '전문성'--예컨대,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가진 박사학위 소지자가 가르칠 것'이라는 전제--이 실은 무의미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학문 후속 세대 양성을 염두에 두지 않게 될 때 해당 학문은 학문으로서의 정당성을 잃게 되다는 말과 같다. 교양은 전문적 학문 지식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교양은 알면 좋으나 몰라도 그만인 것에 속한다. 예컨대, 우리 주위에는 교양 따위 없어도 탐욕스럽게 물질적 부만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늘 넘치지 않던가? 그렇다면 대체 인문학은 어쩌다 학문적 전문성이 요구되지 않는 교양의 지위로 떨어지게 된 것일까?
난 여기서 인문학이 자기 자신과 수학 및 자연과학 사이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게 된 결과가 교양이라고 말하고 싶다. 관련해서 20세기에 인문학 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발생하게 되는 과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수학적 존재론이 미학적 존재론으로 대체되면 첫째로 남겨지는 것은 해석학이다. 하이데거 이후 등장한 가다머 같은 사람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해석학은 수학적 전통과는 관계를 끊은 철학이지만 주류 철학계 내부에서 진지하게 학문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다른 한편 해석학에서 더 나아가게 되면 해체론이란 것이 나오게 된다. 문제는 해체론부터는 기성 철학계 내부에서 의혹의 눈초리가 본격적으로 나오게 된다는 데 있다. 데리다를 예로 들면 그는 미국 문학계에서 환영받지 않았더라면 유럽 기성 학계에서 근본 없는 철학자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데리다의 기획 자체에 대해선 판단을 유보하고 싶다. 다만 난 그의 '절친' 폴 드만의 '해체론적' 작업이 헛소리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드만은 문학비평가였지만 철학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몇 안되는 문학비평가였고, 그의 작업은 늘 적어도 사건이라는 개념을 중심에 두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수학 및 과학 전통을 알고 있기도 했다. 학부 때 그는 과학과 공학을 전공하기도 했다. 사실 그는 학부 때까지 공식적으로 문학 수업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해체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게 나오게 된다. 문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사이비 과학'에 다름 아니라는 데 있다. 수학적 존재론이 완전히 사라진 세계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보편적 진리의 틀 자체를 완전히 폐기하기 때문에 '포스트모던 말장난'이라는 오명에서 자유롭지 않다. 20세기에는 이를 '해방적'이라고 느낄 맥락이 없지 않았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내 멋대로 사는 게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구석이 있는 게 삶이지 않던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자신의 멀쩡한 팔을 자른다고 한들 말릴 방도는 없는 것이다. 언젠가 진화의 끝에 팔이 세 개 달린 인류가 출현해 우세종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팔이 다섯개 달린 인류가 새로운 종으로 출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특성을 지닌 포스트모더니즘이 대학에서 '학문'으로서 대접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삶은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문의 대상으로 다루어질 경우 대학에서 생명은 대부분 의학과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 다루어질 뿐이다. 여기서 차이는 포스트모던 인문학의 경우 삶을 물질의 문제로 다루지 않는다는 데 있다.
21세기에 인문학이 과학에 패권을 내주게 된 배경에는 20세기를 거치며 인문학이 수학적 존재론을 폐기처분해가는 행위가 있다. 사실 20세기식 인문학의 기준에서 보면 과학은, 특히 물리학과 수학은, 바로 그 '거대 담론'과 '진리'를 추구하는 '나쁜놈'의 학문이다. 물론, 과학자들에게 물어보면 자신은 진리에 대해 알지 못한다라고 소박하게 답할 것이다: '과학은 늘 반증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과학적 방법론에 따라 증명된 사실에 대해 한정적으로 이야기할 뿐이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무지의 지'가 바로 소크라테스가 취했던 철학의 기본이지 않았던가? 오늘날 인문학은 이 정도의 진리 주장도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20세기 동안 인문학은 진리 주장을 하지 않는 것이 해방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진리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인문학은 대학에서 쫓겨나게 생긴 반면, 그 빈자리를 틈타 '나쁜놈 과학자들'이 인문학자 역할 마저 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아야한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인문학은 과학의 폭정으로부터 해방되었던 게 아니라 굳건하게 계속되어온 과학의 세계로부터 추방당했을 뿐인 것은 아닌가? 근래 사람들이 인문학에 관심을 기울일 때 그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자기멋대로 삶을 사는 법을 익히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물론 그런 맥락도 있다고 보며 그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보다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잘 정리된 지식을 갈구하는 경향이 더 크다. 물론 전문가들이 정리해준 지식을 그저 소비하는 행위는 철학적이라 할 수 없다. 철학은 '솔루션'이 아니라 '문제' 혹은 '질문' 자체를 탐구하는 일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식으로 정리된 지식이라는 형식 자체가 버려지게 되면 대중 사이에서 의사소통 가능한 학문으로서 작동하지 못하게 된다. 예컨대, 20여 년 전 포스트모더니즘이 한창 유행할 때 '학문'이 아니라 '놀이'를 강조하는 인문학자들이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좋은 이야기다. 그러나 문제는 '놀이'를 구태여 대학에서 할 필요는 없다는 데 있다. '놀이'는 백화점 문화센터에서도 할 수 있다.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그곳이 더 잘 어울린다. 이쯤되면 인문학이 엄밀한 의미의 학문인지 그저 유희와 놀이를 위한 교양인지부터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인류의 미래를 좌지우지하는 것들은 대부분 자연과학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과학이 우리 삶에 위협적으로 던지고 있는 문제를 인문학이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수학적 존재론의 전통을 복구시킬 필요가 있다. 개별 과학자들의 문제는 그저 연구실에서 늘 하는 연구만 할 뿐 자신의 연구가 사회에 미칠 결과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과학기술이 퍼트리는 유행어에 굴종적이 된 정부관료들과 대학관료들, 그리고 자본가들은 과학의 이름을 빌려 세상을 엉뚱한 곳으로 끌고 나가고 있다. 다른 한편 인문학자들은 과학기술에 대한 고려 없이 미학이나 역사에 대해 논하다 과학이 초래한 변화에 놀라, 예컨대, '디지털 인문학'이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의 인문적 비과학성을 숨기려 할 뿐이다. 이는 둘이 다시 만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과학과 인문학이 서로 동시에 고려될 필요가 있는 것은 둘이 하나로 융합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거꾸로 이는 서로가 서로의 한계를 직시하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그렇게 해서 서로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전히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물론 거꾸로 말할 필요도 있다. 예컨대, 과학자라면 인문학을 인문적 관점에서 내재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과학자들도 하이데거, 아도르노, 마르크스, 헤겔, 칸트,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뉴턴과 보일의 철학적 저작, 데카르트, 베이컨 등을 오늘날의 과학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당대의 철학적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과학에 대해 무슨 말을 했는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말이다. 사실 단순히 자신이 지닌 분과 과학 지식에 기반하여 동시대 문화적 현상을 해설하는 것 정도를 가지고 인문학을 한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난 인문적 담론을 편다고 여겨지는 과학자들이 철학사적 관점에서 철학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게 내 인생 철학'이야 할 때의 은유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전문적 학문 영역에서 사용되는 철학의 언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반대로 인문학자라면 철학사를 과학사적 관점 및 수학적 존재론의 관점을 통해 다시 공부할 필요가 있다. 과학적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대부분의 20세기 철학자들은 '과알못'에 가깝지 않은가? 예컨대, 하이데거를 생각해보자. 그는 테크놀로지에 대해 중요한 글을 남겼다. 그의 '틀만들기'(Gestell)라는 개념을 생각해보자. 그의 요점은 과학기술은 자연을 개념적 틀 속에 가두어 자원으로 다룰 뿐이라는 것이다. 좋은 이야기다. 그러나 이 정도 이야기로 과학기술의 지배를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나이브한 생각이지 않은가? 그보다는 훨씬 더 과학 내부로 들어가서 내재적으로 이야기해야 하지 않은가? 과연 하이데거는 과학을 내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가? 적어도 내가 보기에 답은 '아니다'다.
비슷한 맥락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생각해보자. 예컨대, 이들이 라이프니츠의 보편 수학 (mathesis universalis) 개념을 이야기하는 부분 등을 보면 '보편'이란 말 앞에서 과도하게 경계심을 표한 나머지 애당초 수학적 및 과학적 사유 전통 내부로 들어가지조차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솔직히 이들이 과학을 대하는 태도에는 21세기의 맥락에서 보기에 어딘지 구시대적인 느낌마저 없지 않다. 여기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과학기술에 대한 두루뭉술한 철학적 비판이 20세기 중반 서양에서 유행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맥락이 있다. 2차 대전을 겪으며 원자폭탄이란 것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이 전인류를 멸망에 빠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현실화된 시기가 20세기 중반이다. (원자폭탄이나 수소폭탄이 지식인 사회에 얼마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는지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귄터 안더스를 참고해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철학자들이 그러한 비판 이후 과학을 직접 공부함으로써 문제를 직시하려 하기보다 그 모든 과학기술을 잊은 채 홀로 인문의 바다로 잠수해들어갔다는 데 있다.
근래 인문학 내에는 과학기술 연구(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라는 분야가 있다. 인문학과 과학 기술 사이의 관계를 사유하기 위한 학제간 학문이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과학기술은 비판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 철학 전통에 대한 대안으로서 생성의 철학을 구현하는 영역으로서 그저 긍정적으로만 다루어지는 면이 크다. 브루노 라투르의 과학 이해가 대표적이다. 문제는 이 경우 과학기술이 자연스러운, 변화하는 흐름의 문제로서만 이해된다는 데 있다. 즉 과학기술은 인간에 의한 자연의 착취가 이루어지는 영역이 아니라 인간 행위자 및 비인간 자연 행위자가 서로 얽혀지며 생산되는 수평적 네트워크다. 그러나 과연 과학기술이 그렇게 평등한 네트워크적 이야기로 행복하게 끝나기만 하는가? 그렇다면 어째서 인문학은, 예컨대, '디지털 인문학' 앞에서 위축되는 것인가? '디지털 인문학' 앞에 선 '인문학'은 과학기술의 지배 앞에서 주눅든 자연과 같지 않은가? 예컨대, 인문학 분야 교수를 뽑을 때 '디지털 인문학 가능자 우대' 혹은 '자연어 처리 가능자 우대' 혹은 '코딩 가능자 우대'라는 조건은 걸려도, 어째서 과학 분야 교수를 채용하고자 하는 공고에서 '인문학 가능자 우대' 혹은 '소설 분석 가능자 우대' 혹은 '장애연구 가능자 우대' 혹은 '퀴어연구 가능자 우대,' 혹은 '형식주의 분석 가능자 우대' 혹은 '구조주의 분석 가능자 우대'라는 문구를 볼 수는 없는 것인가? 이는 과학이 여러 가능한 학문들 중 하나가 아니라 다른 모든 학문의 기준, 즉 학문의 학문이라는 뜻이지 않은가? 즉, 그 모든 내재성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과학은 다른 모든 학문을 집어삼키는 메타담론적 혹은 형이상학적 계기를 발전시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과학에 대한 라투르식 내재적 접근에서 빠진 것은 하이데거 및 아도르노식 과학의 초월성에 대한 비판이다.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에 대한 라투르식 및 하이데거식 두 가지 접근법을 동시에 사유하는 것이지 싶다.
--
After Hours (202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