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으로 아래 보이지니어스의 "20 달러"라는 곡의 뮤직비디오는 스매싱 펌킨스의 "1979" 뮤직비디오와 동일선상에 놓여 있다. 차이는 1995년까지만 해도 10대의 남자아이들이 하던 것을 아래 비디오에서는 10대 여자아이들이 하고 있다는 데 있다. 뮤직비디오의 초입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른바 선머슴 같은 외모 및 움직임을 보라. 언뜻 보면 그냥 남자 아이 같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다. 여자 아이들 셋이 모여 차의 보닛을 열고 정비하는 모습은 또 어떠한가? 이른바 '여성스러움'이라고는 없는 모습이다. 전통적 젠더의 관점에서 '정상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뮤직비디오는 활기에 차있다. '스피릿'이 느껴지는 곡이다. 20대 중후반의 여성 신체를 지닌 3명으로 이루어진 보이지니어스는 사실 최근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록 밴드의 하나다. 올초 나온 롤링스톤지는 이들을 미국 인디 록계의 '슈퍼그룹'이라고 소개한다. 이는 2020년대에 록음악을 주도하는 것이 여성의 신체라는 사실과 일치한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남성이 하는 록은 근본에 있어 화제거리가 아니다. 어딘지 낡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한국에서도 그러하고, 미국에서도 그러하다. 한국에 새소년이 있다면, 미국에는 소년천재(boygenius)가 있다고나 할까. 물론 여기서 말하는 록은 더 이상 스테디움 록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대한 야외 공연장에서, 예컨대, 10만의 청중을 지휘하는 록의 시대는 끝났다. 그러한 문화는 기본적으로 남성적 영웅 서사의 일종에 속한다. 근육질 남성들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소년의 모습을 한 여성의 신체다.*
남성적 문화 속에서 '소년'은 경멸적 의미를 지닌다. '남자'가 되지 못한 애송이를 뜻하는 말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화 [듄]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영화의 시작부에서 아트레이터스가의 가부장 레토와 그의 아들 폴은 대조를 이룬다. 레토는 수염으로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고 풍채가 좋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근육질이다. 그는 믿음직한 남성의 권위를 상징한다. 그에 비해 그의 아들 폴은 가냘픈 몸을 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여성성을 지우지 못한 상태다. 아트레이터스가의 가장 출충한 장수인 던컨과 재회했을 때 던컨이 폴에게 보이는 태도에서 폴의 여성성은 도드라진다. 폴은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하며 아라키스에 가면 던컨에게 나쁜 일이 닥칠 것 같다며 자신도 같이 가면 안되겠느냐고 묻는다. 던컨은 폴의 이야기를 아직 남자가 되지 못한 겁많은 소년의 근거 없는 이야기로 치부한다. 걱정 말라고 말하며 폴의 팔을 잡는다. 순간 '근육이 좀 붙었나?'라고 말한다. 폴은 '그런 거 같아?'라고 되묻는다. 이때 던컨은 딱 잘라서 '아니'라고 말한다. 던컨이 폴을 어떻게 보는지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던컨이 보기에 폴은 '소년'에 불과하다. 근육 하나 없는 햇병아리 애송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그는 폴을 '마이 보이'(my boy)라고 부른다. 물론 둘의 관계는 신뢰로 맺어져있다. 던컨은 폴이 레토의 후계자가 되도록, 즉 '남자'가 되도록 돕는 자다. '소년'은 '남자'라는 텔로스 속에서 비추어진다.
영화가 중반에 이를 때쯤 레토는 살해당한다. 이는 영화의 초점이 처음부터 폴에게 맞추어져있었다는 뜻이다. 이제 폴이 후계자다. 그는 '남자'가 되어야만 한다.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위기에 빠진 가문을 구해야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폴은 근본에 있어 양성적 인물로 그려진다. 그와 어머니와의 관계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의 어머니는 베네 게서리트라는 조직 출신이다. 해당 조직의 구성원은 독특한 정신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그들은 '목소리'라 불리는 능력을 이용해 사람을 부린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은 오직 딸들에게서만 전수되도록 정해져있다. '목소리'가 그 어떤 물리적 폭력성도 사용하지 않은 채 타인을 조종하는 능력이라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남성은 물리적 힘으로 사람을 억누른다. 그러나 여성은 그 어떤 폭력도 없이 매혹만으로 사람을 부린다. 동시에 '목소리'는 대단히 권위주의적 능력이기도 하다. 명령의 언어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귀족적 여성이 부리는 권위가 '목소리'가 뜻하는 바다. 흥미로운 점은 폴의 어머니 제시카가 딸들의 능력으로 규정된 것을 아들인 폴에게 전수한다는 데 있다. 폴이 꿈을 꾸는 자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는 시적 비전을 지닌 자다. 그는 남성이 흔히 사용하는 물리력에 기반한 사람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미래를 보는 능력은 사물의 이면을 본다는 점에서 물리력이 아니라 사물의 비물리성을 보는 능력과 같다. 아직 물리화되지 않은 미래는 비물리적이다. 쉽게 말해서 폴은 예술적-종교적 지도자에 가깝다. 그는 군인형 혹은 장군형 지도자가 아니다.
원작 소설에서 폴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2021년작 영화 [듄]은 폴을 단순한 남자로 그리지 않는다. 후속작이 계획되어 있는만큼 그는 분명 어떤 식으로든 '성장'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될 '구원자'가 단순히 남성 영웅 서사시의 질서를 복구하는 것을 의미할지는 다소 의문이다. 근래 보이지니어스가 가리키는 감수성을 참고한다면 미국에서 분명한 젠더 역할은 문화적으로 주도권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성의 수트를 입고 롤링스톤지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 근래 보이지니어스가 누리는 위상이다. 롤링스톤지의 표지는 1990년대에 히스테릭한 여성적 남성인 커트 코베인이 대표했던 자리다. 1990년대에 얼트록은, 기존의 클래식록과 달리, 남성이 될 수 없는 남성들이 내놓는 록으로 시대의 정서를 대변했었다. 2020년대에 록은 남성에 가까워진 여성의 신체를 내세움으로써 시대의 정서를 대변하고자 하고 있다. 1990년대에 소년은 남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2020년대에 우리가 보는 것은 여자가 될 수 없는 여성이 대신 소년이 되어가는 모습이다. 남자와 여자라는 이분적 항이 중간 지점에서 만나고 있다. 2020년대는 성숙의 시대가 아니다. 사실 기존 의 패권국 미국은 더 이상 도덕적 성숙에 기반한 권위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위기에 몰리자 체면이고 뭐고 패권 유지에 위협이 되는 국가를 어떻게든 힘으로 찍어 누르려고 할 뿐이다. 도덕적 영향력을 지닌 가부장이 사라지는 시대에 젠더 규범의 자발적 내면화는 달성될 수 없다. 아버지가 사라지는 시대에 등장하는 것은 소년들이다.
2020년대에 소년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제3의 성을 의미한다. 더 이상 소년은 남자가 되지 못한 애송이, 즉 미완성의 남성을 뜻하지 않는다. 한국의 남성 아이돌을 생각해보자. 사실 그들에게 있어 참신함은 음악에 있지 않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중성적 외모가 그들의 음악보다 참신하다. 한국적 맥락에서 볼 때는 딱히 '퀴어 문화'의 산물이라 보기 어렵다. 그러나 서양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는 달리 현상한다. 그들에게 한국의 아이돌 음악은 젠더 규범의 지배가 깨진 영역과 같다. 케이팝이 한국을 벗어나 세계적 트렌드의 중심에 서게 된 바탕에는 젠더규범에 도전하는 듯이 보이는 케이팝의 면모가 분명 있다. 기존 남성적 문화 속에서 소년은 여드름 가득한 얼굴에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이 덧붙여진 모습이었다. 소년은 늘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채 멍청하게 양아치들에게 '삥'이나 뜯기는 모습이었다. 이른바 '루저' 혹은 '너드'의 이미지가 이로부터 나오게 된다. 반면 2020년대에 소년은 그 자체로 미소년의 동의어와 같이 작동한다. 소년은 남성 및 여성의 신체가 만나는 지점이다. 남성과 여성이 합쳐지는 곳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가 미소년이다. 케이팝과 2020년대 록은 미소년의 이미지를 공유한다. 그러나 차이 또한 있다. 근래 인디록에서는 미소년이 다듬어져있지 않다는 게 핵심적이다. 록 음악 속에서 소년은 얌전하지 않다. 망아지 같이 날뛴다. 그게 아래 보이지니어스의 아래 뮤직비디오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지 않은가?
보이지니어스라는 이름이 유래한 맥락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들에 따르면 밴드 이름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여느 사회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으로 미국 사회에서 남자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자신감을 가지도록 부모로부터 늘 격려의 말을 듣는다. 이러한 맥락을 포착하고자 만들어낸 말이 '소년 천재'라는 말이다. '넌 천재야, 넌 뭐든 할 수 있어'라는 식의 어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여성의 신체를 지닌 보이지니어스의 멤버들은 그러한 말에서 예외였다. 곡 작업을 할 때 '이게 과연 좋은 아이디어일까' 하고 의심에 빠질 때 그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한 말이 '소년 천재가 되도록 해봐'라는 말이다. 보다 친숙한 말로 'Boys, be ambitious'라는 상투어를 생각해볼 수 있다. '소년이여 야심을 가져라'는 말 말이다. 이 문구의 또 다른 판본은 1995년작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주제곡 "잔혹한 천사의 테제"의 가사 속에 등장한다: "소년이여 신화가 되어라." 신지는 남자가 될 수 없는 소년이다. 그러나 주제곡 속에서 그는 여전히 신화가 될 것을 요구받는다. 주제곡이 그가 처한 딜레마를 보여준다고나 할까. 이게 1990년대의 분위기였다. 그는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난 천재가 아닌 걸, 신화니 야심이니 제발 그런 말 하지마'라고 생각하는 인물에 가깝다. 이카리 신지는 새로운 소년이 아니다. 그는 오래된 소년, 낡은 소년, 혹은 헌소년이다. 반면 보이지니어스의 경우는 자신에게 누가 좀 '소년이여 신화가 되어라'는 말을 해주길 바란 경우에 더 가깝다. 요점은 보이지니어스 멤버들의 경우 다른 사람들이 말해주지 않기에 스스로 야심찬 새소년이 되기로 결심한다는 데 있다. 그렇게 그들은,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소년처럼 차려입고 행동한다. 보이지니어스라면 신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답답하긴, 내가 대신 신화가 되고 말테니 잘 봐둬.'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내가 보여줄 테니 잘 봐둬'라는 태도를 보여주는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인물의 대표격이 아스카다. 그는 늘 신지를 '이런 찌질한 새끼'라는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이는 아스카가 새로운 소년이라는 뜻이 아니다. 사실 아스카는 대단히 여성적인 인물이다. 언행이 이른바 '여성스럽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카지라는 남자의 사랑을 받는 완벽한 여성이 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여기서 아스카가 실은 트라우마를 지닌 인물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트라우마를 잊으려는 몸부림이 곧 그로 하여금 완벽한 야심적 여자가 되도록 만드는 원동력이다. 요점은 그로 인해 아스카가 처참한 심리적 곤경에 처하게 된다는 데 있다. 이는 아스카가 겉으로 무척 나대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젠더화된 인물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서 1990년대까지 젠더와 갈등하는 인물들은 많은 경우 심리적이었다. 예컨대, 도망갈 곳 없이 감금 당한 느낌을 받는 밀실의 공포는 대부분 남성적 사회 규범을 억지로 받아들지 않으면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압박감과 함께 찾아온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그려낸 쓸데없을 정도로 과도한 심리묘사가 이러한 조건으로부터 기인한다고 말해볼 수 있다. 그러나 2020년대에 오면 인물이 지닌 심리적 깊이는 평탄화된다. 심리적이기보다는 훨씬 더 신체적이 된다. 여성의 소년화는 젠더화의 압박 아래에서 발생했던 심리적 트라우마가 양성적 신체가 지닌 역량에 밀리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만하다.** 찌질하게 짜고 있느니 저지르고 보겠다는 태도를 생각해보라. '저스트 두잇'이라는 구호로 유명한 나이키가 젠더 규범을 넘어서는 데 아주 적극적인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은가? '소년들이여, 질질 짜고 있을 시간에 이 멋진 트레이닝복과 이 힙한 스니커즈를 신고 일단 운동을 저지르고 보는 게 더 좋지 않겠니?'라는 메세지는 젠더가 파놓은 심리적 골짜기가 신체라는 물리성으로 메워질 때 구현되는 법이지 않은가? 아래 보이지니어스의 뮤직비디오를 상기해보라. 곡이 끝날 때쯤 되면 아이들은 그저 들판을 달리느라 바쁘다. 나이키 제품만 착용하면 나이키 광고 주인공이 될 모든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새로운 소년'이라면 아무렴 '저스트 두잇'인 셈이다.
* 남성적 스테디움 록의 시대는 1999년 미국 뉴욕주에서 열린 '우드스톡 1999'와 함께 정점에 오르는 동시에 끝나게 된다고 말해볼 수 있다. 4일 동안 22만 명이 모였던, 당대의 가장 잘 나간다는 록-메탈 밴드들이 총동원된 페스티벌이었다. 그러나 그 끝은 전혀 평화롭지 않았다. 주최측이 22만명을 수용할 기반시설을 충분히 갖추지 않았던 관계로 공연장에서는 오물이 넘쳤다. 날씨는 38도에 이를 정도로 더웠다. 그러나 식수는 공급되지 않았다. 관중들은 갈증 해소를 위해 맥주를 사서 마실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내몰렸다. 시간이 지나며 성이 난 그리고 술에 취한 관중들은 시설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한 여름 밤 유명 록밴드의 공연이 이루어질 때 관중들 사이에서는 공연 시설이 불에 타고 있었다. 관객 사이에서 강간이 있었다는 말도 끊이질 않았다. 1990년대 대중음악계를 지배했던 록-메탈은 '우드스톡 1999'와 함께 최악의 일탈 행위를 선보인 셈이다. 그렇게 남성적 록-메탈은 그 자신의 전성기를 끝내게 된다. ***
** 여성의 소년화는 영화의 영역에서도 발견된다. 2019년작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의 그레이스를 생각해볼 수 있다. 여성의 신체를 지니고 있지만 그는 기술의 도움을 받아 터미네이터의 능력을 지닌 사이보그로 전환된다. 그는 기본적으로 살인병기다. 그러나 동시에 중성적 신체 및 중성적 외모 혹은 미소년의 외모를 한 것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요점은 터미네이터로서 그의 역할이 다니라는 여성을 지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즉, 오늘날 여자를 지키는 역할은 더 이상 남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근래 미국 문화의 트렌드 중 하나는 여자가 여자를 지킨다는 탈젠더적 설정을 활용하는 데 있다. '보이지니어스'는 록음악계만의 현상이 아니다.
*** 여기서 미국 대중문화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미국인들은 '대중'으로 모이게 될 경우 폭력 없이 끝나지 않는 모습을 선보인다. 미국인들은 기본적으로 개인적 욕망을 추구하는 데 최우선의 목표를 둔다. 그런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누구 하나는 죽어야한다. 개인의 욕망은 많은 경우 서로 양립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미국인들은 이를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매번 반복되는 패턴이기 때문이다. 매해 총기 사고만으로 수 만명이 죽는 나라라서 그런지 감수성이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총기를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일에 비하면 부수고 불태우는 정도의 행위는 '야만'이 아니라 '문화적' 행위라 여겨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부분에 대한 이해 없이 미국인에 대해 안다고 말해선 안된다. 물론 미국인이라고 해도 대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다르다. 이들은 대부분 교양 있는 사람들이다.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얼굴을 바라보며 문을 잡아주는 것 정도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대학에서 만나는 미국인이기도 하다. 미국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문화적 및 지적으로 세련된 사람들은 거의 대학을 중심으로 위치해있다. 그러나 대학가 외부에서 만나게 되는 일반 대중의 정서는 다소 다를 수 있다. 코로나 시기 미국 젊은이들이 보인 행태를 잊어선 안된다. 코로나가 두렵지 않다며 코로나 걸린 사람의 타액이 묻은 물건을 적극적으로 핥는 등의 기행을 내보였던 미국의 젊은이들 말이다. 물론 그리고는 많이들 죽었다. 죽을 때는 놀랍게도 후회하는 기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이클 무어의 "멍청한 백인"이라는 표현은 아마도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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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cord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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