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1

AI와 음악: 신성 갤러거와 인간 갤러거

by spiral 2023. 5. 31.

근래 AI가 어떤 식으로 음악계에 침투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아래 AISIS란 밴드의 음악을 들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1990년대 오아시스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곧바로 리엄 갤러거가 밴드의 보컬이라고 여길 것이다. 음악 스타일도 오아시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아래 밴드는 리엄 갤러거나 오아시스와 아무 관계도 없다. 곡과 연주는 브리저(Breezer)라는 밴드의 것이고, 보컬은 AI를 통해 리엄 갤러거의 목소리로 변환한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기존 오아이스의 팬이라면 아래 앨범에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정서적으로 그저 1990년대 오아시스의 미공개 앨범이라고 여길 가능성이 크다. 사실이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아시스 뿐만이 아니다. 70대의 폴 메카트니가 부른 곡을 AI로 전성기 시절 20대 메카트니의 목소리로 바꾼 작업물이 청자들 사이에서 더 나은 호응을 얻고 있다. AI 커트 코베인이 부른 사운드가든(Soundgarden)의 "Black Hole Sun"이 나오기도 했다. 죽은 코베인이 되살아난 느낌이다. 

최근 AI는 음악 산업계의 질서를 교란하고 있다. 이미 20세기에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작가'라는 개념이 끝난 바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제 AI와 함께 '작가'는 누구나가 재생산 및 재활용하여 이용할 수 있는 상업 스타일의 문제가 되고 있다. 앞으로는 '아티스트'라는 개념 자체가 새로운 세대는 이해할 수 없는 고고학적 유물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새로운 세대는 '오아시스'를 아티스트명이 아니라 장르명 혹은 스타일명으로 여기게 될 수 있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오아시스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가는 동시대적 존재가 되는 셈이기도 하다. 캡콤이 제작한 [스트리트 파이터](Street Figher)라는 게임을 생각해보라. 1987년 처음 나온 해당 전자오락 속 인물들은 시리즈가 거듭되며 지금까지 늙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영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실상의 영생을 누리는 신화적 인물들이 되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이제는 과거의 음악가들이 전자오락 속 인물과 같이 영생을 살며 새로운 음반을 계속 발매하며 살아가는 식이 될 것이라고 말해볼 수 있다. 즉, 앞으로 '오아시스'는 프랜차이즈 전자오락의 제목과 같이 될 수 있다.* 

AI 오아시스가 암시하는 바에 대해 좀더 생각해보자. 앞으로는 어떤 개발자가 더 나은 '오아시스 장르물'을 만들어내느냐를 두고 경쟁을 하는 구도가 벌어질 수 있다. 예컨대, 50%의 수익이 목소리 제공자에게 보장된다면 얼마든 보컬 라이센스를 원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여러 팀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라이센스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 개발자들이 '오아시스'라는 이름으로 음반을 내는 상황을 생각해보라. 물론, 그러다보면 자칫 저질 오아시스들이 난립하게 될 수도 있다. 예컨대, 이른바 다원주의라는 이름 하에 천 개의 '개똥 오아시스들'을 난립하게 만들 것이냐 아니면 일원론 하에 하나의 책임 있는 '오리지널 오아시스'만을 둘 것이냐는 질문이 던져질 수 있다. 이에 뒤따르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대체 뭐하러 애당초 '개똥 오아시스들'에 집착해야한단 말인가? 그냥 새로운 밴드가 자기 이름으로 내놓는 새로운 음악을 들으면 될 일이지 않은가?' 그러나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이른바 생태계라는 것이 미메시스를 통해 작동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해보라, 2000년대 초반 뮤즈(Muse)나 콜드플레이(Coldplay)가 등장했을 때 그들은 라디오헤드'들'로 여겨지지 않았던가? 라디오헤드와의 유사성을 통해 대중 사이에서 해당 밴드들이 보다 손쉽게 인지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지 않은가? 혹은, 1990년대 초에는 수많은 너바나'들'이 있지 않았던가? 대표적으로 부시(Bush)라는 밴드를 떠올려볼 수 있다. AI를 통해 가능해질 오아시스들 혹은 너바나들은 사실 이미 존재했던 현상을 보다 노골적으로, 즉, 성형수술의 차원에서 구현한 경우라 할 수 있다.

AI 오아시스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방향으로 음악계가 나아간 후 1,000년 정도 흘렀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영생을 사는 전자오락 속 캐릭터와 다름 없는 리엄 갤러거나 커트 코베인이 아니라 인간 리엄 갤러거, 인간 커트 코베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고자 하는 운동이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날 것이라 예상해볼 수 있다. 여기서 떠올려야 할 것은 성서 비평 전통이다. 18-9세기까지 기독교에서 그리스도는 신성으로 여겨졌다. 물론 그리스도는 신이 역사를 통해 인간의 형태--예수--로 육화된 존재였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 교리 내에서 예수는 궁극적으로 신성으로 여겨진다. 이와 달리, 다비트 슈트라우스(David Strauss)의 [예수의 삶](The Life of Jesus)이 보여주듯, 성서 비평 전통은 신성 그리스도가 아니라 인간 예수의 역사적 존재를 추적하고자 한다. 영생을 사는 신성 그리스도 이전에 죽을 운명의 인간 예수가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행해진 성서 연구 전통이 성서 비평(biblical criticism)이다. 신화의 뒤에 있는 것은 역사 속 인간이라는 발상이다. 물론 20세기에 와서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같은 신학자가 내린 결론은 인간 예수 또한 허구이며 신화적 인물로서 그리스도가 초기 기독교 교회의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안병무와 같은 신학자 및 김용옥 같은 학자는 인간 예수가 실존했다고 본다. 예수는 민중의 다른 이름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의,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왕의 직책을 칭하는, '그리스도'라는 신화적 개념이 한번 등장하게 되면 인간 '예수'의 존재가 미궁 속에 남겨지는 면이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과연 인간 예수는 실존했는가?' 이것이 신화와 대립된 역사의 문제다.

AI 리엄 갤러거 및 AI 커트 코베인 등으로 돌아가보자. 1,000년 뒤에도 계속해서 신곡을 내는 AI 리엄 갤러거 및 AI 커트 코베인 앞에서 사람들이 찾아내고자 할 것은 리엄 갤러거의 실존이고 커트 코베인의 실존일 수 있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과연 인간 갤러거는 실존했는가?' 혹은, '과연 인간 코베인은 실존했는가?' AI 리엄 갤러거 및 AI 커트 코베인은 본질론의 시작을 의미한다. 죽지 않는 전자 오락 속 캐릭터가 된 갤러거와 코베인이란 신성 갤러거와 신성 코베인와 다르지 않다. 혹은, 리엄 그리스도 및 커트 그리스도와 다르지 않다. AI가 인간들 사이에서 신탁 기계로 작동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궁금한 것이 있을 때마다 질문을 던지면 무엇이든 '가장 믿을 만한 답'을 주는 기계로 여겨지는 순간 AI는 신의 음성을 담아내는 '오라클 머신'이 된다. 인류의 평균 지적 능력이 몇년 전 정점을 찍고 이미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다큐멘터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요즘이다. 종으로서 인류는 이미 지적 능력의 차원에서 정점을 찍고 내려오고 있다. 인류의 지적 능력을 대신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AI다. 지적 작업을 AI에게 넘겨준 인류는 지금 그저 즐기느라 바쁘다. 이는 무엇보다 선진국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무엇보다 감각적 즐거움이 우위에 오고 있다. 예컨대, 한국에서 고급 커피 시장이 발달하는 방식을 보라. 커피향의 미세한 차이를 발견하고 즐기는 능력이 커지는 것은 기본적으로 좋은 일이다. 그만큼 삶이 풍요로워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각적 능력이 증가할 때 그 뒤에서는 지적 능력이 퇴보하고 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AI라 불리는 신성에게 물어보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체적 행복감을 최고의 선으로서 추구하는 세계관은 그 자신의 지성을 '오라클 머신'에게 양도할 때에나 가능해진다.

문제는 지적 능력 뿐 아니라 창조성의 근원인 실존 자체가 사라질 가능성에 있다. 신의 질서에 따른 본질론이 판을 치게 되면 세계는 종교적이 된다. 학문의 시대가 끝나고 무지의 세계로 재진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종교라는 말이 조금 과하게 들린다면 인터넷의 통계치와 그에 기반한 여론이 인간 개개인의 실존적 질문을 지워버리는 세계를 그려볼 수 있다. 다음이나 네이버 같은 한국의 포털 사이트를 생각해보라. 알고리즘조차 작동하지 않는 그곳에 올려진 게시물 및 기사들은 이미 제목에서부터 무지의 느낌으로 가득하다. 그 어떤 실존도 느껴지지 않는다. 물건을 팔기 위해 독자들을 충동질 하는 언어가 대부분이다. 기업의 언어로 가득할 뿐이다. 예컨대, 해외여행이란 것이 진정 이국적인 음식이나 맛보고 유명한 장소 앞에서 사진이나 찍기 위한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쳐보자. 그러나 만약 해외여행의 본질이 그러한 것에 불과하다면 과연 여행이 그렇게 중요한 일일 것인가?

예수의 삶으로 돌아가자. 예수가 유대교 교리의 상징과 같은 '지성소'를 뒤집어엎고자 그곳에 목숨을 걸고 찾아갔을 때 그는 인간이 내보일 수 있는 창조적 실존의 극단을 보여주고 있었다. 예수의 실존은 그가 신으로부터 버려질 때, 그리하여 죽음에 이르게 될 때, 최고조에 오른다. 실존은 무신론의 순간과 일치한다. 그러나 바로 그 실존의 무신론적 바닥으로부터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 믿음의 공동체 혹은 혁명 공동체는 오직 무신론적 바닥으로부터만 태어날 수 있다. 예수는 죽지만 그 정신(Spirit)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게 된다. 이것이 부활(resurrection)이 뜻하는 바다. 맥락을 바꿔서 말해보자: 신성 AI를 낳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실존이다. 최초로 AI를 낳는 일에 비하면 AI에 의지해서 그저 감각적으로 살아가는 일이 무엇이 그렇게 대단한 일일 것인가? 혁명은 인간이 달성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창조의 순간과 맞닿아있다. 안병무나 도올이 인간 예수를 신화적 예수--그리스도--로부터 구해내고자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1,000년 뒤 인류는 영생을 사는 AI 갤러거, AI 코베인의 뒤에 감추어진 인간 갤러거 및 인간 코베인을 구해내고자 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지도 모른다. 지적 창조성을 되찾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그 전에 생태계 파괴로 인류 자체가 멸망하게 될 수도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방사능 오염수를 먹게 되면 실존이냐 본질이냐는 고상한 질문은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가 된다. DNA 훼손으로 실존을 담아낼 신체 자체가 기괴하게 무너져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이 오려면 그 전에 와야한다.)

* '프랜차이즈'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어떤 면에서 이는 이미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예컨대, 유튜브에는 개인들이 [블레이드러너]와 같은 유명 영화의 시퀄이나 프리퀄을 만들어서 올려 놓은 영상이 있지 않던가?

--

The Lost Tapes (202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