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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 주디스 버틀러, 공짜

by spiral 2022. 10. 12.

유튜브에는 별의별 영상이 다 있다. 최근에는 '자기계발'이라는 키워드를 제목으로 단 영상에 주디스 버틀러의 사진이 덧붙여진 것을 하나 봤다. 세상에, 주디스 버틀러와 자기계발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지? 언제부터 버틀러가 자기계발 담론가가 된 거지? 궁금해서 클릭해봤다. 시작은 이상하게도 돈 안들이고 자기계발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였다. 자기계발, 버틀러, 공짜, 대체 이 키워드의 조합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놀랍게도 이 모든 키워드는 연결됐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계발에 필요한 요소가 교양인데, 교양인이 되기 위해선 여러 석학들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고, 주디스 버틀러는 세계적 석학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공짜' 요소는 어디에 있느냐? 석학들의 강의를 EBS에서 시리즈로 기획을 해서 올린 것을 무료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게 영상의 섬네일이 주디스 버틀러의 얼굴을 붙여놓은 이유였다. 하라리와 샌들의 얼굴도 같이 있었던 것 같다.

자기계발, 버틀러, 공짜,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조합이다. 친구들이랑 잡담하다가, '야, 너 EBS에서 만든 석학 강연 동영상 봤어? 공짜야, 너도 꼭 한번 봐, 주디스 버틀러도 있더라고, 교양도 쌓고, 자기계발도 되고, 얼마나 좋아?'라는 이야기를 한 두마디 던지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늘상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잡담을 영상으로 만들면 기괴해진다. 왜냐하면 영상은 '주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해당 영상이 선택한 주제는 '자기계발'이었다. 문제는 한번 주제가 설정되면 영상이 최소한도로 '교양 지식 다큐멘터리적' 성질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는 데 있다. 거창한 프레임이 설정된다는 뜻이다. 특정한 '주제'를 제목으로 달고 있는 영상을 보려할 때 '엇, 뭐라도 하나 배울 게 있으려나?'라는 최소한도의 궁금증이나 호기심 없이 과연 영상을 클릭할 수 있을 것인가? '주제'를 담은 영상은 시청자 입장에 배우고자 하는 겸손함을 요구한다. 거꾸로 말하면 영상의 '주제 타이틀'은 '내가 좀 아는데'라는 최소한도로 뻐기는 몸짓을 지니고 있다.

주제 영상이 지닌 지적 과시의 자세가 그 자체로 잘못되었다고 말할 필요는 전혀 없다. 문제는 시청자가 취한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자세에 영상의 내용이 부합하지 않는 경우다. 열어봤더니 별다른 내용이 없는 경우 말이다. 예컨대, 앞서 말한 영상은 버틀러의 얼굴을 떡 하니 달아놓고 정작 그들--버틀러는 자신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그'나 '그녀'가 아니라 '그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한다 ('나'의 '그들'과 '나'의 '자아' 사이에는 큰 철학적 간극이 놓여있지 않은가?)--의 철학에 대해 단 한 마디의 설명도 제공하지 않았다. 이 경우 '주제 타이틀'은 '클릭베이트 타이틀'(click-bait title)이 된다. 우리 말로 하면 '낚시 타이틀' 정도 되겠다. 물론 근래 영상이 그저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잡담의 형식으로 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쇼츠'를 생각해보라. '쇼츠'의 요점 중 하나는 영상이 구태여 '주제 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20-30초 짜리 잡담에 무슨 거창한 주제 의식이 필요하단 말인가? 이는 영상 문법이 문어체에서 구어체로 변해가는 과정과 같다. 앞서 언급한 자기계발-버틀러 영상이 만약 쇼츠로 만들어졌었다면 낚시를 당한 것과 같은 느낌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근래 유튜브에 올려지는 영상은 쇼츠-잡담에 불과한 것을 '뻥튀기'한 것들인 경우가 많다.

'자기계발'이란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일반적으로 문학이나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계발이라는 키워드는 '유치하다'고 여겨진다. 어째서 그러한가? 해당 단어가 보다 넓은 공공성에 대한 사유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인문적으로 말해보자면 '세계성'을 결여하고 있다. 철학은 자아 안에 갇히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자아를 발생시키는 동시에 자아를 좌초시키는 실재에 관심을 두는 것이 철학이다. 예컨대, 바디우로 혹은 들뢰즈로 자기계발을 하겠다는 말이 품고 있는 어딘지 맥락에서 벗어난 어감을 생각해보자. 솔직히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철학을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예컨대, 바디우의 철학은 인간의 자아가 결부되지 않은 수학에 기반한다. 들뢰즈의 철학은 비인간주의적이다. 들뢰즈에게서 인간의 자아는 '기관 없는 신체'의 한 구석에 기생하고 있을 뿐이다. 하이데거의 '다자인'(Dasein)은 어떠한가?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는 존재론적 차이의 문제이지 인간 심리의 문제가 아니다. '자아'를 위해 '다자인'을 공부한다고 말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에 헤겔이 보여준 것과 같은 변증법적 사유가 필요해지는 것이지 않은가? 그러한 이유로 정신분석이 등장하는 것이지 않은가? 

물론 현실 속에서 싫든 좋든 난 자기계발의 '팬'으로 살아간다. 사회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자아의 '사이즈'를 '벌크업'하는 인간은 유치하지만 또한 필연적이다. 인간의 자아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계발하는 자아 자체를 사유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길 좋아하는 자아를 생각해보자: '난 자기계발을 위해 미드를 자막 없이 봐.' 영어 회화 공부보다 더 효과적으로 한국인이 자신의 자아를 키우는 방법도 없지 않은가? 영어는, 불행하게도 영국인이나 미국인 사이에서는 자기계발을 시켜주지 못하지만, 한국들 사이에서는 자아의 왕으로 군림한다. 영어를 걸치게 될 때쯤 한국인은 마치 명품 수트를 입은 듯 으쓱으쓱 자아에 도취되지 않던가? 마치, 예컨대, '톰 브라운'을 걸친 느낌이다. 그러한 잘 자란 자아라면 마땅히 해외여행 갈 때 캐리어는 '리모와'여야할 것이고, 평상시 가방은 '프라이탁'을 사용해주는 친환경적 이미지도 좀 필요할 것이고, 시계는 . . .  기타등등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을 하나 만들어볼 수 있지 않겠는가? 여기서 문제는 플롯이다. 자아로 자신을 가득채운 등장인물은 대체 무슨 짓을 할 것인가? 자아로 충만된 주인공을 지닌 플롯의 주된 '행위'(action)은 무엇일 것인가? 과연 '자아의 왕'에게 더 이상 해야할 일이 남아있을 것인가? 에드윈 에벗(Edwin Abbott)의 [플랫랜드](Flatland)를 보면 일차원의 세계에 사는 유클리드의 점이 등장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왕으로 묘사된다. 세계가 자기 자신인 점(point) 이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플롯이 진행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플롯은 점과 점 사이에 직선이 그어질 때 최초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자아의 왕을 위한 문예사조는, 낭만주의가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린다. 예컨대, 알고 보니 사람들이 줄줄 따르던 등장인물의 예쁜 외모는 성형 수술의 결과였고, 이름은 대기업 회장의 이름을 따라 바꾼 것이며, 옷입는 스타일은 과거의 미국 유명 연예인 혹은 영부인을 따라한 것이고, 기타등등의 반전이, 배만 빵빵하게 부풀었던 풍선이 터지듯, 일어나는 이야기를 생각해보라.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비극의 반전을 떠올려선 곤란하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에서 보듯 자기가 죽인 자가 알고 보니 아버지였고 자신의 부인이 자신의 어머니였더라는 비극적 반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등장인물의 자아가 알고 보니 깊은 내면의 표현이 아니라 '짝퉁 껍데기' 혹은 보다 고상하게 '포스트모던 혼성모방'(pastiche)에 불과했더라는 식의 반전이 있다면 '플롯'이 작동하기 시작할 것이란 뜻이다. 전통적으로 플롯에는 결혼 플롯, 상속 플롯, 출생의 비밀 플롯 등등이 있다. 그렇다면 방금 묘사한 플롯은 뭐라고 불러야할까? 소설 속 다른 등장인물의 관점에서 말하면, '(캐)사기 플롯'일 것이고, 등장인물 자신의 관점에서 말하면 점잖게 '정체성 혼란 플롯'이라 불릴 것이다. [공각기동대]의 오시이 마모루 같은 감독이 좋아하는 플롯 말이다. 자기 기억인 줄 알았던 것이 알고 보니 기계에 심어진 데이타에 불과하더라는 과학소설적 플롯 말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내보이는 특징 중 하나는 미디어를 통해 생산 및 소비되는 타자의 이미지 및 정체성을 자신의 자아로 착각하여 내면화한다는 데 있지 않던가? 인스타풍 사진들과 인스타풍 장소 및 인물을 생각해보라. 인스타에서 관심을 받기 위해서는 아무 사진이나 아무렇게 올려서는 안되고 특정한 문법을 따라야한다. 마치 누군가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감시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정신분석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묘사하기 위해 '대타자'(The big Other)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물론 타자의 응시는 자아 형성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좋은 점도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모범으로 삼아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위인전이라는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앞서 언급한 자아계발-버틀러 영상을 떠올려보라. 해당 영상의 섬네일에 사용된 이미지들, 주디스 버틀러, 유발 하라리, 마이클 샌들의 이미지는 '위인전 표지에 박힌 위인의 이미지'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내가 아는 한 프랑스 철학자는 자신의 방에 헤겔의 사진을 걸어놓고 있다고 한다. 나에게도 하나 있다. 내 방에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키스 자렛의 모습이 걸려있다. (10대 시절에는 커트 코베인의 얼굴이 걸려있었다.) '헤겔 브로마이드'는 도통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말이다. 'BTS 브로마이드'라면 모를까. 자아 형성에 있어 최소한도의 픽션은 필연적이다. 그런 이유로 백날 '진실된 기억'을 찾으려 해봤자 찾을 수 없다. 동일한 것을 경험한 사람들의 기억을 나중에 비교해보라. 다 다르다. 내 머릿속 기억이 주입된 것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픽션 자체의 현실성을 어떻게 공백의 관점에서 개념화할 것이냐가 관건이라는 뜻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생각해보자. 처음에 K는 자신이 지닌 어린 시절 기억이 가짜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공장에서 만들어진 레플리컨트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간에 그는 그 기억이 진짜로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그는 자신이 레플리컨트 어머니와 인간 사이에서 생식을 통해 태어난 기적의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기억을 믿음으로써 자신의 구속된 지위--인간보다 낮은 위치에서 인간의 명령을 따르는 지위--를 벗어던지게 된다. 그러나 그의 기억은 실은 심어진 것이었다. 그는 착각을 했던 것이다. 기적의 아이는 따로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핵심은 그가 한낱 망상에 빠졌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핵심은 자신이 기적의 아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 후 K가 만들어내는 행위가 플롯의 흐름을 전환하는 동력으로 작동하게 되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세계를 변혁하는 것은 픽션이다. 픽션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픽션은 어디까지나 실재의 공백이 드러나는 창구이기도 하다. 성형수술로 얼굴을 바꾸고, 도사의 조언에 따라 이름을 바꾸고, 셀럽의 스타일을 따라하는 사람들이 자기계발 담론의 유치한 판본에 불과한 이유는 그들이 픽션이 지닌 공백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 자기계발 담론은 탈신비화의 계기를 전혀 지니지 못한다. 그러한 자들은, 픽션을 통해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픽션으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든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정치의 미학화'를 경계한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저는 자기계발을 위해 수학을 공부해요'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수학은 백날 공부해도 '자기'를 계발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수학 공부가 '자기'를 계발해준다면 정의상 그것은 이미 수학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구태여 말해보자면 수학은 인간 자아를 정화시켜 제거하기 위한 것에 더 가깝다. 어째서 일반적으로 수학적 지식이 무신경한 기계와 같이 느껴지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라. 한 예로, 수학의 비물리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향 때문에 18세기 영국에서 수학의 발전이 늦어졌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다. 19세기초 캠브리지 대학에서 배비지(Charles Babbage), 피콕(George Peacock), 허셜(John Herschel) 등의 젊은 신진 수학자들이 분석학회(The Analytical Society)를 만들어 기존 영국의 뉴턴 기반 수학에 반발하며 대륙 수학 전통을 내세우게 되는 맥락이 여기 있다. 기존의 영국 과학 교육 전통이 어떤 것인지를 보려면 월리엄 휴월(William Whewell)을 참고해야한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친숙하게 아는, 인문적 교양에 대한 고려 없이 그저 과학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과학자'(scientist)라는 말을 처음으로 고안한 과학자였지만 결코 인문 교육의 관점을 놓지 않았다.* 예컨대, 그가 쓴 책 중에는 [자유주의적 교육 일반에 관하여](Of a Liberal Education in General)이라는 것이 있을 정도다. 과연 오늘날 그 어떤 과학자가 '자유주의 교육 일반'에 관한 인문적 책을 쓰고자 할 것이란 말인가? 거꾸로 말하면, 당시 어째서, 예컨대, 배비지가 휴월과 달리 '기인'으로 여졌는지 그 이유가 여기 있기도 하다. 당시 배비지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교양 없는 수학 덕후'로 여겨졌다. 인간적 유대 없이 그들만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전문가 수학자' 혹은 '전문가 과학자'가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수학자-과학자의 일반적 이미지이지 않은가?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묘사된 앨런 튜링의 자폐적 이미지를 생각해보라.) 만약 '인문적 수학자'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그러한 수학자는 '자기계발하는 수학자'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획은 수학의 기계적 본질을 감추는 일과 같기도 하다. 수학은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재구성하도록 만드는 비인간적 기계성의 문제로 이해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주복을 입고 대기권 밖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과연 우리가 친숙히 안다고 여기는, '반만년 역사'를 지닌 한반도의 인간일 것인가? 우주는 인간 역사의 외부에 위치한다. 그리고 우주의 나이는, 기껏 반 만년 정도가 아니라, 138억년이다. 물론 최근 들어 우주 공간을 식민화하여 인간 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강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일론 머스크 등이 세우고 있는 화성 식민지 계획이 대표적이다.

* 휴월이 과학자(scientist)라는 용어를 고안하기 이전에 영어권에서 과학을 하는 사람은 문인(man of letters)에 대조되어 과학인(man of science)라 불렸다. 물론 '과학인'이라는 번역에는 어폐가 있다. 전통적으로 서구에서 '사이언스'는 지식 일반을 통칭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맨 오브 사이언스'에서 '사이언스'가 '네츄럴 사이언스'(natural science), 즉 자연과학을 의미한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네츄럴 사이언스'와 기존 '사이언스'의 차이는 전자의 경우 어디까지나 관찰과 실험에 기반한 지식을 의미한다는 데 있다. 당연히 지식 생산은 관찰과 실험에 기반하여 연역(induce)되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식은 공리로부터 시작하는 수학적 추론(deduction)에 의해서 마련될 수도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대표적이다. 자연과학의 시대 이전에는 '시적 비전'이란 것도 있었다. 신화의 세계를 생각해보라. 플라톤이 수학적 이데아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 신화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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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t of the Trio Vol. 1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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