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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안병무, 민중신학, 유학, 그리고 자연과학

by spiral 2022. 10. 26.

도올은 기독교 관련 강연을 할 때 가장 빛이 난다. 이는 그의 철학적 궤적이 서구 기독교 신학에서 시작해서 자신의 한국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방향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그의 동양철학 독해는 의외로 순수하게 동양적이지 않다. 그가 동양철학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알게 모르게 서양철학에 대한 자의식이 전제되어있다. 그가 지닌 서양철학에 대한 자의식은, 아래 강연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 안병무나 정약용이 했던 고민과 궤를 같이 한다. 어째서 그가 기회만 되면 강연 중에 '서양철학은 구라'라고 끊임없이 '까는지' 생각해보라. 이는 조선시대 기독교와 조우한 유학의 운명이 그러했듯 정약용 시대에 이미 시작된 자의식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조선에서 순수한 의미의 동양철학을 하는 것이 이미 18세기말 19세기초에 불가능한 일이 되었었다는 뜻이다.

어째서 유학에 기반한 정약용이 천주교 세례를 받고 천주교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인지 그 배경을 생각해보자. 첫째로 이는, 도올이 말하듯, 이(사단)와 기(칠정)의 이원론에 기반한 퇴계의 유학을 계승한 남인에 속한 정약용 입장에서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을 기본으로 삼는 기독교적 사유를 받아들이기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당대 조선 사회가 이미 충분히 칠정으로 문란해진 와중에 사람들 사이에 '하나님'에 대한 '죄의식'이라도 주입할 수 있다면 육신의 칠정을 억누르고 정신의 사단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약용은 기독교가 죽어가는 유학의 정신을 살릴 한 가지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본 것이다. 겨우 호랑이 정도나 봐야 두려워하며 자중을 하는 것이 사람인데 그보다 더 강력한 내적 통제 수단이 있다면 더 좋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하나님의 응시'가 '호랑이의 응시'와 같은 역할 혹은 그 이상의 역할을 한다면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도올은 이를 이미 몰락하기 시작한 유학을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도입한 어줍잖은 논리로 여긴다. 구한말 사람인 아버지가 보인 색을 밝히고 바람을 피는 태도에 큰 반감을 느끼던 안병무가 '기독교는 그러한 부도덕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 이유 하나 때문에라도 기독교는 일단 믿을 만한 것이었다'고 말했다는 일화를 보라. 조선 시대 양반들의 여색은, 첩을 당연하게 두는 문화에서 보듯, '사단'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여기서 기독교가 사람들의 욕망을 다스릴 보수적 교리로서 조선의 양반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졌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도올이 지적하듯, 퇴계의 유학을 이은 남인이 조선 사회에서 전혀 주류가 아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퇴계 계통의 유학이 비주류였다는 말이 그와 대립했던 심신일원론에 기반한 기대승의 유학이 주류의 위치에 있었다는 뜻인지까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유교에 기반한 조선 사회가 후기로 갈수록 육신에 대한 사상적 통제력을 잃어갔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몸과 마음이 하나라는 일원론적 유학은 말이 좋아 일원론이지 현실 속에서는 신체의 욕망(칠정)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휩쓸려갔었던 것이다. 여기서 유학이 불교나 기독교와 달리 그 모든 본질론--천국 혹은 열반의 세계는 주어진 신체적 현실 너머에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데서 자부심을 가졌다는 점을 볼 필요가 있다. 좋게 말하면 유학은 실존론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스피노자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나쁘게 말하면 의외로 일원론적 유학은 사단의 도덕에 이르지 못한 채 신체의 칠정에 빠져 허우적거릴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이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고루하고 도덕주의적인 유학의 이미지가 주류 정치계에서 벗어난 영남의 남인들이 추구했던 퇴계식 유학의 이미지이지 조선의 사회 현실은 그와는 달랐을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다. 

물론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정약용의 유학-천주교와 달리 민중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안병무의 신학은 다시금 본질론을 깨트리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몰트만(Jürgen Moltmann)과 그가 벌인 논쟁이 이를 잘 보여준다. '예수는 민중'이라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몰트만은 결국 기독교 교리를 강조한다. 예수가 민중인 것은 맞지만, 민중은 스스로 예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존을 강조하는 불트만(Rudolf Bultmann) 신학의 경우에서도 예수 사건은 말씀(Logos)을 선포(kerygma)하는 문제로 이해된다. 민중 속의 역사적 예수는 규명될 수 없으며 복음서 속 역사적 사실과 같이 보이는 사건들은 애당초 신학적 로고스를 초대 교회 신도들을 상대로 이해시키기 위한 신화로서 기획된 것으로 봐야한다는 뜻이다. 바르트(Karl Barthes)나 몰트만의 신학은 여기서 더 나아가 교회의 도그마를 강조한다. 이렇게 되면 예수의 재림이 이루어졌는지 아닌지를 교회가 교리에 따라 결정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예수 사건이 다시 일어나도 교회가 아니라고 하면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서 교회는 사실상 민중을 통제하는 교리적 장치가 된다. 안병무가 민중신학을 내세우는 것이 바로 이 지점에서다. 그가 보기에, 예컨대, 전태일의 죽음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예수 사건이다. 안병무의 신학은 대단히 해방적이다. 그의 신학적 입장에 감동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난 기본적으로 안병무 신학의 취지에 동의한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자세가 어떠한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자신이 스스로 예수가 되기 위해 교회에 가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교회에 간다. 착한 아이 같이 행동한다. 그리고 항상 반성한다. 동시에 예수의 이름을 빌려 자신이 탐닉한 칠정을 전부 죄사함받는 기적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에게는 예수조차 초월적 신성의 문제다. 그들에게 예수는 인간 예수이기 이전에 '크리스트,' 즉, 신성한 말씀에 의해 약속되었던 '구원자'다. 사르트르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했던가? 기독교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사르트르를 옹호하고 싶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기도 하다. 사실 도올이 지적하듯 실존보다 본질을 강조하는 입장에는 이유가 있다. 몰트만을 비롯한 그들 독일 신학자들은 나치즘을 경험했던 터였다. 그들은 민중이 민중 자신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극단적 폭력을 목격했다. 미국은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바 있다. 도올이 지적하듯 한국의 민중은 지난 대선에서 무능하고 압제적인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이를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것인가? 민중신학의 허점이 드러난 사례인 것인가? 스스로 예수임을 선언할 때 민중은 통제불가능한 광기에 빠지게 되는 것인가? 민중의 열정은 비합리적이기에 엘리트 교리에 의해 통제되어야하는가?

그러나 이 문제에는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기도 하다. 사실 한국의 지난 대선에서 많은 주류 기독교도들은, 민중 혹은 예수 사건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교회와 교리의 이름으로, 즉, 목사가 그렇게 하라고 한 설교를 듣고, 2번 후보를 찍었다. (가장 비루한 예를 들자면, 일명 '빤스 목사'라 불리는 전광훈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기독교 교리가 민중의 목소리를 묵살하고 거꾸로 민중의 이름을 참칭한 결과 지난 대선의 결과가 만들어지게 된 측면이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외에도 다른 많은 요인이 작용했다.) 그토록 기독교 신학에 능통하면서도 도올이 반기독교적 언어로 기독교를 비판하는 맥락이 여기 있다. 도올이 암시하듯, 예수라는 육화의 문제에 대한 고려 없이 기독교를 이야기하는 것은 천주교적 본질론에 머물 뿐이다. ('천주'라는 말 자체가 이미 '본질', 즉, '하나'(the One)을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즉, 말 그대로 '천주교'는 '하나님교'를 뜻한다. 크리스트교(Christianity)가 아니라 말이다.) 헤겔이 실체를 동시에 주체의 문제로 보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는 어디까지나 개념(Begriff)을 내용의 형식으로 이해한다. 예컨대, 개념은 민중이라는 질료로부터 발생한다. 그러나 개념으로 사물을 포착한다고 여겨지는 주체는 그저 실체 안에 새겨져있는 것으로 경험되기도 한다. 여기서 교리가 본질론의 모습을 하고 전면에 나서게 된다. 주체와 실체 사이에는 늘 불화와 소외가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십자가 처형에 처해지는 예수의 고민이 있다: '주여, 주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Eli, Eli, lama sabachthani?) 헤겔이 말하는 '교양'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달성될지는 바로 이 버려짐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렸다. 예수는 버려진 후에야 부활하지 않았던가? 이것 하나는 말해볼 수 있다: 민중의 대표가 아니라 권력자를 대통령으로 지닌 한국의 민중은 지금 본질로부터 버려진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다음 차례가 '사건'과 '사건의 개념화'인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하나 더. 정약용의 천주교 수용 문제에 대한 도올의 입장으로 잠깐 돌아가보자. 모든 종류의 본질론을 타파하는 데 자신의 동양철학적 기획의 핵심이 있다고 믿는, 그것이 서양 철학을 극복하는 핵심이라 여기는 도올 입장에서 볼 때 자연히 정약용의 기독교 수용 논리는 유학의 본질론화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즉, 도올이 서양철학을 '구라'라고 여길 때 그가 말하는 '구라'가 바로 '본질'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서양식 본질을 모두 타파하여 순수한 상태에 이른 동양철학을 가정해보자. '사악한 서양철학'을 모두 물리진 그리하여 본질 타파를 외치는 언어가 빠진 채 진행되는 '순수 동양철학'을 한번 가정해보자. 예컨대, '서양철학은 구라!'라는 언어를 내놓지 않는 나긋나긋한 도올의 모습을 가정해보자. 다만 물 같이 흐를 뿐인 도올을 가정해보자. 과연 그가 우리가 아는 바로 그 '매력적인, 청년과 같은 정신의 소유자, 도올'일 것인가? 과연 그가 우리가 존경하는 바로 그 도올일 것인가? 서양철학적 본질이 사라질 때 우리가 지금 '삶'이라 부르는 모든 것 또한 사라지고 없을 것이지 않은가? 물론 오늘날에는 서양에서조차 서양철학적 사유가 약화되고 있다. 브루노 라투르 같은 사람이 관심을 받는 방식을 보라. 그렇다면 이것이 동양철학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뜻인가? 얼마간은 그렇다. 그러나 현실은 좀 다르기도 하다. 철학적 사유가 약화되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은, 동양의 지혜로 넘치는 시대가 아니라, 진리론으로부터 지식론으로 물러난 자연과학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 자연과학은 가장 순수한 이상적 세계를 보여준다. 천체물리학자들이 보여주는 어린아이와 같은 낭만을 보라. 그들은 최초로 근접 거리에서 명왕성을 연구하기 위해 보낸 무인우주선 '뉴호라이즌'호에 명왕성을 발견한 클라이드 톰보의 유해를 실어서 보내는 낭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낭만의 뒤에는 현실이 뒤따른다. 예컨대, 영화 [애드 아스트라](Ad Astra)가 묘사하듯, 미래에는 달이나 화성에서 자원을 둘러싸고 인간 욕망에 기반한 아귀 다툼이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자연과학의 지식론이 결국 다시 진리론을 불러들이게 되는 방식이지 않은가? 즉, 인간 욕망이 우주 속에서 식민지 다툼의 형태로 부딪치게 될 때 그 결과 타락하게 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담론으로서 본질론이 다시 대두하게 될 것이지 않은가? (여기가 영화 [듄]이 위치한 지점 아닌가? [듄]의 구원자 내러티브는 우주에서 '스파이스'라 불리는 자원이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 그리고 본질이 우리를 억압하게 될 때쯤 그때 다시 우리는 '본질은 구라'라고 외치는, 청년 정신의 소유자 도올을 보게 될 것이지 않은가? 도올은 기독교 관련 강연을 할 때 가장 빛이 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애당초 동양철학의 세계는 빛과 어둠의 이분법에 기반한 변증법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동양에는 음과 양이라는 것이 있지만 여전히 그것은 고정되지 않는 흐름에 가깝다.) 그러나 인간의 현실은 늘 빛과 어둠의 변증법을 불러들인다. 어린 아이의 순수함으로부터 시작했지만 눈 떠보니 어느새 사춘기식 아귀다툼을 하고 있는 모습, 그에 맞서 정의로움을 추구하는 청년기의 기백을 거쳐 중년의 노련함이라는 단계를 지나 노년의 평화, 그리고 모든 삶의 소멸로 이어지는 내러티브와 함께 말이다. 순수한 잠재성은 더러운 현실성 안에서 그 자신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 과학소설의 일반 문법에 익숙한 일부 독자는 [듄]에 대해 대체 이 작품 어디에 과학소설적 미래 사회의 모습이 들어 있느냐고 항변한다. 과학소설을 빙자한 기독교 서사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타당한 평가다. 왜냐하면 [듄]은 과학적 사유의 대상인 우주가 인간 역사의 일부로 편입된 후 일어나는 서사를 그려내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우주가 인간에 의해 식민지화될 때 우주는 타락한 인간 역사의 일부가 될 뿐이다. 인간 역사의 구속에서 벗어난 과학적 낭만은 천체물리학의 단계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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