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학위 논문과 같이 단일한 주제 의식을 긴 시간 동안 탐구할 것을 요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겪게 되는 문제의 하나는 사람이 편협해진다는 데 있다. '학문적 엄밀성'이 요구하는 것이 사실 알고 보면 현실에서 동떨어진 채 추구되는 '편협한 정합성'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편협한 정합성을 비판하는 것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과 같이 규범에 대한 비판이 그 자체 '혁신'이라 불리는 하나의 장르가 되어 유행처럼 번지는 시대에는 말이다. 그러니 유행을 거스르며 '삶의 지혜'를 뒤집는 이야기를 좀 해보자. 이는 오늘날 퍼지고 있는 '반지성주의'의 한 가지 판본이 '지적 정합성'을 거부하며 '삶의 지혜'를 직접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감수성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뜻이다.
대학 교육의 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사실 가장 중요한 대학 졸업 요건 중 하나는 '편협한 정합성의 습득'이다. 물론 최근 이러한 목표는 달성되고 있지 않다. '정합성,' '규칙,' '법칙' 등은 '규제 파괴적 혹은 혁신적 창업'의 반대말과 같지 않은가? 문제는 대학에서 기본적 논리성을 연마하기 이전에 실용이라는 주문을 외는 법을 배우게 되면 졸업 후 '법사'들과 '도사'들, 혹은 스스로를 '스승'이라 부르는 자들의 조언을 구하게 되는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돈벌이'의 주문에 빠진 대학 수업과 법사적 혹은 도사적 감수성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박사학위 주제로 '사주팔자'조차 택하는 것이 가능한 시대이니 역시 데카르트적 수학보다는 '동양의 지혜'가 지배하는 멋진 신세계가 21세기인 것인가?
개인적으로 학부 수준에서 대학 교육의 첫번째 핵심은, 숫자를 직접 다루든 아니든, 수학적 사유가 결과론적으로 제공하는 편협한 정합성을 익히는 데 있다고 본다. 말할 것도 없이 수학은 끔찍하다. 결과물만 놓고 보면 수학은 기계적이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심을 지닌 사람들은 수학을 탄핵한다. 일견 멋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너무 쉽게 탄핵한다. 수학이 없는 곳에서 살아있는 소의 가죽을 벗기는 굿판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잊은 채 말이다. 1990년대였던가 살아있는 곰의 쓸개에 호스를 꼽아 그 즙을 빨아먹던 사람들에 관한 뉴스가 보도된 적 있다. 그들은 살아있는 건강을 꿈꾸고 있었다. 닐 블롬캠프 감독의 [디스트릭스 9]에는 빈민가를 지배하는 깡패 집단 두목이 에일리언으로 변해가는 주인공이 지닌 힘에 매료되어 그의 신체를 산 채로 먹고자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신체의 초자연적-외래적 힘을 꿈꾸고 있었다. 하나의 살아있는 신체에 다른 산 신체가 직접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 이 신비주의적 유물론의 세계가 그렇게 좋다면 수학-기계를 쓰레기통에 넣어도 될 것이다.
교육의 영역에서 '창조성'을 미신을 숭배하듯 숭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기계성의 상태에서 벗어나 살아숨쉰다는 창조성에 대한 열망이 살아있는 곰의 배에 구멍을 내고 호스를 박아 쓸개즙을 빨아 꿈틀거리는 '건강'을 얻으려는 열망과 별로 다르지 않다면 어찌할 것인가? 에일리언의 '힘'을 그 산 신체를 씹어먹어 흡수하려는 빈민가 깡패 두목의 열망과 다르지 않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러한 미신에 따르자면 수학 이전 전근대 사회는 '창조성'으로 넘치는 사회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전근대 사회에서 '기계성'이 문제시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삶이 '창조적'이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 사회에 '기계성' 대신 살아있는 신체의 가죽을 벗기는 '폭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자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너와 나의 구분이 없는 전근대 사회 속에서는 내가 너의 신체에 칼을 꼽는다고 하들 그것은 자연의 섭리가 발생하는 한 양상일 뿐이다. 거기에 옳고 그름이란 없다. 주체와 대상의 분리가 없는 곳에서 폭력이 문제되지 않는 것은 흐름으로서의 자연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성 혹은 되어감(becoming)만을 미신적으로 강조하는 사유가 의외로 인간의 인간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바탕으로 복무할 수 있음이 드러난다. 신비주의적 관계론에 바탕한 풍수지리, 예컨대, '스승'의 말에 의거해 '용산'이 아니면 안된다는 관계론적 미신에 취해 원한을 사가며 그곳에 원래 있던 자들을 쫓아내는 폭력적 행위에 단절을 가하는 것은 수학적 기계성이다. 수학이 신비주의 풍수지리에 'No!'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기계성 때문이다.
수학이 기계적인 것은 수학이 생성의 흐름에 이산적 절단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수학은 그 끊어진 생성의 흐름을 뒤늦게 명제의 형태로 혹은 확률의 형태로 복원하고자 하는 기계적인 학문이다. 여기서 대학 교육이 목표로 삼는 것이 '동양의 지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한다. 대학 교육은 수학적 정합성이라 불리는 '기계적 지식'을 다룬다. 법사나 도사와 같은 감수성을 지닌 반지성주의자들이 대학 교육을 우습게 여길 때 사람들이 일견 공감하는 이유는 대학 교육이 바로 이 한낱 편협한 수학적 정합성을 지식이라 부르며 추구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 수학적 단절이 없는 곳에서 신체는 너와 나의 구분이 사라진 상태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거리를 취하지 못한다. 생성되는 폭력에 단절을 가하며 그에 관한 명제를 산출하지 못한 채 그저, 예컨대, 뇌에 침투한 기생충과 그에 조종당하는 곤충 사이의 연속적 관계를 자연이라 부르게 된다. 여기서 자연은 닫힌 연속성의 세계로 정의된다. 그러나 자연이 미완성이며 훨씬 더 불연속적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수학에 두 가지가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산 수학(discrete mathematics)과 연속 수학(continuous mathematics)이 그것이다. 이산 수학은 기본적으로 셈하기의 문제다. 셀 수 있는 것들은 서로 단절적이다. 물론 수학에서 셈하기는 단절을 단절로 두기 위해서가 아니다. 셈을 해서 그들 사이의 관계를 복구하기 위해서다. 예컨대, 우리는 두 개의 눈을 지닌 동물을 셈할 수 있고, 이 경우 우리는 하나의 균질적 집단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다수는 하나에 의해 셈해진다. 명제는 어떤 사태 혹은 현상을 두고 셈이 가능한지 여부를 따지기 위한 장치다. 예컨대, 어떤 명제가 참이라면 해당 명제가 전제하고 있는 공리가 다수를 셈한다고 말해볼 수 있다. 그러나 명제의 외부 혹은 명제와 명제 사이에는 여전히 단절이 개재한다. 명제와 명제 사이에서 곤충의 신체 속으로 파고드는 기생충은 상상할 수 없다. 명제와 명제는 연속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명제의 외부는 진공이다.
반면 연속 수학은 기본적으로 기하학에 기초한다. 물론 유클리드에게서 보듯 기하학적 도형은 수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기하학에서 점과 점 사이는 선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여기서 점과 점 사이는 연속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데카르트에 가야 기하학은 함수로 번역되게 된다. 그 결과 대수와 기하는 행복하게 연속적으로 만난다고 여겨지게 된다. 그러나 곧 문제가 발견되게 된다. 함수가 그리는 곡선의 연속성을 정확히 세는 것이 근본적으로 가능한지 의문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미분을 생각해보라. 문제는 무한소(infinitesimal)가 단순히 무한히 나뉘기만 하는 것인지 그리하여 이산 수학적 직선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한계(limit)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논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최초로 이 문제를 기술적 차원에서 해결한 것은 뉴턴과 라이프니츠였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수학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뉴턴이 오늘날 수학자가 아니라 물리학자로 여겨지는 것은 그에게서 수학이 그 자체 목적으로 취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수학은 자연 내 물리적 곡선을 계산하기 위한 도구였기에 목적 달성에 문제가 없다면 그 자체 딱히 정합성을 지닐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었다. 물론 19세기에 바이어슈트라스(Karl Weierstrass)에 의해 극한 개념은 수학적으로 증명된다. 그에 따라 무한소 개념은 폐기되게 된다. 이는 기하학적 세계가 이산 수학적 관점에서 또한 연속적임이 증명되었다는 뜻과 같다.
다시 창조성이라는 주제로 돌아가보자. 내가 이산과 연속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우리가 흔히 창조성이라고 미신적으로 주문과 같이 일컫는 것이 수학적 기계성 내부에서 다시 찾아져야한다는 말을 하기 위함이다. 이는 근래 수학적 발견이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얼마전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를 생각해보자. 수학자이지만 그는 의외로 직관과 상상력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직관 및 상상력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예컨대, 그가 말하는 상상력은 살아있는 소의 가죽을 벗기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폭력적 상상력을 일컫는 것인가? 그럴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상상력을 이해하는 것이 곧 '창조성'이라는 미신 숭배에서 벗어나는 길이지 않겠는가?
사실 수학에 기반한 서양 철학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허준이가 말하는 직관 및 상상력이 칸트적 의미의 초월론적 감성(transcendental aesthetic) 혹은 초월론적 상상력과 상응한다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칸트가 초월론적 감성이 발생하는 지점으로 시공간에 대한 인간의 직관을 든다는 점을 기억하라. 여기서 시공간은 말할 것도 없이 뉴턴적 의미의 기하학적 시공간과 겹친다. 허준이의 작업이 이산 수학을 기하학의 연속성 속에서 다시 이해하고자 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 핵심적이다. 사실 초월론적 감성 혹은 직관의 뒤에 있는 것은 불연속성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여기서 앞서 수학을 이산 수학과 연속 수학으로 나눴을 때 한 가지 남겨지는 문제가 '그렇다면 그 둘의 관계는?'이라는 질문이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산 수학과 연속 수학은 각자 정합적이다. 그리고 각자의 정합성은 편협한 의미에서 기계적이다. 그러나 그 둘의 관계라는 문제로 가면 기계적이지 않은 것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편협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둘 사이의 공백에서 발생한다. 물론 거꾸로 말하면 이는 둘의 관계가 수학적 의미에서 정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둘 사이의 관계는 많은 부분이 수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채 남겨져 있다. 가설이라고 불리는 추측(conjectures)이 있을 뿐이다. 허준이의 작업은 바로 이 추측으로 이루어진 제3의 지대에 위치한다. 그의 조합론(combinatorics)은 이산 수학적 명제와 기하학적 연속성 사이의 관계를 셈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어째서 한 명의 수학자가 평생 단 하나의 수학적 추측도 증명하기 어렵다고들 말할 때 허준이가 이미 10여 개의 추측을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인지 그 배경을 추정해볼 수 있다. 쉽게 말하면 그는 완성된 수학적 지도의 기계성 외부에 아직 검은 그림자로 지워진 부분을 상동성이 발견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서로 다른 기계적 수학성의 세계들 사이의 관계를 직관적으로 상상함으로써 수학적으로 그려내고자 한다. 허준이는 그러한 작업에서 상상력과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여기서 직관 혹은 초월론적 상상력이 이산 수학과 연속 수학이 서로 부드럽게 이행하지 못하는 곳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칸트에게서 초월론적 상상력이 직관을 통해 시공간을 구성하는 것으로 여겨질 때 그것은 직관에 의해 시공간이 연속적으로 구성되는 과정 자체가 이미 이산적 단절을 포함한다는 것을 암시하지 않는가? 물론 칸트에게서 수학적 이해력은 시공간이 직관된 후에 작동한다. 그러나 이는 상상력이 이해력 이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즉, 이해력의 조건이 바로 직관 혹은 상상력이라는 뜻이다. 칸트의 철학이 직관주의 수학의 시초와 같이 여겨지는 것은 이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허준이 또한 인간의 사고 방식을 드러내는 틀이라는 관점에서 수학 일반을 묘사한다. 달리 말하면 그에게 수학은 존재론적이라기보다는 인식론적이다.
자연스럽게 허준이는 수학과 시학 사이의 상동성을 강조한다. 수학이나 시학이나 패턴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상상력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뜻이다. (사실 인식론의 관점에서 존재에 간접적으로 접근할 때 최종에 미학을 호출하게 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그러나 그 또한 인정하듯 수학과 시학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수학이 알 수 없이 복잡한 것을 공리의 형태로 간명화하는 과정과 같다면 시학은 모두가 다 안다고 여겼던 것을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수학과 달리 시학의 경우 패턴의 발견 이후에 다시 한번 복잡성을 불러들인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하면, 시는 수학적 패턴을 전제하지만 동시에 그 패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낯설게 만들며 그 자신만의 은유 체계를 구성하고자 한다. 여기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미 초월론적 상상력을 다루었던 칸트가 어째서 [판단력비판]이라 불리는 미학서를 나중에 다시 하나 더 쓰게 되는지 그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칸트의 제3비판서는 수학적 셈하기에 기초한 상상력이 계속해서 영원히 유지될 수 없다는 말과 같지 않은가? 예컨대, [판단력비판]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수학적 숭고 개념이다. 수학적 숭고는 인간의 직관이 시공간적으로 현상을 온전히 수학화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너무 많은 수학적 데이터-현상이 발생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수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 제3비판서에서 칸트가 내리는 결론이 참고가 될 수 있다. 칸트의 종착역은 숭고가 아니다. 그는 아름다움의 세계 속에 머물고자 한다. 그리고 그에게 아름다움은 도덕적 상징으로서의 아름다움이다. 이것이 칸트가 수학적 상상력으로부터 '도덕적 인간'을 세공해내는 방식이다. 그에게 미학은, 수학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다. 21세기의 문제는 18세기에 칸트가 세웠던 인간학이 무너지고 있다는 데 있다. 오늘날 인간과 함께 자연은 도덕의 세계로 가는 게 아니라 멸종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도덕적 상징으로서의 미학적 인간이 무너지는 자리에서 발견되는 것은 무엇일까? 주체(the Subject)가 그것이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주체는 심리화된 인간 신체와 동일어가 아니다. 주체는 미학적 상상력 이전에 위치한 수학의 초월론적 상상력과 훨씬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동시대 철학이 미학이 아니라 수학을 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다. 물론 인간학이 무너지는 시기, 미학적 인간의 폐허 속에서 미학적 살결을 상실한 주체가 유령과 같이 드러나는 시기는 기회의 시기이자 동시에 위기의 시기이기도 하다. 그 한 예를 살아있는 소의 가죽을 벗기는 법사들-도사들의 주술적 야만을 상상력이라 부르는 행태, 그러한 자들을 용인하는 감수성의 만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비인간학 혹은 인간이 아닌 것에 대한 사유를 전개하고자 할 때 수학을 배제하는 일이 위험한 이유가 여기 있다. '사주팔자'식 신비주의 유물론이 활개치는 곳에서는 폭력과 야만이 문명과 구분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굿판에서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소의 신체에 대응하는 21세기 대중문화적 판본의 하나는 '좀비'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무당이 벌이는 굿판에 혹할 정도는 아니라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굿판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도회적으로 세련된 시공간 속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미학적 살결이 이미 반쯤 썩어 문드러진 신체를 지닌 채 살아가는, 반은 죽었고 반만 살아있는 '미생'으로서의 젊은이들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들, 반은 죽고 반은 산 신체들의 21세기식 행렬이 18-19세기식 미학적 인간보다 더 나은 세상을 열 것이란 보장은 전혀 없다. 좀비는 그저 가능성의 한 표현일 뿐이다. 물론 가능성은 소가죽 벗기는 '법사'의 굿판 행렬로 나아갈 가능성이기도 하다. 일베식 감수성이 10-20대 사이에서 퍼져가는 방식을 보라. 신체적 젊음은 그 자체로 희망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젊은 신체 내부에서도 얼마든 좀비화가 일어날 수 있다. 수학과 함께 주체의 문제를 다루어야하는 것은 좀비를 주어진 그대로 두는 것이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요점은 좀비를 전혀 다른 생명으로 재생시키는 데 있지 좀비를 그 자체 새로운 인류의 미래로 제시하는 데 있지 않다. 젊음은 단순한 동물적 신체--때로는 생장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썩어가기도 하는 동물적 신체--의 문제가 아니다. 젊음 혹은 생명은 사유 방식의 문제, 즉, 정신(Spirit)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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