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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소설, 시간의 외부, 과학외부소설

by spiral 2022. 6. 24.

1997년에 발표되었건만 지금까지 버브(The Verve)의 "Bitter Sweet Symphony"의 뮤직비디오를 한번도 눈여겨본 적이 없었다. 다시 보니 긴장감이 넘친다. 사회화되지 않은 인물이 비타협적으로 살아가는 아슬아슬한 방식을 이토록 간결하게 보여줄 수도 없을 것이다. 세간의 평 따위 전부 무시하고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 그러다 멋지게 동료들과 합류하며 끝난다. 그 모습이 마치 독수리 오형제 혹은 기타등등을 보는 것만 같다. 낭만이 현실을 압도하는 엔딩이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아래 비디오에는 또 다른 판본이 있기도 하다. 해당 판본에서는, 아니나 다를까, 막무가내로 걸어가다 막판에 길거리에서 양아치들한테 얻어터져 코피를 쏟는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 걸어간다. 비웃는 주변의 시선이 느껴진다. 동료를 만나지도 못한다. 혼자서 아무도 없는 곳으로 비몽사몽 걸어들어가며 끝난다.

두 판본의 차이는 낭만주의와 리얼리즘 사이의 차이라고 할 만하다. 두번째 판본의 비몽사몽식 엔딩은 리얼리즘 이후 상징주의-유미주의 문학이 나오게 되는 방식과 궤를 같이하기도 한다. 낭만주의 혹은 리얼리즘, 어느쪽이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음과 같은 말 정도는 해볼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소설에서 18세기 말 및 19세기 초에 등장했던 프랑스혁명기적 주관성을 대표하는 인물은 탐정의 수배 대상, 예컨대, 살인범으로 그려지게 된다. 혁명은 '테러'를 수반하지 않던가? 이것이 영미권에서 탐정소설이 발생하는 방식이다. 탐정소설은 리얼리즘 소설의 한계를 초과하는 낭만주의적-주관적 인물에 대한 수습책과 같다. 이는 [셜록 홈즈]와 같은 작품만 보아서는 파악하기 어려운 측면이다. [셜록 홈즈]는 탐정소설이 독립된 하나의 장르로 정착 및 완성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셜록 홈즈]는 탐정소설의 시발점이 아니라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언제나 그렇듯, 진정 흥미로운 것은 완성의 지점이 아니라 발생의 지점에 놓여있다. 지금의 세계를 알고자 한다면 세계의 기원으로 되돌아가야한다. 너무도 많은 것들이 혼재되어 있어 그 무엇도 분명하지 않았던 시점, 그리하여 후에 질서에 의해 '없는 것'으로 취급되어야만 했던 세계의 기원으로 말이다. 세계의 기원에 있는 것은, 그렇기에, '역사'가 아니다. 현재를 알기 위해 과거를 조망하고자 할 때 우리는 첫째로 '역사'라는 것을 얻게 된다. 그러나 역사조차 추상화되며 사라지는 지점이 있다. 해당 지점을 탐구하는 학문을 전통적으로 철학이라 불러왔다. 반면 오늘날 해당 지점을 탐구하는 학문은 과학이라 불리기도 한다. 천문학 및 이론물리학, 그리고 수학이 그것이다.

문학연구 방법론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보자. 문학 연구자에는 두 부류가 있다. 첫째는 문학 역사가 부류다. 이들은 역사의 관점에서 문학에 접근한다. 한 예로, 20세기 중반 이후 문학 연구 분야에 있어서 이론적 접근법이 대유행을 하기 전에는 구역사주의라는 게 있었다. 역사를 일종의 시대 정신의 인본적 발현으로 이해한 접근법이었다. 구역사주의 속에서 문학작품은 시대 정신 혹은 자유주의적 개인의 도덕성이 개진되는 한 가지 영역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탈구조주의 등이 단일한 역사 이해를 뒤집어 놓은 후 역사주의는 신역사주의로 진화하게 된다. 역사는 하나의 큰 서사가 아니라 수많은 작고 다양한 서사로 이루어져있다는 발상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온갖 잡다한 미시사 연구가 이로부터 가능하지게 된다. 예컨대, 맥주의 역사, 맥주의 관점에서 본 세계사적 사건들, 화장지의 역사, 여권의 역사, 이러한 것들이 전부 신역사주의 이후의 산물이다. 신역사주의 문학연구 역시 작은 디테일에서 시작해서 과거 있었던 맥락을 국지적으로 복원하여 조망하고자 한다. 여기서 중요하게 등장하게 되는 키워드가 푸코적 의미의 권력이나 감시, 훈육, 통치 등의 주제다. 작은 디테일은 시대 정신을 대변하지 않는다. 디테일은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들의 연합과 같다. 권력, 통치, 담론 등은 전부 시대 정신이 자잘하게 분기될 때 나오게 되는 키워드들이다. 마찬가지로 시대 정신의 구현자 자유주의적 인간-개인을 개체군이라는 개념이 대체하게 된다.

문학연구의 주류는 지금까지 '역사'를 내세워왔다. 이는 문학을 신학의 반대로 규정한 결과다. 즉, 문학은 인본주의의 결과물로 여겨진다. 셰익스피어 등으로 대변되는 르네상스 문학을 생각해보라. 섹스하고 번식하는 신체들의 이야기가 '섹스리스' 기사도 문학를 대체하게 된다. 사랑은 플라토닉 러브가 아닌 에로스의 문제다. 에로스는 말할 것도 없이 개체군 및 생명정치의 시작을 이룬다. 개체군이 모여 방향성 없는 작은 이야기들을 써내게 된다. 개체군은 인본주의적이지 않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그리고 순간적으로는 여전히 인본적인 구석을 포함한다. 이성적 사고를 하는 것을 인간으로 규정하든 섹스를 하고 번식하는 것을 인간으로 규정하든 그러한 활동의 중간에 생물학적 신체를 지닌 인간이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연구자들이 문학을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래서일까 미국 한인 교회의 목사가 내 전공을 듣고 대뜸 내가 신학적 층위에 반발하는 인본주의자일 것이라 여겼던 적이 있다. 틀린 말만은 아니다. 난 인간의 층위를 결코 간과하지도 건너뛰지도 않는다. 그러나 올바른 말도 아니다. 왜냐하면 난 문학을 시간의 외부로부터 접근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문학 연구자 부류는, 문학 역사가가 아니라, 문학 이론가라 불린다. 오늘날 이 부류는 주류가 아니다. 왜냐하면 근본에 있어 문학 이론가 부류는 플라톤적 관점에서 역사의 흐름을 정지시키고자 하는 충동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이는 생명이 정지하는 지점을 탐구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소리에 대비된 침묵, 빛에 대비된 암흑, 경험에 대비된 선험 등을 떠올려볼 수 있다. 과학의 언어로 하자면, 이는 생물학 이전에 화학이, 화학 이전에 물리학과 수학이 있다는 말과 같다. 사실 우주의 기본값은 생명이 아니다. 생명의 부재, 즉, 인간이 흔히 죽음이라 부르는 먼지 상태가 우주의 기본값이다. 생명은 그 자체로 예외 상태다. 꼭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 발생한 상태가 생명이다. 그렇기에 죽음에 대한 접근은 보다 과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생물학 이전의 화학, 물리학, 수학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관점에서 말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이 열역학 제2법칙의 관점에서 이해한 죽음의 문제다. 즉, 생명은 그 자체로 엔트로피의 법칙을 거스르는 예외 상태다. 우리는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르고 있는 한에서 살아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흔히 생명을 기적이라 부른다. 물론, 기적은 너무도 쉽게 암세포에게 길을 내주고 말기도 한다. 암세포는 생물학적 기적이 열역학 제2법칙으로 복귀하도록 안내하는 생물학 내부의 비생물학적 길잡이다. 물리학과 화학의 관점에서 보기에 생물학은 참으로 나약한 기적이지 않은가? 다른 한편 인본주의자는 암세포와 함께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곳에서 자연과학을 건너뛰며 대범하게도 도덕적 상징의 세계를 불러낸다. 말하자면, '그가 암으로 죽은 것은 시대 정신을 거스르며 생전에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이다. 역사의 시간은 전능한 존재 혹은 이성적 존재가 보증하는 도덕의 상징 및 시대 정신의 구현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것이 구역사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자연과학으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 오늘날 인본주의자들이 시대에 걸맞는 이야기를 내놓지 못하게 된 것은 인본주의가 자연과학으로부터 너무 멀리 달아났기 때문이다. 다시 과학으로 돌아가서 시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자연과학은 시간의 흐름을 엔트로피가 증가해가는 과정의 불가역성에서 찾는다. 말할 것도 없이 엔트로피-시간은 역사의 시간 외부에 있다. 엔트로피-시간은 모든 인간 문명을 우주의 먼지로 되돌린다. 역사-시간를 와해시키는 것이 엔트로피-시간이다. 달리 말하면, 엔트로피-시간이 역사-시간으로 침투해들어오면 '사건' 혹은 단절이 발생하게 된다. 여기서 시간의 외부가 엔트로피-시간 자체도 역사-시간 자체도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시간의 외부는 인본적 역사-시간이 비인본적 과학-시간과 조우하게 될 때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정지 지점을 일컫는다. 역사의 역사성은 모든 것이 얼어붙는 바로 이 정지 지점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영겁 회귀의 시간이기도 하다. 많은 철학자들이 시간이 근본에 있어 직선의 흐름이 아닌 반복의 형태를 띤다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영원'이라 부르는 것은 반복의 형식 자체를 가리킨다. 

오늘날 20세기식 문학이론은 죽었다. 문학이론이 죽은 자리에서 자라는 것은 흔히 신학의 영역을 벗어나 계몽된 인간이 만들어내는 '문화' 및 '역사,' 혹은 계몽된 이성적 인간상의 단일성에 저항하는 다양한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다문화' 및 미시 역사'들'이다. 그러나 개체군으로서 인간이 만들어내는 역사들은 이미 자연과학적이기도 하다. 개체군 이론 자체가 다윈 등으로 일컬어지는 생물학으로부터 오지 않았던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말을 해보고 싶다: '21세기에 미시 역사들을 다시 문학이론의 영역으로 되돌리는 것은 자연과학이다.' 20세기 역사가들과 문학 연구자들이 열심히 '큰 이야기'를 '해체'하고 있었을적 그 옆에서는 과학자들이 여전히 전우주적으로 거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1980년대 불었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Cosmos) 열풍이 대표적이다. 지구를 '창백한 푸른 점'(a pale blue dot)이라 이름 붙인 세이건의 감수성을 생각해보라. 그는 온갖 미시사'들'이 자라는 지구라는 공간을 단번에 단일한 '점'으로 환원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거대한 식견 앞에서 인간 역사'들'의 하찮음을 자각하며 탐복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칼 세이건을 비롯한 많은 천문학자들은 외계의 지적 생명체와 조우하기를 희망하며 세티(SETI: 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동일한 관점에서 1977년 보이저호(Voyager)에 인류 문명의 온갖 증표를 실어서 우주로 보내기도 했다. 외계 생명과 조우하고자 하는 우주 공간 속에서 인간 역사'들,' 문화'들,' 성'차,' 계급'차' 등은 단번에 '지구'라는 '창백한 푸른 점'의 형태로 승(昇)화 혹은 강(降)화된다. 보이저호는 태양계를 벗어나 지금도 계속해서 지구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다. 21세기에 문학연구는 보이저호가 가리키는 곳을 참고해야한다. 탐정소설 다음에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이 오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날 과학소설은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가 말한 바 과학외부소설(extro-science fiction)의 관점에서 접근되어야한다. 거대하고도 일관된 이야기, 즉, 코스모스(cosmos)를 추구하는 과학은 어디까지나 질서 이전의 카오스(chaos)에 기반하고 있다. 21세기에 문학연구는 더 이상 '역사' 안에 머물기 위한 것일 수 없다. 21세기 문학연구는 역사 자체를 발생시키는 시간의 외부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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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an Hymns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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