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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비지: 컴퓨터의 아버지 혹은 철 없는 아이

by spiral 2022. 11. 9.

분석학회(the Analytical Society)의 설립자로 알려진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라는 19세기 영국의 수학자에 대해 좀 이야기해보자. 요점은 당시 수학자가 단순히 수학만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보는 데 있다. 뉴턴 이후 수학이 '물리학의 언어'가 되었다는 점을 기억하라. 수학으로 물리 현상을 이해하게 되면 물리적 현실에 개입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배비지가 발명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이와 조금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그는 애디슨처럼 발명품을 많이 만들었다. 그의 발명품 중에는 기차 앞으로 달려드는 소를 잡기 위한 장치도 있었다. 이는 그가 순수수학만 한 것이 아니라 응용 수학자이기도 했다는 뜻이다.

물론 배비지의 분석학회는 수학의 영역에서 영국의 전통인 뉴턴의 미분법을 버리고 라이프니츠의 미분법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뉴턴은 캠브리지 출신이었고 그 자부심에 캠브리지 대학의 수학 교육은 뉴턴 전통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캠브리지는 유럽 대륙의 수학으로부터 멀어지게 됐다. 그 결과 19세기에 오면 캠브리지 대학의 수학은 후진적이라 여겨지게 된다. 같은 캠브리지 출신이지만 배비지가 분석학회를 만든 것은 캠브리지 전통에 대해 반발과 같았다.

라이프니츠 미분에 기반하여 발전한 유럽 대륙의 수학은 실은 수학이 물리학의 언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 결과의 하나가 해석학(analysis)의 등장이다. 사실 라이브니츠의 미분법도 수학적으로 엄밀하지 않기는 뉴턴의 미분법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론적 측면에서 사실상 대강 '퉁치고' 넘어간 구석이 있었다. 물리적 현상을 설명하는 게 목적이라면 대강 넘어가도 된다. 그러나 수학적 엄밀함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결과 발전하게 되는 것이 해석학이다. 한 예로, 미분의 수학적-이론적 엄밀함은 카를 바이어슈트라스(Karl Weierstrass)에 와서 완성된다. '엡실론-델타 극한 정의'((ε, δ)-definition of a limit) 말이다.

해석학과 함께 수학은 물리성의 세계와 작별을 하게 된다. 수학적으로 완벽한 세계는 이산적이다. 그러나 물질의 세계는 연속적이다. 엡실론-델타 정리는 이 둘을 완벽히 통합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는 수학 입장에서의 생각이다. 이론적으로 완벽하게 닫힌 세계는 상징주의적이 된다. 이것이 19세기 중반 영국 수학이 나아가게 되는 방향이다. 어거스터스 드 모건(Augustus de Morgan)이나 조지 불(George Boole)의 대수학(algebra)이 대표적이다. 이 단계에 가면 수학은 순수한 사고의 문제가 된다. 지상에는 없는 낙원에 대한 사고와 비슷하다. 물질의 연속적 세계와 보조를 맞추는 것과 같은 귀찮은 일은 알 바가 아니다. 그냥 수들의 천국으로 가면 된다. 적어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Gödel's incompleteness theorems)가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다시 배비지로 돌아가자. 배비지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물질성의 세계와 관계를 맺었다. 그가 흔히 '컴퓨터의 아버지'라 불린다는 점을 기억하라. 그는 차분기관(the Difference Engine)이라는 것을 설계했다. 이는 로그표 등을 오류 없이 작성하기 위한 기계였다. 컴퓨터가 없었던 시절 사람들은 계산 과정을 돕기 위해 로그표가 살린 책을 참고했다. 문제는 당대의 많은 로그표가 서로 어긋나더라는 데 있었다. 어느 쪽이든 틀린 구석이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누가 틀렸는지 알 길은 없었다. 배비지는 이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로그값을 계산하는 기계를 만들어 단 한치의 오류도 없이 표를 만들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물리적 기계를 만드는 수학자, 이게 배비지가 현실과 관계를 맺은 방식이다.

당시 로그표 등은 '컴퓨터'라 불리는 사람들이 다항함수(polynomial) 값을 유한차분(finite difference)에 바탕하여 기계적으로 계산하여 만든 것이었다. '컴퓨터'라는 말이 여기서 처음 나오게 된다. '컴퓨터'는 그저 '계산하는 사람'을 뜻했다. 여기서 핵심은 그들 '컴퓨터'가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말한 노동의 분업 개념에 기반한 결과와 같았다는 데 있다. 즉 '컴퓨터'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원리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마치 컴베이어 밸트 앞에서 기계적으로 나사를 조이는 일을 하듯, 표를 만들기 위해 기계적으로 주어진 수를 더하는 일을 할 뿐인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이 수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반감의 근원적 형상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수학은 기계적이라는 생각 말이다. 대학 수학과에서 이루어지는 수준에까지 이르지 않을시 남겨지는 수학의 모습이란 게 근본에 있어 이와 다르지 않다. 영문도 모른 채 기계적으로 공식에 따라 문제를 풀고 있는 모습 말이다. 물론 중고등학교 단계에서도 최소한도로라도 원리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수학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단계에 이르는 학생은 극히 소수다. (학생 자신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좋은 수학 멘토를 만나야만 가능한 일이다. 교육기관으로 치자면 '과학고' 정도 가야 제대로 된 수학 멘토링을 받을 수 있지 싶다. 혹은, 이해를 위해 학생 스스로 과외로 인터넷을 뒤지거나 교양수학 서적 등을 참고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나머지는 어리둥절 기계적으로 문제 풀이만 하다가 참지 못하고 집어치우고 만다.

물론 19세기 초반까지 유클리드 기하학을 중심으로 수학 교육이 이루어지던 시절에 영국에서 수학은 기계적 학문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애당초 유클리드 기하학은 수를 기계적으로 계산하는 학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내적 이해가 더 중요한 학문이었다. 한 예로, 유클리드의 [원론](The Elements)을 보면 수가 나오지 않는다. 모든 요점은 그저 공리로부터 시작하여 논리적 사고를 전개하는 데 맞추어져있다. 그렇기에 논리력을 통해 자연스럽게 인간의 지성을 함양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학문이 없다고 여겨졌다. 더불어 유클리드 기하학은 플라톤적 형상-이데아와 인간의 경험적 직관이 조화롭게 만나는 완벽한 학문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비유클리드 기하학 및 대수학의 발전과 함께 순수수학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바뀌게 된다. 수학이 현실로부터 떨어져나오며 난해해지자 수학을 이해하여 구사하는 수학자와 그저 공식에 따라 기계적으로 계산만 하는 일반인 사이의 구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수학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징적 관례나 관습을 건너뛰고 자기만의 수학적 세계로 널뛰기해서 가버리기 일쑤였다. 수에 집착하는 배비지의 성격이 이미 그러한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그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 중 하나는 영국의 계관시인(poet laureate) 자리에까지 오른 이른바 '대문호'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의 시를 읽고 그가 보냈다는 편지와 관련이 있다. 다음은 그가 썼다고 하는 편지의 내용이다:

선생님께, 선생님께서 쓰신 시 "죄의 비전"은 한 가지 점을 제외하고는 아름답습니다. 해당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매순간 인간이 죽고, 매순간 인간이 태어난다." 만약 이 구절이 사실이라면 세계의 인구에는 변동이 없을 것이란 점이 분명해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출산율이 사망율보다 조금 높습니다. 시집의 다음 판본을 내실 때 이렇게 바꿔보실 것을 제안드립니다: "매순간 한 명의 인간이 죽고, 매순간 1과 1/16의 인간이 태어난다." 정확한 수치는 너무 길어서 한 줄로 표기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1과 1/16이라는 수치가 시에 사용하기에는 충분히 정확하다고 믿습니다
Sir: In your otherwise beautiful poem "The Vision of Sin" there is a verse which reads--"Every moment dies a man, Every moment one is born." It must be manifest that if there were true, the population of the world would be at a standstill. In truth, the rate of birth is slightly in excess of that of death. I would suggest that in the next edition of your poem you have it read--"Every moment dies a man Every moment 1 1/16 is born." The actual figure is so long I cannot get it onto a line, but I believe the figure 1 1/16 will be sufficiently accurate for poetry.

 

최근 연구에 따르면 그가 썼다고 여겨지는 위의 편지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배비지라면 저런 편지를 쓰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배비지가 한 것은 '시의 수학화'라 할 만하다. 위의 편지에서 그는 통계학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철 없는 아이' 같이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이공계 학생을 대상으로 문학을 가르치다 보면 동일한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중세 영웅서사시 "베어울프"(Beowulf)를 읽는데 그가 사용한 '무적의' 칼이 실제로 무적일 수 없다는 점을 재료공학적 관점에서 물리적으로 반박하겠다는 학생의 페이퍼를 받아본 적이 있다. 이보다 더 비근한 예로 이공계생은 SF 영화를 보면서 '이 장면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왜냐하면 . . . '이라면서 영화를 아이와 같이 따지느라 정신이 없는 경우가 많다. 혹은, 예컨대, 영화 [인터스텔라]가 과연 제대로 물리학 이론에 기초한 것인지 따지느라 정신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전제는 영화 분석과 물리학 분석이 동일한 것이라는 것이다. 물리학 분석 혹은 재료공학 분석을 마치고 나면 영화 분석이 다 끝날 것이라는 생각과 같다. 즉, 이들에게 영화가 가지고 있는 내러티브적 상상력과 인간 도덕의 세계는 물리학, 생물학, 생리학, 재료공학 분석 등에 의해 타파되어야할 '미신'의 영역이다.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느껴 자신의 '죄 많은 인생'을 의미론적으로 돌아볼 때 자식이 위로랍시고 '현재 사망율은 출산율보다 높으며 누구나 죽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내가 이 철 없는 것을 두고 어떻게 죽나'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자식으로 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것이지 않을까? 어떤 면에서 우영우는 21세기 배비지와 같다. 전문성은 갖추었으나 교양은 갖추지 못한 전문직 종사자들의 자화상 말이다. 의미론의 세계에 들지 못한 채 법학, 생리학, 기계공학, 컴퓨터공학 등의 전문지식만으로 살아가게 된 사람들의 자화상 말이다. 동일한 현상의 또 다른 판본을 '키덜트' 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차분기관을 만드는 배비지와 레고로 거대한 성을 만들며 행복을 느끼는 키덜트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후에 배비지는 차분기관 이외에도 분석기관(the Analytical Engine)이라는 것을 설계하게 된다. 그의 '분석기관'은 범용 컴퓨터(general-purpose computer)의 시초와 같이 여겨진다.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 컴퓨터 기술을 혁신한 인물은 대체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일종의 키덜트들이라는 것이다. 즉, 컴퓨터는 세계 자체를 대체하기 위한 유토피아적 기술로서 도입된 면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사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우영우는 자신의 '이상함'을 자각한다. 그리고 조금씩 변화한다. 그리고는 아버지 친구의 힘으로 취직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에게 '왜 저를 좌절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습니까?'라고 항변한다. 멋진 일이다. 백날 '죄 많은 인생'을 논할 뿐인 부모도 때때로 답이 없다고 느껴지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자신이 구축한 의미론의 세계에 갇혀 비극을 상연하다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고 죽기를 택하던가? '이 경우에는 이렇게 저렇게 해야한다'고 해법을 제시하면 그들은 마지막 순간 '냅둬라,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으련다!'고 항변한다. 그들의 세계관에 따르자면 세월호가 침몰하는 것은 막을 길이 없는 일에 불과하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압사하는 것은 막을 길이 없는 일에 불과하다. 세계의 모든 현상이 체념적 운명론으로 환원된다. 이쯤되면 의미론은 미신의 세계가 된다. 청와대는 무서운 곳이니 용산으로 도망치라고 조언하는 무속의 세계를 생각해보라. (이런 것을 전근대 후진국 세계관이라 한다.) 이 순간 등장해야 마땅한 것이 배비지이고 수학이다. 탈신비화하는 수학의 기계성 말이다. '헛소리 말고,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된 것인지 그 인과관계를 수학적-기계적으로 분석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어!'라는 외침 말이다. 로그표에 발생한 오류를 바로잡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차분기관을 만든 게 배비지이지 않았던가?** 

난 수학자 배비지에게서 교양 없는 '철 없는 아이'를 발견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인문학은 물질 세계를 초월하며 작동하는 의미론의 세계를 소중히 여긴다. 즉, 교양과 삶의 의미를 소중히 여긴다. 이 점에 있어 인문적 교양은 비인문적 수학과 대조된다. 그러나 인문학은 단순히 의미론을 신봉하는 학문이 아니다. 한 예로, 난 배비지의 '애비애미도 없이 자란' 모습에 매료된다. 사실 본연의 인문학은 의미론이 내파되는 지점을 고찰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비인문학은 인문학 내부에 있다. 인문학이 수학과 자연과학을 사유대상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인간은 수학과 자연과학에 의해 타파되지만 동시에 수학과 자연과학으로부터 다시 태어난다. 오늘날 인문학이 소위 전문직 종사자들을 사유대상으로 삼아야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인간의 인간성이 좌초하는 지점과 같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새로운 존재자 양식이 출현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들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새로운 종이 출현하는 장소와 같다. 오늘날 배비지들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추적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19세기 인물인 배비지는 오늘날 단순히 '철 없는 아이'가 아니라 '컴퓨터의 아버지'라 여겨지지 않던가?

*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기가막힐 정도로 초라한 내러티브적 요소가 우영우의 아버지가 전개시키는 구태의연한 '출생의 비밀 플롯'에서 기인하지 않던가? (거꾸로 말하면, 해당 작품의 매력과 참신함은 전적으로 '철 없는 아이' 우영우에게서 기인한다. 반면 작품의 구질구질함은 어른들이 지닌 구태의연하고 낡아빠진, 닫힌 의미론적 세계관에서 기인한다.) '아이만 낳아주면 내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게'라는 순정에서부터 시작하는 찌질한 그의 삶이 지닌 의미론적 구조를 보라. 물론 중간에 그는 '그러나 내 딸 건드리면 나 더 이상 못참아'라는 전환을 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초라한 '출생의 비밀 플롯'을 크고 웅장하게 끝까지 밀고 나가겠다는, 요즘 시쳇말로 하자면, '하드캐리하겠다는' 내러티브적 우둔함의 산물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달리 말하면, 플롯은 의미론을 완결시키는 서사적 장치다. 이 때문에 장르화된 플롯이 강해지면 작품이 유치해지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의 가장 반대편에 있는 것이 모더니즘 소설이다.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나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작품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들 작품을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 이유가 여기 있다. 한편, 플롯 중심 작품과 모더니즘의 중간 단계에서 발견되는 작가로 헨리 제임스(Henry James)를 들 수 있을 것이다. 

** 수학은 분석과 시스템의 문제다. 선진화된 근대 사회는 시스템에 의한 사회를 뜻한다. 수학이 없는 곳에서 자라나는 것이 전근대적 미신에 홀린 운명론적 사고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기소권의 야만적 힘을 주술적으로 신봉하는 권력자의 등장과 함께 수학적 시스템을 잃어가고 있다. 이것이 한국 사회가 후진국화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예컨대 '압사'는 신체가 시스템 하에서 적절하게 관리되어 거리가 유지되지 않을 때 일어난다. 신체와 신체가 서로 물리적으로 직접 맞닿을 때 서로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을 통하는 것이다. 거꾸로 사랑이라는 매개를 얻지 못했다면 신체와 신체는 직접 만나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사랑 없는 신체 접촉은 서로에게 물리적 폭력으로 작동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만남은 주먹질을 하는 만남과 같다. 그보다 더 나아가면 서로의 육신이 서로의 숨결을 끊어놓는 중압감-무게로 작동하게 된다. 그것이 '압사'를 정의내리는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후진국의 공간 속에서 신체는 시스템에 의해 배열되어 있지 않다. 예컨대, 그곳에는 경찰 통제에 의한 공간의 구획이란 것이 없다. 전근대 주술 행위에서 생명을 제물로 삼는 폭력적 제의가 빠지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희생양 제의는 서로 직접 부딪쳐 서로에게 상해를 가하는 신체를 주술적으로 상징화하는 과정과 같다. 폭력적 신체의 만남 그 자체를 상징화함으로써 죽은 자들의 원혼을 달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여기서 모든 일처리는 사후적이다. 즉, 주술행위는 사고가 난 후 죽은 자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과정으로 도입된다. 여기서 초점은 과거와 죽은 자에 맞추어진다. 반면 선진국의 수학적 시스템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여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도입된다. 수학은 죽음이 없는 세계를 꿈꾼다. 이것이 푸코(Michel Foucault)와 같은 사람이 묘사하는 근대적 '생명정치'(biopolitics)의 한가지 특징이다. 수학은 생명의 문제이지 죽음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반대로 수학적 시스템에는 '빅브라더'라는 문제가 따라다니기도 한다. 영화 [마이러리티 리포트]에서 보듯 범죄자는 범죄 행위를 벌이기 전 감옥에 가두어진다. 살인은 일어나지 않는다. 수학과 함께 사람은 죽지 않게 된다. 이 때문에 선진국 문화에서 관건은 거꾸로 죽음을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것에 맞추어진다. 반면 후진국 문화에서는 때이른 죽음이 실제로 물리적으로 일어난다. 그에 따라 애도의 문화가 중심에 오게 된다. 죽음을 사유할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직접 치룰 것인가? 이것이 '선진국이냐 아니면 후진국이냐'의 문제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죽음의 사유냐 죽음의 체현이냐'의 갈림길에서, 혹은 '수학이냐 주술이냐'의 갈림길에서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가고자 마음을 먹을 것인가? 굿판에서는 살아있던 소조차 가죽이 벗겨져 죽임을 당한다. 그후 관객은 막연하게 죽은 자의 과거를 기리며 애도하게 된다. 반면 수학은 죽었던 인간조차 되살리고자한다. 인공지능과 함께 걷기 시작하는 기계의 이미지를 생각해보라. 죽은 자의 부활은 미래 세대가 과거 세대와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는 주술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될 때 찾아온다. 수학적 분석은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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