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된지 27년이 지난 오아시스의 "샴페인 슈퍼노바"를 들으며 세쳇말로 '가슴이 웅장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아무렴 노래는 이런 거지'라고 느낀다. 그리고는 내가 결코 크게 공감할 수 없었던 내 선배 세대의 슈퍼스타들을 떠올린다. 솔직히 난 비틀즈가 그렇게 좋다고 느낀 적 없다. 그들의 음악과 내 영혼이 공명한 적 단 한번도 없다. 내 앞 세대의 곡을 진정 내것으로 들으려면 재즈나 클래식으로 가야했다.
내가 듣는 클래식 음악은 18세기까지 거슬러간다. 바하가 대표적이다. 오래된 음악이지만 난 내 영혼이 바하와 상당 부분 공명하는 것을 느낀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클래식 음악은 동시대 연주자에 의해 계속해서 새롭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조성진에 이어 임윤찬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의 정서를 생각해보라. 조성진이 오늘날의 10대 및 20대에게 쇼팽을 듣는 법을 알려주었다면 임윤찬은 라흐마니노프를 듣는 법을 알려주었다고 말해볼 수 있다. 요점은 이들 이전에도 쇼팽은 항상 있어왔다는 것이다. 라흐마니노프도 마찬가지다. 차이는 내게 쇼팽은 에프게니 키신이었고, 라흐마니노프는 백건우였다는 것이다.*
클래식은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방식과 같다. 전통은 현재에 반복되는 과거의 형식이다. 예컨대, 지금의 50-60대는 5.18을 통해 4.19를 비로소 체감하여 이해할 수 있었다. 4.19 세대는 항일 독립 운동을 4.19를 통해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항일 독립 운동 세대는 동학 농민 혁명을 20세기 초반 그들의 국가를 잃은 현재적 상황을 통해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동일한 전통의 가장 최근 형식은 2017년 촛불혁명이라 불린다. 과거는 현재의 물질성을 재구성하는 형식의 이름, 혹은 의미의 지평이다.
클래식은 계속해서 되돌아오는 오래된 것(the old)의 문제다. 그러나 팝음악은 성질이 다르다. 한 예로, 난 팝음악에 관해서 만큼은 어린 시절 동시대의 맥락에서 새롭게 등장하던 것들을 들은 경우만이 진정 내것이라 느낀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그들 동시대 음악가들이 해주었기에 내것과 같이 느낀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좋은 예다. 그는 길을 잃은, 신경질적이고 때로는 자학적 감수성을 내보이기도 하는 1990년대식 10대 감수성의 대변인이었다. 코베인의 음악은 코베인의 정제되지 않은 목소리로 불리워져야만 의미를 지닌다. 그의 곡을 번안하여 클래식으로 반복하는 것은 어딘지 요점에 맞지 않는 일이 되어버린다. 1990년대라는 시대와 불화하는 그의 날것의 목소리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팝음악의 핵심은 동시대성 혹은 새로운 것(the New)을 선언하는 데 있다. '앞선 세대와 우리는 다르다'는 자의식이 없는 음악은 팝음악이 아니다. 팝은 전통에 대한 도전이라는 태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팝은 오래된 것에 묻힐 위기에 처한 새로운 것이 거칠게 그 자신을 주창할 때 잠시 나타나는 파열음과 같다. 그렇기에 만약 팝이 번안과 재해석을 통해 전통이 되고자 한다면 더 이상 팝이 아니게 될 것이다. 오래된 것 혹은 클래식이라 불릴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거꾸로 전통이 사라진 시대에 팝음악의 취지는 불가능해진다. 불화할 전통이 없으면 파열음이라 불리는 동시대성도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에서 1990년대 팝음악은 1980년대 민중가요적 맥락 속에서 그 자신의 파열음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1990년대 팝음악을 사랑했던 이유는 팝음악이 무겁고 진지한 그 어떤 전통도 담아내고 있기 않았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서 팝음악은 '전통적 감수성'에 대비된 '날라리 감수성'에 기반하고 있다. 그 어떤 삶에 찌든 문제도, 그 어떤 투쟁적 삶의 양식도 팝음악의 감수성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1980년대식 엄마 잃은 둘리나 하니의 감수성이 근본에 있어 팝적이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다. 팝은 '아비어미도 없이 자란' 근본 없는 음악이다. 그러나 둘리나 하니와 달리 팝은 그 자신의 고아와 같은 처지에 대한 자의식을 하나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래서 '날라리 감수성'과 같이 작동하게 된다. 1980년대 둘리나 하니와 함께 한 기억을 지닌 자가 1990년대 날라리 팝음악에 열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둘리 같이, 하니 같이 사는 것은 근본에 있어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반면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은 삶의 무게를 고찰하지 않는 날라리 팝음악이 전통을 완전히 집어삼킨 모습이다. 오늘날 주류 팝음악 시장에서 대체 누가 엄마 잃은 자의 슬픔을 노래하는가? 근래 조금이나마 진지한 고찰을 담은 음악은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오늘날의 둘리들, 하니들인, 인디 팝-포크 음악가에게서나 발견된다. 정우라는 음악가의 "철의 삶"이라는 곡을 생각해보자. "내가 죽길 바라는 이 세상에서"라는 가사를 지닌 이 곡은 죽음이나 실존에 대한 고찰이 사라진 오늘날의 주류 팝음악과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여기서 오늘날 기술적으로 몹시 세련되게 발전한 주류 팝음악이 더 이상 크게 매력적이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다고 말해본다면 어떠할 것인가? 둘리나 하니가 완전히 자취를 감췄기에 실은 팝음악이 매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지 않은가? 근래 낡아빠진 을지로의 가게들이 '힙'하게 재등장하는 방식을 생각해보라. 엄마 잃은 둘리나 하니가 가장 세련된 팝음악의 한 가운데서 다시 등장하게 될 날이 멀지 않은지도 모른다. 오늘날 '힙'한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낡은 것, 오래된 것, 사라져가는 것, 죽어가는 것이다.
근래 사라져가는 것들을 보존하는 한 가지 방식은, 말할 것도 없이, 생태학적 사유에서 발견된다. 생태학적 사유는 날라리 같은 팝음악 감수성의 발목을 잡으며 죽어가는 생명체들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을 뜻하기 때문이다. 생태학적 사유는 사라져가는 어머니와 관계한다. 자연이 흔히 '어머니 자연'이라 불렸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오늘날 전통은 생태학적 사고와 함께 다시 찾아온다. 둘리들, 하니들, 이들은 오늘날 멸종위기종이거나 혹은 이미 멸종된 종이다. 오늘날 시대의 최전선에 선 가장 예민한 음악가라면 가장 반자연적인 것 혹은 가장 새로운 것 속에서 사라져가는 자연의 흔적 혹은 가장 오래된 것의 흔적을 더듬고자 할 것이다. 이미 멸종된 종이라면 화석을 통해서라도 더듬어야한다.
* 백건우는 내 세대 연주자가 아니긴 하다. 사실 20년 전을 기준으로 내 세대가 우러르며 바라볼 만한 젊은, 예컨대, 키신 나이대의 한국인 스타 피아니스트는 찾기가 힘들다. 조금 아래 세대로 가면 임동혁을 들 수 있다. 20여 년 전 이미 그의 존재를 알고 있긴 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연주는 지금 스타 연주자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당시는 음반 녹음이 아니면 특정 연주자의 연주를 찾아듣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신출내기라 다양한 음반이 발매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에게 그의 연주장에 찾아다닐 만큼의 열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결과 그의 음악을 들을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러한 이유로 난 그의 음악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있지 않다.
** 2-30년 전을 기준으로 한국인 연주자는 정경화나 백건우 등 극소수를 빼고는 선진국의 메이저 클래식 레이블, 도이치그라모폰, 데카, EMI, 필립스, RCA, SONY 등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던지라 한국인 연주자의 음반을 구하기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백건우도 초창기에는 낙소스와 같은 마이너 레이블에서 음반을 내야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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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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