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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책의 집, 책의 컴퓨터

by spiral 2022. 5. 12.

공부하는 사람치고 자신의 집을 도서관으로 꾸미고자 하는 '로망'이 없는 사람은 없다. 아래 영상에서 보듯 정재승 또한 그 중 하나다. 멋진 집이다. 2만 여권의 책이 있다고 한다. 사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책은 사놓은 것 중에서 읽는 것이지 샀다고 다 읽는 게 아니다. 일단 책이 손에 닿는 곳에 있어야 한번이라도 펼쳐서 보게 되지 않던가. 우연히 만나게 된 구절로부터 영감을 얻고자 하는 것이 학자다. 새로운 생각을 해내기 위해서는 책이 지천으로 손에 닿는 곳에 널려 있어야한다. 마치 숲 속에 머물다 보면 이런 나무도 있고 저런 나무도 있고 이런 동식물 등이 있기에 우연한 만남을 가지게 되고 그렇게 해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되듯이 말이다. 책은 숲 속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 혹은 땅에 흩뿌려진 나뭇잎과 같이 넉넉해야한다. 그래야 관찰을 하게 되고,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내게 된다. 학자에게 책은 자연, 혹은 보다 정확히는, 제2의 자연이다.

생각해보니 나 또한 내 방을 책의 숲으로 만들고 싶어 20대 시절에는 많으면 한 달에 10-20권의 책을 사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봤자 많아야 일 년에 1-200여권을 사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도 20대가 끝날 때쯤엔 방의 벽 하나를 다 채울 만큼의 책은 모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미국에 오고 나서는 아마존을 통해 중고 책을 적지 않게 사들였다. 그러나 그러다 어느 순간 종이 책을 사는 것을 멈췄다. 책이 짐이 되어서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것이 힘들어질 뿐 아니라 (이사할 때 내가 가지고 가야할 가구는 책상과 침대, 그리고 책장 뿐인 데 비해, 책이 차지하는 무게 때문에 쉽게 이사할 엄두를 잘 내지 못한다. 인건비가 비싼 미국에서는 이사할 때 이사짐 센터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차만 빌린 후 물건은 알아서 옮겨야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 책들을 한국으로 가져가는 과정 중에 들 돈 또한 부담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후로는 대부분 전자책 형태로 책을 구했다. (물론 내 직접적 연구 대상이 되는 문학 작품과 고전으로 평가 받는 철학자의 책의 경우는 예외다.) 그래서 사실 지금 내게 도서관 역할을 하는 것은 내 노트북 컴퓨터다. 내 컴퓨터 안에는 많은 책과 논문이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1-2천 종은 있지 싶다. 대부분 문학, 철학, 과학에 관련된 것이다. 내 논문 작업을 위한 것이라 단순한 재미로 볼 만한 것은 거의 없다. 

전자책의 문제는 작심하고 열어보지 않으면 책 안의 내용과 우연히 마주하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대신 검색 기능을 써서 조금 다른 종류의 만남을 가질 수 있다. 전자책은 책 마지막 부분에 달리는 색인이 없어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정확한 키워드만 있으면 구석구석 내가 필요로 하는 부분들을 바로 찾아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너무 많은 책이 쌓이다보면 종종 받아둔 책을 어느 폴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책을 열어보지 못한 채 헤매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또한 한번에 너무 많은 책을 받은 경우 내가 무슨 책을 받았는지 전부 기억을 하지 못해 받아두고도 나중에 사용하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전자책 중에서 내가 가장 요긴하게 쓰는 것은 구글북스다. 기존이라면 영미권의 대학 도서관에나 가야 볼 수 있었을 19세기에 출판된 책들을 무료로 다운받아 볼 수 있다. 예컨대, 최초의 과학 철학자라 할 만한 오귀스트 콩트의 Cours de  Philosophie Postive의 영어본은 지금 시중에서 구하기가 쉽지 않다. 단 하나 2009년에 나온 캠브리지 대학 출판본이 있지만 새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실은 19세기에 중반에 나온 헤리엇 마티노우의 번역을 그대로 스캔한 것에 불과하다. (그만큼 오귀스트 콩트가 동시대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다는 뜻이리라.) 마티노우의 번역본은 구글북스에서 무료로 구할 수 있기 때문에 구태여 캠브리지 대학 출판본을 볼 이유가 없다. 19세기 문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구글북스는 축복과 같다.

미국까지 와서 공부하고 있기는 하지만 구글북스 때문에 도서관에 갈 일은 많지 않다. 미국에서 12번째로 큰 장서수를 자랑하는 도서관이지만 별로 가지 않는다. 가게 되면 서가 안을 돌아다니며 책을 찾는 것도 일이다. 종종 도서관에서만 구할 수 있는 책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 경우도 서서에게 찾아놓으라고 하거나 아니면 스캔해서 이메일로 보내라고 해서 받는다. 요즘엔 복사도 안한다. 내가 직접 도서관에 갈 경우도 전부 스캔해서 이메일로 전송한다. 미국에 온 이후로 복사기를 써본 일이 없다. 사실 도서관에서 복사기를 본 기억도 없는 것 같다. 스캐너만 있지 싶다. 스캔본도 전부 스크린상에서 읽는다. 프린트를 할 일이 없다. 바야흐로 전자책의 시대다.

사실 저작권이 만료된 책의 스캔본은 구글 말고도 많은 다른 사이트에서 공짜로 공개하고 있기도 하다. 인터넷 아카이브(Internet Archive)나 하티트러스트 디지털 라이브러리(HathiTrust Digital Library) 등이 대표적이다. 오늘날, 양피지에 쓰여진 희귀본을 직접 물리적으로 확인해야하는 것이 아니라면, 종이책의 형태로 나온 고서 때문에 영미권 도서관에 갈 일은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책 생태계'라 불리는 책이 지닌 물리성의 세계를 그 자체로 연구하는 학자들도 많다. 그들의 세계는 의외로 '깊고 심오'하다. 책의 종이를 만드는 방식에도 여러가지가 있을 뿐 아니라 바인딩 기술도 다채롭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책의 내용 이전에 책의 원재료인 종이가 자연으로부터 만들어져 나오는 재생의 사이클이라는 관점에서 책을 연구한다. 그들은 심지어 책에 벌레가 먹은 자국, 변색된 부분, 남들이 책에 남긴 메모 등을 연구한다. 그런 사람들은 전자책에는 관심 없다. 물리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도서관의 희귀본 코너를 사랑한다. 나도 한번 도서관의 희귀본 컬렉션을 통해 17세기 책을 열람한 적이 있었는데 책에 흠집이 가지 않게 하기 위해 심지어는 책을 열람하는 과정에 필요한 조명조차 통제하는 모습이었다. 고서들은 빛에 의해 쉽게 상하기 때문이다. 처음이라 내가 좀 어설프게 작업하자 호들갑을 떨며 경계심을 잔뜩 표하던 한 백인 할머니 사서의 모습은 아직 잊을 수가 없다.) 여하튼 여러모로 오늘날 인터넷은 연구자 입장에서 천국과 같은 곳이다. 

다른 한편 인터넷을 통해 19세기 책을 다운받아 보기 시작한 후로 컴퓨터가 버벅거리는 현상이 발견됐다. 8-900 페이지가 되는 책들이 수두룩한데 여러개 열어서 스크롤을 좀 하다 보면 컴퓨터가 감당을 못하고 쿨링팬이 세차게 돌아가다 어크로빗리더가 다운이 된다. 논문 작업을 하다 보면 한번에 열어서 참고하는 책이 동시에 10권 이상이 되기도 하는 경우가 많아 더더욱 컴퓨터가 감당을 못하는 느낌이다. 2017년에 나온 컴퓨터인데 더 이상은 능률이 떨어져 힘들다 싶어서 최근 새 컴퓨터를 하나 마련했다. 일단 화면의 크기를 기존보다 큰 16.2인치로 정했다. 그리고는 강력한 성능을 자랑한다는 M1 Pro라 불리는 CPU를 사용한 제품을 골랐다. 새 컴퓨터에서 열어보니 900페이지 책도 가볍게 열어 스크롤을 할 수 있다. 속이 다 시원하다. 컴퓨터 안에 책의 숲을 만드는 데는 이렇듯 돈이 든다. 정재승이 '책의 집'을 지었다면, 나는 책의 컴퓨터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내 도서관은 내가 들고 다니는 컴퓨터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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