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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시 메탈과 쇼츠

by spiral 2022. 10. 5.

쓰레시 메탈 음악의 특징 중 하나는 '대곡'에 대한 열망을 지니고 있다는 데 있다. 아래 메탈리카의 [로드](Load)를 예로 들면 거의 10분에 육박하는 "The Outlaw Torn"이나 8분이 넘어가는 "Bleeding Me"가 대표적이다. 앨범 전체 길이도 80분에 달한다. 메탈리카의 가장 야심작이라 할 수 있는 1988년작 [앤저스티스포올](. . . And Justice for All)에는 6분 이상되는 곡이 3곡, 7분 이상되는 곡이 2곡, 9분 이상되는 곡이 2곡이나 된다. 길이에 있어 메탈의 정서는 가히 서사시적이다. 세계 전체에 대한 조망을 해보이겠다는 야심이 메탈의 세계관이라 말해볼 수 있다. 메탈 음악은 서정성과는 거리가 멀다. 예컨대, 2-3분 짜리 발라드 사랑 노래를 쓰레시 메탈 밴드에게서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던가?*

오늘날 메탈은 더 이상 젊은이들의 정서가 아니다. 거꾸로 '아재'들의 정서로 여겨진다. 1980-90년대까지는 그 어떤 음악보다도 더 '젊은이답다'고 여겨졌던 메탈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일까? 그 배경에 메탈이 지닌 대곡에 대한 열망이 있다고 말해본다면 어떠할 것인가? 여기서 오늘날 유행하는 '쇼츠'를 떠올릴 수 있어야한다. 불과 2-30초, 길어야 1분 정도 되는 길이의 짦은 동영상이야말로 오늘날 10-20대의 핵심적 정서를 보여주는 포맷이다. 이는 오늘날 젊은 세대에 어필하려면 30초 정서를 기반으로 곡을 만들어야한다는 뜻과 같다. 30초 안에 모든 것이 다 드러나야한다. 2-3분 되는 곡이라고 해도 30초 동안 드러난 요점이 반복되는 형태로 구성되어야한다. 2010년 전후 유행했던 '후크송'이란 개념을 생각해보라. 후크송은 듣는 이의 감각에 착착 감기는 강렬한 후렴구가 곡의 전체 정서를 지배하는 곡을 말한다. 쇼츠는 후크송의 '후크 후렴구'만 추려낸 경우와 같다. 쉽게 말해서, 시중종이라는 맥락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클라이맥스'인 게 쇼츠다. 쇼츠에는 그 어떤 숨은 본질도 없다. 모든 것은 이미 표면에 다 드러나있다. 

반면 30초 가지고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것이 쓰레시 메탈이다. 2-30초면 전주부 리프 조금 보여주다 끝날 시간이다. 메탈의 관점에서 세계 경험은 30초로 설명될 수 없다. 세계의 본질은 겉으로 드러난 유쾌한 표면의 아래 비밀스럽게 감추어져있다. 어째서 쓰레시 메탈이 울분의 정서를 풀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는지 생각해보자. 그 이유는 그들에게 세계는 빛에 의해 밝혀져 이미 드러난 세계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된 세계는 행복하지 않다. 겉으로 드러난 행복의 세계는 사실이 아니다. 그러한 세계는 기만적이다. 겉으로 보는 것과 달리 실제 세계는 어둡다. 문제는 어둠이 빛의 세계를 꿰뚫고 그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악전고투와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는 데 있다. 숨겨지고 억눌려진 이유로 어둠은 그 자신을 드러내는 데 '시간'이 걸린다. 알려졌다시피 많은 메탈 계열 음악은 프로그레시브 록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 이유는 메탈 음악의 구조가 '시간적 전개'를 반드시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메탈 음악의 관점에서 세계의 본질은 비밀스럽게 천천히 그리고 길게 풀어져나오는 서사의 형태로만 포착될 수 있다. 사회에 속하지 못한 범법자(outlaw)의 찢어진(torn) 마음을 달래는 데 최소한 10분은 필요한 셈이다. 이는 30초 짜리 굿으로 귀신을 달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귀신 혹은 악령을 다루는 과정은 길고 지난하다. 귀신을 달래는 데는 '정성'이 필요하다. '정성'의 형식이 시간적 '서사'다. 물론 시간이 선적으로 펼쳐지면 '시중종'이라는 우여곡절을 그 구조로 지니게 되기 마련이다.

다시 '쇼츠'로 돌아가자. 쇼츠가 가능하려면 빛과 어둠, 긍정과 부정, 선과 악 등의 이분적 가치에 기반한 세계관이 작동해서는 안된다. 쇼츠의 세계는 평면적이다. 세계에 숨겨진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즉자적이다. 지금 이 순간 신체가 느끼는 감각에 숨겨진 부정성 혹은 비밀 따위는 없다. 모든 것은 주어진 순간 이루어진다. '천국'이 바로 '현재'의 시제로 주어진다. 쇼츠에 과거나 미래는 없다. 회상적 여한도 도래할 것에 대한 기대도 두려움도 없다. 오직 현재 뿐이다. 그렇기에 부정적으로 혹은 꽥꽥 소리를 질러가며 무엇인가 미래에 올 불길한 일 따위 암시할 시간은 없다. 신체는 지금 이 순간 이미 행복하다. 그래서 쇼츠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예쁘고 귀여운 신체가 살랑살랑 움직이는 율동을 담아낸 영상이다. 쇼츠는 선악의 구분 이전, 즉, 타락 이전 순진함의 세계와 같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에덴 동산의 세계가 쇼츠의 세계다. 반면, 메탈, 특히 쓰레시 메탈 음악은 타락 이후의 세계와 같다. 타락한 자들은 그 자신의 구원을 위해 '서사'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사실 본질에 있어 메탈 음악은 기독교적이다. 물론, 이는 메탈이 '개전의 정'을 내보여 스스로 구원 서사를 완성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거꾸로다. 과거 한때 미국의 학부모들이 행복하게 규탄했듯, 메탈은 '사탄의 음악'이 맞다. 요점은 '사탄 없이 구원 없다'는 것이다. '마귀와 같은' 메탈 음악은 '불신지옥'의 다른 말에 불과하다. 물론 '불신지옥'에는 반드시 따라붙는 또 하나의 구절이 있다: '예수천국.' 메탈과 기독교, 서로 없어서는 못사는 '환상의 커플'이다.

한때 비판적 인문 지식인들이 선악의 이분법은 잘못된 것이라고 설파하던 시절이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고, 지금도 유효한 통찰이다. 그러나 긍정과 부정의 구분이 완전히 사라진 곳에서 등장하는 것은 쇼츠이기도 하다. 순수함의 세계에서는 사고 자체가 사라진다. 내면과 기억이 사라지고 모든 것은 신체가 느끼는 즉자적 감각의 단계에 머물게 된다. 철학에서 이러한 존재론은 '평면적 존재론'(flat ontology)이라 불린다. 오늘날은 깊이의 철학이나 비판 철학의 시대가 아니다. 그러나 이는 오늘날 철학이 사유 자체를 포기했다는 뜻이 아니다. 들뢰즈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평면적 존재론 혹은 내재성의 형이상학을 열어내는 데 들뢰즈의 기여가 컸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들뢰즈 독해의 한 가지 중요한 경향은 그의 철학을 연속성이 아니라 단절의 관점에서 사유하려는 데 있기도 하다. 이는 납작한 평면의 연속에 부정성이 숨어있다는 뜻과 같다. 들뢰즈의 '어두운 전조'라는 개념이 한 예다. 번개가 치기 전 하늘은 어둔운 전조를 드러낸다. 번개의 빛이 대기의 평면을 가로지를 때 평면은 빛과 어둠의 차이를 드러내게 된다. 쇼츠 자체에는 사유가 없다. 쇼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기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사유는, 쇼츠가 아니라, 쇼츠와 쇼츠 사이에서 잠시 등장하는 단절, 금, 어두운 전조 속에서 발생한다. 다시 과거와 같은 쓰레시 메탈의 시대가 돌아오지는 못할 거다. 그러나 새로운 의미의 쓰레시 메탈-록이 쇼츠를 어두운 전조를 통해 이어붙일 날이 올 수는 있을 것이다.

* 사실 쓰레시 메탈 음악에서 자아는 아직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메탈리카의 [로드]에 실린 "Until It Sleeps"라는 곡을 생각해보자. 해당 곡은 화자 안의 사라지지 않는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디서 이 고통을 얻게 된 거지? 도망가보지만, 내 바로 옆에 찰싹 붙어있어. 나를 찢어서 꺼내놓아, 그리곤 나를 쏟아내버려, 내 안에 비명을 지르고 소리를 지르는 것들이 있어, 고통이 여전히 날 증오해, 그것이 잠들 때까지 날 쥐락펴락 해." 고통에 시달리며 자기 증오에 시달리는 화자는 자아를 가지고 사회 속에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쓰레시 메탈이 이른바 '대곡'에 매달리게 되는 것은 자기 증오에 빠진 자아에게는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행복과 아픔과 사랑 등의 감정을 장르적 간결함--예컨대, 발라드, 소네트, 엘레지, 오드 형식 등--을 가지고 전달할 능력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쓰레시 메탈의 자아는 사회적 시간 속에서 음악의 형식을 풀어내지 못한다. 여기서 메탈이 지향하는 '대곡'의 시간이 장르화된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예술적 시간 이전의 원시 종교적 시간에 훨씬 더 가깝다는 점을 볼 필요가 있다. 메탈 음악 공연 문화가 어딘지 모르게 주술적인, 보다 정확히는 흑마술적인, 모임의 느낌을 내는 이유가 여기 있다. 메탈 음악의 화자와 청자는 '아웃사이더'로서 사회의 외부에 남겨져 서로 주술적 관계를 맺음을 때 하나가 된다. 이들 주술적 집단에게 남겨지는 마지막 희망은 악의 문제에 시달리는 자아를, 예컨대 기독교에 귀의함으로써가 아니라, 메탈식 대곡의 기획을 통해 풀어내는 것이다. 반사회적 메탈의 정서 자체가 하나의 장르가 된다면 이들에게도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 반사회성이 스스로 생성해내는 대안 사회적 집단성이 이른바 '서브컬처'의 한 가지 정의를 이루게 된다.

** 전통적으로 '사랑시'가 문학적 관습(convention)의 문제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말이 나온 김에 문학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 (맨날 음악 이야기만 하는 것 같지만 사실 난 문학 연구자다.) 문학 영역에서 '사랑시'는 정해진 장르적 문법에 맞추어쓰는 것이다. 예컨대, 소네트는 3개의 쿼트레인(quatrain)과 하나의 커플릿(couplet)으로 만들어져있고, 지켜야할 라임(rhyme) 체계와 주제를 지니고 있다. 사랑시는 '내 자아가 지금 죽지 않는 고통스러운 벌레에 먹혀가고 있어'라는 심연으로부터 시작해서 주관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물론, 토마스 와이어트나 필립 시드니, 셰익스피어 등으로 이어지는 영국시 전통은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칸 소네트 형식에 은밀히 가해지는 주관성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봐야 그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변형은 어디까지나 소네트 형식 전통 내부에서의 변형이다. (이러한 영문학 전통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 T. S. 엘리엇의 "전통과 개인의 재능"이라는 글이다. 신비평적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시적 전통이지 개인의 재능이 아니다.) 이 모든 관습이 끝나게 되는 것은 18세기말 낭만주의에 와서다. [서정담시집] 등을 거치며 무운시(blank verse) 형식을 사용하게 되는 워즈워스를 생각해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 형식 속에서 워즈워스가 도달하고자 했던 형식의 하나는 '서사시'라 불리는 대작이었다. [서곡]이 그 한 예다. 물론, 너무 거대한 나머지 [은둔자]라 불리는 철학적 시의 전체 기획 중 서곡과 그 외 몇 부분 밖에 쓰지 못하고 죽었지만 말이다. 흔히 호메로스 등의 서사시, 예컨대, [일리어드]는 '영웅 서사시'라고 여겨진다.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전쟁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게 [일리어드]다. 영국시 전통으로 치면 [베어울프]의 주인공 베어울프는 초자연적 괴물이나 용과 맞서싸우는 영웅이다. 그러나 근대에 오면 서사시는 주관성의 심연을 담아내기 위한 장르가 된다. 워즈워스가 쓴 [서곡]의 부제가 '시인 마음의 성장'이라는 점을 기억하라. 여기서 영국의 또 다른 서사시 [실락원]을 쓴 밀턴의 경우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실락원]은 영웅서사시의 특징을 지니고 있지만 결국엔 내면적 악의 문제가 핵심이다. 이브를 유혹하는 사탄의 문제 말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때 인간의 주관성이 악마적 심연의 문제에 맞닿아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문학적 관습을 통해 접근하기 때문에 밀턴에게서 주관성의 문제는 아직 완전히 근대적이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근대성을 다루는 주된 문학 형식은 시가 아니라 소설이다. 영미권에서 소설이 어째서 '새로운 것'(the novel)이라 불리는지 생각해보라. (영미권과 달리 프랑스나 독일어권에서 소설은 '로만'이라고 불린다. 중세의 로맨스 서사시 전통을 강조한 결과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제임슨이 지적하듯, 소설은 장르가 아니다. 소설은 '장르의 끝'이다. 시가 아니라 소설을 연구하는 사람은 이 말의 진가를 음미하고자 하는 자라 할 수 있다. 루카치나 모레티 같은 사람은 소설을 '근대의 서사시'라 부르기도 한다.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난 어디까지나 소설은 '장르의 끝'이라 여긴다. 이와 관련해서 할 이야기는 끝도 없다. 그러니 이쯤에서 멈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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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ad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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