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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노 봉건주의, 명품, 주술, 영성

by spiral 2021. 11. 22.

최근 유럽과 미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가장 주목받는 담론의 하나는 '테크노 봉건주의'(technofeudalism) 혹은 '디지털 봉건주의'(digital feudalism)다. 이는 근래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함께 자본주의가 진화해가는 방향을 묘사하기 위한 용어다. '테크노 봉건주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지금 봉건주의의 형태로 진화 혹은 퇴화하고 있다. 요점은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조차 무너뜨리지 못한 자본주의를 자본주의 자신이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보는 데 있다. 여기서 자본주의가 사실 그 자체로 대단히 혁명적인 기능을 수행하며 등장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자본주의는 중세 봉건주의를 무너뜨리며 중산층 자본가들에게 자유를 허락하는 정치체제의 경제적 바탕으로 여겨졌다. 바로 이 혁명적 배경 덕분에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 늘 긍정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쉽게 말해서,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개인을 가능하게 만드는 경제적 바탕이었다. 이에 비해 테크노 봉건주의는 21세기 들어 자본주의가 자기 전복적 혁명성을 폐기하기 시작했다는 놀라운 통찰을 제공한다. 그래서 주목을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테크노 봉건주의는 어디서 어떻게 발견되고 있는가? 아마존을 생각해보자. 테크노 봉건주의 이론에 따르면 아마존은 시장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전세계의 모든 상품이 아마존 내부로 들어오게 되면서 아마존에서 거의 모든 상품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시장은 말만 놓고 보면 단일한 유기적 구조를 칭하는 것 같지만 자본주의하에서 시장은 개별 기업이 서로 경쟁하며 구성하는 열린 구조 속에 있다. 즉, 시장 내에서는 늘 도태하여 사라지는 기업과 새롭게 부상하는 기업이 있다. 그래서 시장에는 시장 자체를 지배하는 단일한 기업이 없다. 아무리 잘 나가는 기업이 있어도 경쟁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늘 긴장해야한다. 그러나 오늘날 아마존은 단순히 시장 내에서 여러 다른 기업과 경쟁하는 하나의 기업이지 않다. 아마존은 수많은 기업에게 공간을 제공하는 플랫폼이 되었다. 아마존이 곧 시장이다. 아마존은 경쟁에서 예외적 존재가 되고 있다. 이 때문에 아마존은 시장이 아니라 봉건 영주가 제공하는 영지(estate) 혹은 장원(manor)과 훨씬 더 비슷하다. 예컨대, 아마존은 특정 상품이 잘 팔리게 얼마든 조작할 수 있다. 검색 결과의 상단에 뜨도록 특정 상품을 배치하면 되기 때문이다. 아마존이 사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수법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특정 판매자의 특정 상품이 잘 팔리면 그 제품을 모방한 보다 저렴한 가격의 제품을 아마존 브랜드를 달아 공개한다. 그리고 그 상품을 검색 결과의 상단에 노출시킨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엄청난 이윤을 챙긴다. 이는 이미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고객들이 다는 평점이란 것도 관리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 조작할 수 있다. 요점은 이 조작의 행위가 아마존 내부의 판매자를 영주에게 종속된 일종의 농노와 같은 상태로 전락시킨다는 데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아마존에서 물건을 사게 되면 구매자가 어떤 사람인지 고스란히 정보의 형태로 아마존 측에 남는다. 자본주의는 '나'를 단 하나의 맹점도 없이 바라보고 있다. '나'의 존재는 아마존에 의해 '프로파일링'된다. 나는 항상 시스템에 연결되어 있다. 아마존 물류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아마존 물류 창고 모델을 그대로 배낀 쿠팡의 사례가 보여주듯 아마존 물류 창고는 노동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한다. 화장실에 갈 틈도 없다. 한 치의 딴짓할 시간도 허락하지 않는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자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자유'가 바로 자본주의 내부에서 사실상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아래 영상에서 야니즈 바루파시스(Yanis Varoufkis)가 설명하듯, 사실 오늘날 노동자에게는 퇴근이란 것이 없다. 퇴근 후에도 스마트폰 등을 통해 계속해서 업무의 연장선상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야니스의 통찰을 주목할 만하다. 그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오늘날 젊은 세대가 일종의 패기를 상실하고 있다고 느꼈다고 한다. 저항 정신은 더 이상 오늘날 젊은 세대의 가치이지 않다. 그는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인지 고민하는 데서 이론화를 시작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오늘날 젊은이들이 자본주의 하에서 자존감을 유지할 자유로운 사적 영역 자체를 박탈 당하고 있다는 정황이었다. 사실 그가 젊은 시절 체제에 대해 저항적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세계의 중심에 있으며, 내가 세계를 바꿀 것'이라는 자유주의적 삶의 태도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테크노 봉건주의로 진화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실존이라 불리는 바로 그 개인의 존엄을 개인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한때 자본주의는 저항 정신을 가능하게 하는 개인의 자유를 가능하게 만드는 물적 토대였다. 그것이 봉건주의를 허물고 자본가라는 자유주의자들을 낳았다. 그러나 지금 자본주의는 바로 그 개인의 자유를 박탈해가고 있다. 자본주의가 테크놀로지에 기반한 봉건주의로 진화 혹은 퇴화하고 있는 것이다.

바루파시스의 이론은 사실 이보다 더 엄밀하다. 자본주의가 테크노 봉건주의로 진화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면 경쟁에 기반하고 있다 여겨져온 자본주의 시장의 성질이 어째서 지금과 같이 변화하게 된 것인지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론적으로 검토해야하기 때문이다. 그가 주목하는 역사적 사건은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다. 그는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미국의 경제 구조에 가해진 변화에 주목한다. 2008년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미국 정부는 죽어가는 기업을 살리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찍어내게 된다. 시장 질서에 따르면 당연히 파산하여 사라졌어야 하는 기업들이었다. 그러나 기업 붕괴와 함께 민간에 가해질 파괴적 결과를 막기 위해 오바마 행정부는 엄청난 금액을 그들 기업에게 수혈하게 된다. 이후 트럼프 행정부는 코로나 사태가 터지게 되면서 동일한 조치를 2008년의 수치를 뛰어넘는 수준으로 행하게 된다. 바이든 행정부도 기본적으로 동일한 정책을 쓰고 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코로나 사태 속에서, 기업이 이익을 낼 전망이 어두워져 주가가 대폭락하고 경제 대공황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주가가 더 오르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대체 어떻게 이토록 반시장적인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인가? 이는 투자자들이 기업이 도산하지 않게 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돈을 수혈해줄 것이라 믿게 된 결과라는 게 바루파시스의 설명이다. 문제는 이 현상이 지극히 반자본주의적, 반시장주의적이라는 데 있다. 쉽게 말해 기업을 살리겠다는 정부의 정책에 의해 시장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변화가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뜻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시장이 사라지는 것은 소수의 거대 기업이 몸집을 불리며 시장을 독점적 형태로 장악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바루파시스 같은 경제학자는 이를 시장의 소멸과 함께 자본주의가 봉건주의로 진화하는 현상으로 보고자 한다. 정부가 기업의 시녀가 되면서 기업들이 도산의 과정을 피하게 된 결과다. 

사실 이러한 미국 경제 구조의 변화는 이미 예전부터 최배근 교수가 지적해온 바이기도 하다. 최배근 교수에 따르면 미국 경제는 지금 '새로운 처음'(a new beginning)을 경험하고 있다. 지금 경제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기현상이 많은 경제학들이 이미 주목하고 있었던 현상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바루파시스의 가설이 보여주듯, '새로운 처음'이 '봉건주의의 시작'일 수도 있다는 데 있다. 최배근 교수는 '새로운 처음'을 미국 경제가 몰락할 수 있다는 신호로 읽는다. 그러나 동일한 현상이 정부가 기업의 시녀로 전락하면서 자본주의 시장이 봉건주의 영지로 성질을 변환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는 게 문제다. 사실 최근 자본주의 하에서 부흥했던 자유주의 개인의 삶에 변화가 찾아오고 있다는 신호는 문화의 영역에서도 발견되는 바다. [오징어 게임]에 열광하는 지구인들이 좋은 예다. 해당 현상이 가리키는 것은 단순히 자본주의에 저항하고자 하는 정신이 전지구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아닐 수 있다. 거꾸로 봉건적 삶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일어나는, 한의학의 용어를 쓰자면, 전지구적 '명현 반응'일 수 있다. 데스게임 참여에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인물들을 보라. 데스게임에 응하는 형식은 자본주의에 기반하여 개인들이 서로 맺는 합리적 계약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데스게임 참여 동의는 훨씬 더 중세적이고 주술적인 현상이다.

지금 지구인의 삶은 알려지지 않은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다. 서구에서 자유주의 개인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이는 단순한 문화적 현상이 아니다. 경제적 현상이다. 자유주의 개인이 기반한 삶이 무너지고 난 후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이 찾아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 때문에 지식인들이 '테크노 봉건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해가며 경각심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인간과 비인간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존재 양식을 세공해내지 않으면 생태학적 위기 속에서 난민이 발생하고 국가는 몰락한 후 그저 테크노 봉건주의 하에서 기업을 '부족'(clan)으로 삼아 살아가는 삶의 형태만이 남게 될 수 있다. 쉽게 말해서, 국가 대신 기업이라 불리는 영지에 소속되어 영주와 농노라는 선택지를 두고 삶의 양식을 선택해야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어째서 최근 한국인들 사이에서 고가의 명품 소비가 그토록 성행하게 되는 것인지 생각해보자. 이는 봉건제의 초입에 위치한 사람들이 직감적으로 농노의 삶이 아니라 봉건 영주 혹은 귀족의 삶을 흉내내보고자 한 결과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구태의 상징으로 여겨져 폐기되었던 귀족적 삶의 양태가 최근, 마치 '힙한' 것인냥 포장되어, 자본주의 내부로 되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20세기 중반 등장했던 '야만주의'(brutalist) 건축 양식을 생각해보자. 콘크리트 덩어리가 아무런 장식도 없이 건물의 표면에 그대로 노출되었던 건축 양식이다. 대단히 흉물스러운 건축 양식이었으나 그 발생 정신 만큼은 깨어있었다.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져온 화려한 장식에 기반한 서구의 건축 양식 일반이 귀족적 삶의 구태를 아무 생각 없이 반복해온 결과에 다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결과다. 물론 야만주의 건축 양식은 자본주의 하에서 표준화되어 생산되는 공장제 상품의 단출함을 닮아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발생만큼은 전복적 정신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반대로 우리는 자본주의하에서 귀족적 명품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행렬을 보고 있다. 사실 이는 자유주의 및 개인주의에 기초하여 만들어졌던 서구의 지성이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나타나는 문화적 현상이다. 헤겔에게서 보듯 근대 민족 국가가 계몽주의 이성에 기초한 지적 삶의 형식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단순히 이성에 의한 억압의 형식이라고 치부하여 국가를 완전히 폐기처분하게 될 경우 기업이라 불리는 '부족의 영토' 혹은 '영주의 영지'만이 데스게임의 주술과 함께 우리에게 남겨질 가능성이 있다. 칸트의 용어로 '이성의 공적 사용'이 이루어지는 공간, 그것을 국가라 부르든 무엇이라 부르든, 그 틀 자체를 버려서는 안된다. 국가를 생태학적 존재론의 관점에서 재활용(recycle)하는 접근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짤막하게 이병한과 같은 역사학자의 기획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는 자본주의적 테크놀로지 속에서 일종의 '영성'(spirituality)을 발견하고자 한다. 그에게 테크놀로지는 동양의 영성을 미래지향적 방식으로 구현하게 해주는 틀과 같다. 물론,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는 구분될 수 있다. 즉, 자본주의에게서 테크놀로지를 해방시키는 핵심이 동양의 영성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 동일한 '영성'이 오늘날 등장하는 '테크노 봉건주의'가 기반한 '주술'의 형식 내부에 갇히게 될 가능성에 있다.* 메타버스를 생각해보라. 메타버스는 기본적으로, 탈신비화를 배제하는, 주술의 공간이다. 새로운 존재 양식을 세공하기 위한 보다 엄밀하고 치밀한 철학적 기획이 필요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최근 자본주의 하에서 갈수록 과학이 영성을 자신의 내부로 포섭해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의 뇌에 컴퓨터와 네트워크를 직접 연결하고자 하는 '뉴럴링크'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과학은 영적(spiritual)이다. 이미 그리스 고전 시대 때부터 그랬다. 피타고라스 학파가 개진한 상징주의 수학을 보라. 그러나 과학은 단순히 영적이지 않다. 데카르트의 기계적 신체로 대변되는 서구의 근대 과학이 보여주듯, 과학은 탈신비화의 형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헤겔의 '정신'(spirit)이 단순한 동양적 의미의 영성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은 이 때문이다. 새로운 존재론이 계몽주의의 통찰을 폐기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 도올 김용옥 선생의 노자적 아니키즘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해볼 수 있다. 그는 존경할 만한 사상가다. 특히 동학 정신에서 새로운 민중적 삶의 양식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는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진화해나가는 작금의 테크노 봉건적 맥락 속에서, 데카르트적 기계의 층위를 완전히 거부하는 그의 순수 동양적 사고는 어떻게 신비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최근 대안적 엘리트 지식인 사이에서 부는 '영성'으로의 회귀가, 이성의 형식으로서의 국가 대신, 엘리트 영적 '구루'(guru)를 따르는 부족적 무리를 양산하는 방향으로 나갈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볼 시점이다. 인터넷 문화가 기본적으로 '팔로워'(follower) 문화라는 점을 기억하라. 팔로워 문화는 영적 구루를 따르는 자들의 문화와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적어도 오늘날의 소셜 미디어는 계몽주의 문화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 (첨언하자면, 물론, 난 그들 대안적 엘리트 지식인들의 작업에 충분히 공감한다. 그들의 작업은 아무도 읽지 않는 관료주의 논문을 양산하며 살아가는 기성의 연구자들에게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지점들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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