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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딥쓰리, 이른바 '좋았던 옛날'

by spiral 2022. 4. 27.

내가 유일하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스포츠는 농구다. 물론 동시대 농구 경기를 실시간으로 찾아볼 정도는 아니다. 그저 정리된 영상을 통해 이런 저런 플레이어들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확인하는 정도다. 그러나 1990년대 NBA 선수들 관련 영상은 여전히 흥미를 가지고 찾아본다. 내가 농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주 흔해 빠진 이유 때문이었다. 어릴적 [슬램덩크]라는 만화를 보게 된 게 결정적이었다. 그 안에 묘사된 농구 장면이 어찌나 멋지게 보이던지 친구들과 농구를 직접 해보기에 이르기도 했었다. 물론 난 운동가형 신체를 타고나지 못했다. 어설프게 흉내내는 수준에서 그쳤다.

한편 [슬램덩크]의 작가가 작품의 배경에 NBA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내 이목을 끈 것은 마이클 조던이었다. 그의 플레이에는 우아함과 파괴력이 동시에 공존한다. 그게 그의 매력이다. 그의 '시그니처슛'인 '페이더어웨이슛'을 떠올려보라. 그는 몸싸움을 하며 골밑으로 파고들 것 같은 순간 거꾸로 뒤로 물러서며 우아하게 점프하여 골을 성공시킨다. 덩크를 하려다가 공중에서 상대에 의해 저지를 당할 것 같을 때쯤 팔을 두어번 더 움직여 클러치슛을 성공시키는 방식을 보라. 그는 치열한 몸싸움 속에서 몸싸움을 회피하는 놀라운 기술적 우아함을 지닌 선수다. 마치 야만적 몸싸움은 그가 진실로 원하는 것이 아닌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덩크로 상대를 유린할 수 있는 파괴력을 지닌 자이기도 하다. 필요할 때면 언제든 보란 듯이 수비수를 앞에 두고 덩크를 꼽아 상대의 기를 죽인다. 사실 그는 승부욕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의 기를 꺽는 것이 필수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블로킹으로 유명한 무톰보를 상대로 덩크를 선사한 후 무톰보 특유의 손가락 흔들기 제스처를 되돌려주어 그의 기를 꺾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사실 1990년대 NBA를 보며 열광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선수들이 보여준 파괴력 때문이었다. 이 분야에 있어 전문가는 단연 샤킬 오닐이다. 난 그가 덩크로 농구 골대를 박살내는 것을 보며 그에게 매료됐었다. 갓 데뷔한 시즌 동안 2-3개의 골대를 처참하게 주저앉히는 모습은 거의 초현실적이었다. (그런고로 내가 처음으로 산 농구화는 그가 신었던 '샤크3'이기도 했다. 신발 자체는 뻣뻣하고 딱딱하여 최악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인스타펌프'라는 신기한 기능을 장착한 그 당시 가장 '힙'한 신발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내게는 쓰잘데기없는 기능에 불과한 것으로 탄로났다. 신발 내 파우치를 부풀리는 가스를 아낀답시고 하다가 희지부지 별로 활용도 못하고 끝났으니 말이다.) 오닐의 힘에 기반한 플레이스타일은 당시 NBA의 분위기를 잘 반영하는 것이었다. 1990년대에 난 농구란 게 원래 그렇게 하는 운동인 줄 알았다. 그러나 최근 와서 알게 된 것은 힘에 기반해 서로 몸싸움 및 기싸움을 하는 스타일이 1980년대에 시작되어 1990년대 꽃을 피운 특정 시대의 양식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난 2000년대 초중반 코비 브라이언트 시대 이후로 NBA를 보지 않았다. 고상하게 문학과 예술, 그리고 철학을 공부하느라 그런 시시한 것에 관심을 줄 여지가 없다고 여기던 시절의 일이다. 내가 최근 NBA 플레이스타일을 알게 된 것은 몇해 전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였다. 난 비행기에서 대부분 다큐멘터리를 본다.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 영화는 서사 구조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게 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쉬는 용도로는 부적합하다.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는 데는 자연사 다큐멘터리가 최고다. 비행기에서는 극락조가 나와서 온갖 희귀한 춤을 추는 것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더 좋은 것도 없다. 패러데이에 관한 과학사 다큐를 본 기억도 난다. 건축에 관한 다큐도 있었다. 그러다 NBA 관련 다큐가 있길래 하나 봤다. '골든스테이트워리어스'라는 팀에 관한 다큐였다. 1990년대에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팀이었다. 그러나 다큐에서 보니 최근 가장 잘 나가는 팀이 되어있었다. 그 중심에는 스테픈 커리라는 선수가 있었다. 

해당 다큐를 보며 NBA 농구가 내가 보지 않은 사이 어떻게 이렇게나 달라진 것인지 놀랬던 기억이 난다. 팀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심에 3점 슈터가 있다니 이런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커리는 내가 생각하는 그 어떤 이상적인 선수의 요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화려한 덩크도, 다른 선수들을 제압하는 힘도, 좋은 체격도,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리그 최고의 선수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그건 그가 대단히 높은 성공률을 자랑하는 3점 슈터이기 때문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이른바 '딥쓰리'라 불리는 3점슛을 구사하는 모습이었다. 하프라인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던지는 공이 골대로 빨려들어가는 모습은 기이했다. 자세히 보니 단순한 우연의 문제가 아니었다. 연습을 통해 전략적으로 해당 슛을 엄연한 기술의 하나로 연마한 모양새였다. 1990년대에 요행수 혹은 우연의 문제 정도로 치부되었던 슛이 전략적 무기가 되어있었다. 이는 상상만 하던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실전에 배치된 듯한 모습이었다. 전쟁은 멀리서 버튼을 눌러서 하는 것이지 구태여 백병전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후 최근 NBA가 어떻게 변한 것인지 찾아보게 됐다. 제임스 하든이란 선수가 눈에 들어왔다. 산타클로스 수염 같은 것--그러나 검은색이다--을 얼굴에 달고 다니는 그는 3점 라인 근처에서 상대를 따돌리고자 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발재간을 부리는 것 같더니 최종에 뒷걸음질로 3점 라인 밖으로 빠진 후 3점을 던지고 있었다. '스텝백 쓰리'라 불리는 슛이었다. 결과적으로 최근의 NBA에서는 마치 고릴라가 인간으로 진화한 듯 전혀 다른 농구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분명 그 자체로 독특한 매력을 지닌 어떤 새로운 구기 종목을 보는 것 같았다. 나쁘지 않은 종목인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구기 종목이 내가 1990년대에 열광한 농구가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내가 알게 된 것은 최근에는 흔히 '빅맨'이라 불리는 센터들이 주목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3점으로 승부가 갈리니 구태여 골대 근처에 갈 필요가 없어진 결과다. 골대 근처에 간다고 해도 파괴적인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공만 골대에 넣으면 된다는 식으로 포물선을 높게 그려서 얄밉게 던지고 있었다. 오닐, 올라주원, 유잉, 로빈슨, 모닝, 무톰보 등 '빅맨'의 시대가 지나간 옛 이야기가 된 것이다.

아래 영상에서 1990년대 NBA 스타들이 최근의 NBA 경기에 대해 성토하는 배경에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정황의 변화다. 한 예로 근래 NBA 관련 유튜버들이 즐겨 올리는 주제 중에는 '농구가 진짜 사나이들의 경기였을 때'(When Basketball Was a Real Man's Game)라는 것이 있기도 하다. 대부분의 영상은 1980-90년대 영상이다. 경기중 난투를 벌이는 '사나이들'의 모습들을 담고 있었다. 오닐과 바클리는 단연 그 중심에 있었다. 조던의 모습도 간간히 조연으로 나오는데 그 역시 대단히 거칠게 보였다. '스레시톡'으로 유명한 레지 밀러가 약을 올렸을 때 조던의 반응은 짐승과 같았다. 영상을 보며 내가 사랑했던 1990년대 NBA 농구가 이토록 폭력적인 운동이었다는 것을 최초로 자각했다. 대단히 야만적인 운동이었다. 짐승들의 기싸움이 벌어지고 있었고, 힘으로 상대로 내리누르는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1990년대 남자 중학교 교실에서 발견되던 그 힘의 논리와 똑같은 것이 농구를 가장한 채 코트 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1990년대 나를 불편하게 했던 짐승과 같은 남자 중학생들의 짐승과 같은 힘의 논리가 내가 그토록 열광했던 1990년대 NBA 농구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었다. 블로킹하는 상대를 앞에 두고 힘으로 누르며 덩크슛을 골대에 내리꼽는 모습, 그렇게 넘어진 상대를 가랑이 사이로 보내는 모습 등, 이것이 흔히 남자들이 '진짜 사나이의 세계'라 부르는 것의 모습이다. [유한계급론]에서 소스타인 베블런이 스포츠를 남성들이 벌였던 야만적 전쟁 행위가 문명화된 형태라 주장했던 대목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1990년대 NBA 농구는 문명화된 전쟁의 살아있는 사례와 같다. 코트 내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일견 정련된 움직임 속에서 전쟁터의 살기를 양피지 속 흔적을 읽어내듯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오닐이나 바클리 등은 전쟁터의 장군들과 같다. 그러한 그들에게 평화는 따분한 재앙과 같다. 운동이라도 해서 혈기를 내뿜어야한다. 농구로 가장한 채 전쟁 체험을 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는 그보더 더 좋은 일도 없을 것이다. 얼마전 우크라이나로 떠난 '이근 대위'라 불리는 사람을 떠올려보라. 그가 농구에 열정을 가질 수 있었더라면 결과가 조금 달랐을까?

NBA 농구는 201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젠틀맨'의 운동으로서 문명화되고 있는 것일까? '딥 쓰리'가 주가 된 농구는 '양궁 농구'라고도 불린다. '양궁 농구'의 묘미는 서로 육체를 직접 부딛칠 순간도 없이 이미 점수가 나고 있더라는 데 있다. 멀리 골대 근처로 갈 필요도 없이, 더 나아가 골대 아래로 가는 행위는 이미 반칙이라는 듯이, 농구장 하프라인을 넘자마자 멀리서 공을 던지는 것으로 승부가 결정나는 형태로 진화한 100년 후 농구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헉슬리가 묘사한 '멋진 신세계'의 모습이지 않은가? 생물만 진화하는 것이 아니다. 스포츠 종목도 진화한다. 1990년대 초 걸프전과 함께 전쟁이 시뮬레이션이 되었다고 말해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철학자로 쟝 보드리야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때때로 이 사람이 술에 취한 게 아닌가 싶은 순간이 있다. 사실 그는 1류 철학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통찰 중엔 깨나 흥미로운 구석이 있기도 했다.) '딥 쓰리'와 함께 농구의 시뮬레이션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코트 위에서 서로 몸을 부대끼지 않게 될 때 최종에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컴퓨터 게임의 형태로 시뮬레이트된 NBA 선수들을 플레이하는 일반인들의 모습이지 않은가? 실제로 최근 유튜버들이 올리는 영상의 하나는 NBA에 기초한 컴퓨터 게임을 이런 저런 방식으로 시뮬레이트한 영상이다. 예컨대, 조던과 르브론 제임스의 대결 등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매치를 시뮬레이트하여 영상을 만든다. NBA 스타들은 어떤 면에서 이미 시뮬레이션 속 주인공이 되고 있다.

과거 '전자오락'이라 폄훼되어 불렸던 아이들의 놀이는 오늘날 엄연히 'E-스포츠'라 불린다. 몸으로 하는 스포츠는 야만적이다. 베블런이 오늘날 살아있다면 전쟁에서 스포츠로 이어지는 흐름의 최종 단계로서 '전자오락' 혹은 'E-스포츠'를 하더 더 제시했을 것이다. 이것이 베블런에서 보드리야르로의 이동일 것이다. 어째서 당구를 '멘틀 스포츠'라 부르는지 생각해보자. 당구에서 서로 부딛치는 것은 공이다. 선수는 결코 서로 육체를 가지고 충돌하지 않는다. 오늘날 NBA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농구의 당구화'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 지점에서 1990년대 육체파 NBA 스타들이 낭만적 모습을 하고서 다시 등장하게 된다. 나 역시 1990년대 농구가 '진짜 농구'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1990년대 농구가 딱히 더 '진짜 농구'였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어릴적 보아서 내 몸에 새겨진 정서가 그런 모습을 '진짜 농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정서적 현실감은 여전히 중요한 요소다. 내 몸에는 아직 삶이 법률에 의해 완전히 합리화되지 않았던 시절의 기억이 있다. 그러한 무법천지의 시절을 전문용어로 '좋았던 옛날'(old good days)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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