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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기지와 '미제' 대중문화

by spiral 2021. 3. 6.

아래 다큐를 보면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미국에 대한 환상적 이미지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체감하여 이해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20세기 중반 이후 한국에 퍼진 '미국물' 혹은 '미국풍'의 진원지는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거대한 미국인들의 섬 용산 미군기지였다. 미군방송인 AFKN을 포함하여 미군기지로부터 흘러나오는 '미제' 물건들 및 '미제' 음악 및 '미제' 문화들을 생각해보라. 부대찌개와 같은 미군과 관련된 한국식 문화를 포함해서 말이다. 바로 미군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미국을 '별나라'와 같은 곳으로 여기기 만든 원동력이었다. 사실 어떤 면에서 한국의 20세기가 나아간 방향은 별세계 미군기지 내에 특권적으로 한정되어있었던 주거 및 삶의 방식, 그에 결부된 문화 등을 보다 많은 한국인들이 미군기지 외부에서 누릴 수 있게 되는 과정과 같았다. 달리 말하면, 20세기 후반 한국은 미국에 대한 물적-문화적 동경을 실제로 구현하여 그 풍요를 미국인과 같이 누려보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움직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군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력은, 아래 다큐에서 볼 수 있듯, 20세기 중반에는 미군 기지 내 마트 혹은 PX에서 유통되던 물건을 반출하여 한국 시장에서 거래하는 것만으로도 큰 돈을 벌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사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군 PX 물건'이란 이름을 내걸고 자신만만하게 동네 시장에서 물건을 팔며 돈 깨나 벌던 사람들을 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제 물건은 구하기 어려운 지상 최고의 물건으로 통용되었다. 그것이 내 어린 시절 '미국'이란 나라게 실제로 체감되어 경험되는 방식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내가 어린 시절 체감한 미국풍 물건-문화가 미군 기지로부터 흘러나와 시작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지금 유튜브를 통해 미국인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그들의 음악을 듣는 일, 혹은 해외여행으로 미국에 직접 가서 물건을 사오는 일, 혹은 미국 아마존을 통해 물건을 주문하는 행위 등에 준하는 통로 역할을 용산 미군 부대가 했던 셈이다.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없었던 시절이라는 당대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보라. 그러한 폐쇄성 속에서 미군 부대라는 경로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의 대중음악이 그 자체로 미군 부대 공연장에서 미국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한국인 음악가들이 미국의 팝송을 익히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한국 대중문화의 시작점에는 미국인들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별나라 사람들의 음악을 우러러보는 방식으로, 모방하는 행위가 있었다. 모두가 인정하듯 지금 K-팝이 전세계에서 누리는 위상은 거대하다. 그러나 작금의 위대함과 달리 그 시작점에는 미국인들의 마음에 들고자 애쓰는 이른바 제3세계인의 초라함이 있었던 것이다. 1960-70년대에는 한국들 입장에서 미국인의 환심을 사는 것이 곧 생존을 의미했다. 생존의 관점에서 익힌 미국 문화였다. 그러한 시도로부터 시작되어 이어져온 한국의 대중음악이 결국 미국 대중음악 시장을 석권하게 된 것이 2020년대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놀라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어떤 먹고 살만한 나라의 사람들이 남의 나라 문화를 그토록 죽기 살기로 익히고자 할 것이란 말인가.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렇게 했다. 혹은, 그렇게 해야만했다. 그러한 사람들이 21세기 들어 미국 문화의 새로운 계승자가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제 용산 미군기지는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져 용산공원이 될 예정이다. 그와 함께 초라했던 한국인의 과거도 점점 잊혀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대 한국 대중음악의 먼 기원의 하나가 용산 미군기지라는 사실은 기억될 필요가 있다. 사실 미군으로부터 새어 나온 신문화-신문물이라는 전통은 80년대 말 90년대 초까지도 이어졌다. 예컨대, 현진영이 증언하듯, 1980년대 말 가장 세련된 춤을 접하고 싶으면 이태원으로 가야했다. 왜 이태원인가? 미군들이 모이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군의 존재는 그토록 '별세계'를 의미했다. 사실 박진영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방식을 들어보아도 똑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미국 대중음악을 접하는 주요 통로는 다른 게 아니라 미군방송인 AFKN이었다. 즉, 1980년대 새로운 문화를 갈망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AFKN은 우주로부터 한줄기 빛과 같은 메시지가 들어오던 통로에 다름 아니었다. 

물론, AFKN의 역할은 1995년 케이블TV가 개통되고 Mnet 등이 개국하면서 끝나게 된다. 예컨대, 난 AFKN 세대가 아니라 Mnet 세대다. 개인적으로 난 AFKN에 대한 그 어떤 선망의 기억도 없다. 그러나 이는 미국 문화에 대한 선망의 기억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당시 Mnet은 미국 MTV의 프로그램을 제휴해서 보여주고는 했는데 그보다 더 신묘하고도 이상적인 음악적 세계도 없었다. 브라운관의 한 구석에 찍힌 MTV 고유의 마크를 본다는 것 자체가 마치 해외여행이라도 가는 것과 같은 느낌을 선사했다. 지금의 Mnet은 세련됨의 창구와 같지만 당시는 어딘지 모르게 MTV의 '짝퉁'과 같이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심지어 홍콩에 기반한 채널V보다도 못하다고 여겨졌다. 그 이후 벌어진 일은 인터넷 기반으로 문화 창구가 옮겨가는 것이었다. 즉, 2000년대가 되면 더 이상 뮤직비디오를 녹화하여 보기 위해 케이블 TV 앞에 앉아있을 필요조차 없게 된다. 인터넷에서 다운로드 받으면 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후 2010년대가 되면 다운로드조차 필요 없어지게 된다. 유튜브 등을 통해 스트리밍으로 전세계의 온갖 뮤직비디오를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맥락에서 볼 때 미군방송 AFKN은 유튜브의 먼 기원과 같다. 미군부대 및 미군방송을 중심으로 미국의 대중문화가 전세계로 퍼져나갔다는 사실에서 보듯 전세계에 주둔한 미국의 군사력이 그 자체로 미국의 문화 보급 창구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21세기에는 유튜브가 그 역할을 하고 있지만 20세기에는 세계적 영향력을 지닌 군사력이 그 자체로 대중문화를 전세계에 배포하는 통로였던 것이다. 조금 달리 말하면, 1989년 한국에서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기 전까지 한국인들 사이에서 미국은 어디까지나 미'군'을 의미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미군방송과 유튜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기도 하다. 유튜브를 통해 유포되는 영상은 쌍방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유튜브에서는 어느 국가에 사는 누구든 영상 제작자가 되어 컨텐츠를 유포할 수 있다. 유튜브에서 시간과 공간의 차이는 무의미하다. 이제는 그저 지구인으로서 서로 영향력을 주고 받는 일만이 벌어진다. 유튜브에서 패권국 미국의 일방적 문화 보급이라는 관점은 작동하지 않는다.

21세기는 한때 꿈동산과 같이 여겨졌던 용산미군 기지가 전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시대라 할 만하다. 사실 용산기지는 사라진 게 아니다. 오히려 세계의 곳곳이 용산기지와 같이 변했다고 말하는 편이 보다 정확하다. 그것이 지난 20세기에 미국이 전세계에 미친 물리적-문화적 영향력의 크기다. 지난 세기 동안 전세계가 얼마나 미국화되었는지 보라. 얘컨대 세계 어디에서든 미국식 햄버거를 먹고 미국 기업의 호텔에서 숙박할 수 있게 됐다. (그 결과 이제는 프랑스인도 프랑스어에 대한 자부심 따위 없이 영어로 노래한다.) 전세계적 미국화가 이루어진 바탕에는 미군기지가 있었다. 즉, 미군기지는 미국의 대중문화를 전세계에 보급하는 창구였다. 군사력이 곧 문화력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군사력이 없는 국가는 문화를 전세계에 보급을 할 수 없었다. 로마 제국이 그들의 문명과 문화를 전유럽에 퍼트렸던 방식을 보라. 군사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통적으로 문화는 언제나 군대를 따라다녔다. 그게 아니면, 종교를 따라다녔다. 선교사들의 경우가 좋은 예다. 그러나 21세기에 미국식 문화가 작동하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지금은 유튜브 덕분에 군사력이나 종교 없이도 얼마든 문화를 전세계에 보급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사실 21세기에 한국의 대중문화가 세계적 영향력을 지니게 된 배경에 바로 이 새로운 문화 공유의 테크놀로지가 있다. 아이러니는 탈미국적-탈패권주의적 문화의 공유를 가능하게 한 것이 미국의 IT 기술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아마 이것이 IT 기술이 20세기적이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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