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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과 이데올로기: 정수민의 [네오리버럴리즘]

by spiral 2020. 9. 23.

다른 여타의 사회-문화적 담론에 비할 때 음악이 누리는 특권이 있다면 그것은 음악은 언어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데 있다. 음악은 언어의 매개 없이 청자의 신체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각도 언어를 건너뛸 수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사물에는 명시적으로 이름이 쓰여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볼 때 해당 사물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예컨대, 도시에서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것들이 인간이 부여한 형상에 따라 만들어져있기 때문이다. 건축물을 하나 보면, 그것이 학교인지, 주거용인지, 가게인지, 교회인지 기타등등인지 구분을 할 수 있다. 명시적으로 '명찰'이 달려있지 않다뿐이지 무엇인가를 볼 때 사실 우리는 늘 그 안에서 '이름'을 본다. 그리고 이름이 한번 떠오르게 되면 해당 사물은 특정한 목적과 용도 등에 의해 정의내려진다. 이 지점에서 사물은 그 자신만의 고유한 물질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것이 흔히 신체에 직접 작용하는 '정동'(affect)이 언어적 구조물로서의 '이데올로기'(ideology)와 대척되는 지점에 있다고 여겨지는 이유다.

방금 음악을 언어의 외부에 있는 예외로서 언급하기는 했으나 사실 꼭 그러한 것만은 아니다. 가사가 있는 곡이 대표적이다. 가사가 붙게 되면 음악은 이미 사회-문화적 담론의 일부로 편입된 후다. 언어가 가해지지 않은 음악이라 해도 의미화를 벗어나는 것이 쉬운 일인 것은 아니다. 언뜻 언어와 관계가 없는듯 보이지만 음악 또한 화성과 멜로리, 리듬 등이 그려내는 심상이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림스키-코르샤코프(Rimsky-Korsakov)의 "왕벌의 비행"이란 곡을 생각해보라. 해당 곡에서 소리의 배치는 왕벌의 비행이 만들어내는 움직임과 호흡 등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 드뷔시(Debussy)의 "아마빛 머리를 한 소녀"라는 곡 또한, 비록 인상주의적으로 불분명해지기는 했으나, 한 소녀의 모습을 그리고자 한다. 사실 이러한 유형의 음악적 개념은 영화음악에서 극대화된다. 영화음악에서는 대부분의 소리가 내러티브가 제시하는 의미 부여에 따라 특정 감정을 고취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작곡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쟁터에서 야간에 적군이 습격하기 직전에 깔리는 음악을 생각해보라. 명시적 멜로디의 뒤에 배음을 깔아 해당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폭격 등이 가해지는 장면에서 음악은 빨라지는 인간의 심장박동수를 묘사하기 위해 비트와 리듬을 전개해볼 수 있다. 여기서 '음악은 현실을 재현하는 도구'라는 개념과 만나게 된다. 즉, 음악은 인간적 삶의 의미 지평 속에 머문다. 이러한 관점에서 음악을 들을 때, '이 소절은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능해진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의미화가 전통적 의미의 작곡 행위가 위치한 지점이다. 클래식 음악이 대표적이다. 예컨대 교향곡은 음악 양식을 통해 인간이 처한 삶의 맥락 자체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오늘날 예술가로서 음악가에게 가장 큰 도전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곡에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라는 데 있지 않다. 거꾸로 가장 큰 도전은 '어떻게 곡에서 의미화의 지평을 지울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또 그것을 실현하는 데 있다. 무엇보다, 음악에도 문법이란 것이 있으며 그것이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축적되고 전수되어온 온 역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음악가 및 청자들은 특정 소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습성을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다. 인간 삶의 의미는 자연으로 여겨지는 전통 속에서 찾아져야한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이에 대해 딱히 잘못된 것이 없다고 여길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근대적 삶의 양태가 그 어떤 삶도 당연한 것으로서 여겨질 수 없도록 만든다는 데 있다. 예컨대, 오늘날 모두가 함께 공감하며 듣는 음악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세대에 따라 그리고 이른바 '취향'에 따라 서로 다른 음악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애국가"라는 곡을 생각해보라. 모두가 아는 곡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해당 곡이 모두가 '즐기는' 곡은 아니라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애국가"에 개인의 욕망을 투사하는 부류는 소수다. 국가적 위기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대부분에게 "애국가"는 죽은 언어로 이루어진 '법조문'을 억지로 노래로 만들어 부르는 것과 같이 다가온다. 그렇다면 오늘날 음악을 '욕망'의 문제로서 다루는 자들이 모인 곳은 어디일까? '음악시장'이 그곳이다. 이른바 '프로페셔널 음악가'라 불리는 사람들, 특히나 가수의 뒤에 있는 프로듀서들을, 떠올려보라. 그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먹히는 음악'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자에 다름 아니다. 이제 음악은 사회-문화적 배경 및 취향에 따른 '니즈'와 그 '니즈의 충족'이라는 개념에 따라 만들어지게 된다. 이것이 '제2의 자연'이라 불리는 음악적 의미화의 맥락이다. 거꾸로 말하면, 이제 음악의 의미는 교향곡에서 그러하듯 단순히 작곡 행위에 의해 내재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음악의 의미는 사회적-문화적 맥락의 일부로서, 즉, 음악 외적 현상으로서, 조직된다.

바로 이 의미화의 맥락으로부터 음악을 '유행'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여기서 전제는 '특정 음악을 듣는 것은 곧 특정 '아이덴티티'를 갖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지코의 음악이 아니라 박문치의 음악을 듣겠다는 선택의 문제를 생각해보라. 두 부류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추구하려는 시도 속에서만 산출될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개성'이 의미하는 바다. 거꾸로 말하면, 이제 특정한 가수의 음악은 청자의 개인적 삶을 대변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기성세대의 관점에서 지코나 박문치 모두를 얼마든 하나로 뭉뚱그려 '요즘 세대 음악'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능하기도 하다. 이는 두 서로 다른 부류가 주장하는 '차이'란 것이 실은 어떤 더 큰 범주-한계 안에서 창출되는 효과와 같다는 뜻이다. 물론, 젊은 세대라면 그들의 섬세한 '니즈'의 차이를 간과할 때 기성세대의 둔감하게 짝이 없는 감수성이 나오게 되는 것이라고 대꾸할 것이다. 음악을 통해 새로운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내는 것이 오늘날 음악시장이 추구하는 바이듯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거꾸로 말해보는 것이 가능하다: 오늘날 음악시장은 '어떻게 곡에 정체성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라는 지평-한계 내에 머문다. 그 안에 머물 뿐 아니라, 그 밖으로 나가고자 하지 않는다. 음악을 개인의 정체성을 담는 단위로서 사고 파는 데 익숙해진 시장 입장에서 정체성의 외부는 말 그대로 상상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개성의 외부는 그저 '무'의미하다.

근본에 있어 오늘날 음악시장 속에서 작동하는 음악이, 순수한 예술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현상인 것은 바로 이 정체성-의미 지평 내에 머물고자 하는 경향 때문이다. 아이돌 음악가에게 끊임없이 따라붙는 '그들은 정말 예술가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려보라. 요즘은 아이돌 가수도 얼마든 스스로 곡을 '창조'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이 '예술가'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따라붙는다. 어째서 그러한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우리는 백종원을 예술가라고 부르지 않는 것인가? 그는 새로운 레서피와 음식을 창조해내는 자이지 않은가? 만약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예술의 행위라면 그 또한 '예술가'라 불려야 마땅하지 않은가? 혹은, 왜 우리는 아름답게 생긴 애플의 제품을 보고 '예술품'이라 부르지 않는 것인가? 왜 목수는, 예술가가 아니라, 장인이라 불리는가? 여기서 우리는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이 곧 예술의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공방에서 아기자기한 소품을 만드는 행위조차 예술적 행위라 부르고자 하는 오늘날의 상식에 반하는, 어떤 '불쾌한'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정수민으로 가보자. 그는 재즈 음악가다. 재즈의 특징은 가사 없이도 얼마든 소리를 효과적으로 개진하는 것이 가능한 양식이라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재즈를 통해 음악을 의미화의 지평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시도를 해보는 것이 대중음악 장르를 가지고 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다. 이는 한국에서 재즈가 대중음악으로서 폭넓게 수용된 역사가 없기에 더욱 그러하다. 즉, 한국인들은 설사 비언어적 재즈에 문법 있다고 해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 재즈는 서로 다른 재즈 연주자 개인 간의 차이를 지닌 장르로서 인지되지 않는다. 예컨대, 한국 재즈 연주자들 사이에서 마일즈 데이비스와 키스 재릿의 차이와 같은 형태로 인지되는 개성의 차이는 한국 대중에 의해 인지되지 않는다. 그저 재즈와 비재즈라는 거대한 단위 간의 차이를 두고 최소한의 의미 부여가 일어날 뿐이다. 달리 말하면, 한국에서 재즈는 대단히 모호하게 추상적으로 뭉뚱그려진, 의미화가 완결되지 않은, 장르다. 물론, 이는 새로운 음악적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재즈가 개인의 정체성-의미를 기반으로 한 한국 사회 혹은 한국 대중음악계 내에 정착하지 못할 위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정수민의 작업이 주목할 만한 이유가 바로 이 한국의 재즈가 처한 가능성-위험과 관련이 있다. 그의 작업이 언어-의미의 영역에 완전히 묶이지 않은 재즈에 사회-문화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의 2018년작 [네오리버럴리즘]이란 앨범을 보라.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재즈의 소리에 강력하게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해당 앨범에 실린 트랙리스트를 한번 보자: 1) Neo-liberalism 1, 2) Neo-liberalism 2, 3) 강남 478, 4) Socialism 1, 5) Socialism 2. 이들 제목 속에서 재즈는 한국적인 맥락을 부여받게 된다. '강남 478'이라는 곡이 특히 그러하다. 예컨대, 서정민갑의 리뷰에서 보듯, 이 곡을 '강남 구룡마을'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정확히 이 곡에 붙여진 언어, 즉, 제목 때문이다. 여기서 재즈의 비역사성은 한국의 역사적 맥락과 전혀 기대치 않았던 방식으로 융합되게 된다. 이른바 '예술지상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심지어 폭력적이라는 느낌마저든다. 사실 [네오리버럴리즘]이란 앨범 전체가 바로 그러한 폭력적 융합을 시도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해당 앨범이 비의미를 추구하는 재즈를 다시 의미의 지평으로 복귀시키려는 반음악적 혹은 반예술적 행위라는 뜻인가? 아마도 이에 답을 하는 과정이 곧 정수민의 [네오리버벌리즘]을 이해하는 일일 것이다.

이미 지적했듯, [네오리버럴리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곡의 제목 등을 통해 정수민이 도입하는 '언어'가 '재즈'의 비언어적 성질과 만나 이질감을 일으킨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곡의 제목이 재즈가 지닌 정동의 층위를 착취하고 파괴하는 모습과 같다. 즉, '이데올로기'가 '정동'을 착취하는 모습 말이다. '신자유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곡의 제목을 보라. 이들 용어는 단순한 한 개인의 언어이기를 넘어 사회 전체의 단위에서 작동하는 '생산양식'을 묘사기 위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들 용어야말로 삶을 폭력적으로 일반화-보편화하는 원흉인 셈이다. 미학자들이라면 치를 떨며 반대할 유형의 언어 사용법이다. 말할 것도 없이, 가사를 지니지 않은 음악은 말을 하지 못한다. 이들이 유일하게 말을 하는 방식은 언어로 된 제목을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이 언어를 다룬다고 해도 비언어적 신체는 언어에 '부분 대상' 이상의 것을 부여하고자 하지 않는다. 제유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달리는 사람을 그저 '다리'라고 부를 수 있다. 온전한 하나의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대신 다리만이 존재한다. 인간은 오직 '다리'란 말 속에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이것의 언어가 지닌 '함의'의 층위다. 즉, 사물은 언어 속에서 퇴거한다. 사물은 함의의 차원에서만 접근가능한 무엇이다. 사물은 언어와 일대일로 교환가능하지 않다. 혹은, 조금 다른 맥락에서, 리얼리즘이 상징주의적 언어를 통해 작동하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현실이 상징을 통해 완결되지 않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반면 상징은 사물의 부분성을 현실 너머에 있는 완결된 존재로 치환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요점은 언어가 신체를 온전히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고려할 때 정수민이 사용하는 '언어'는 과격하게 다가온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음악의 신체를 모두 잡아먹고자 하는 듯이 들린다. 림스키-코르샤코프의 '왕벌'을 빌려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나 '사회주의'라는 말 속에서는 왕벌이라는 사물이 살해당한 후 분쇄되어, 왕벌의 다리 한 가닥도 남기지 않은 채,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 모든 사물이 잡아먹힌 후 언어의 순수한 추상성만이 남겨진 모습이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온전한 대상을 표상하는 상징주의 언어의 반대편 극단에 위치한, 그 어떤 두께도 지니지 않은, 추상적 표면으로서의 언어다. 이 지점에서 언어를 통해 음악은, 말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자신의 신체 자체를 잃게 되는 역설 속으로 빠져든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언어 및 의미의 외부에 위치한 '정동'이 말하는 물질성 혹은 신체성은 어떠한 종류의 것을 말하는가? 책상의 물질성을 생각해보라. 정동은 책상이 지닌, 오감에 작동하는, 시각적-촉각적-후각적-미각적-청각적 층위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와는 다른 무엇을 뜻하는가? 여기서 앞서 던진 질문으로 되돌아가야한다: 어째서 아름다운 아이폰은 예술이라 불리지 않는가? 어째서 오감을 만족시켜주는 맛있는 수제버거는 예술이라 불리지 않는가? 어째서 백종원은 예술가라 불리지 않는가? 혹은, 어째서 완결된 대상이 아니라 부분 대상이 중요한가? 여기서 요점은 언어의 외부에 있다고 여겨지는 정동이 의외로 오감을 통한 체험과 아무 상관이 없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는 데 있다. [네오리버럴리즘]으로 되돌아가자. 이러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만약, 상식에 따라 생각해보았을 때, 해당 앨범의 제목과 그 안에 실린 곡의 제목이 추상적이며 재즈의 물질성을 살해하고 있는 것이라면, 제목 없이 앨범을 들을 때 우리는 거꾸로 마침내 구체적 삶과 만날 수 있다는 뜻인가? 정수민의 앨범이 보여주는 것은 정반대의 경우다. 즉, 제목 없이 들을 때 [네오리버럴리즘]에 실린 곡으로부터 특정한 심상을 떠올리는 것은 그저 불가능하다. 귄터 안더스(Günther Anders)가 묘사한 재즈의 특징을 생각해보라. 재즈는 기계적 절단으로 이루어진 음악이다. 그에 비해 정수민의 앨범을 통해 '신자유주의'란 말을 듣게 될 때 우리는 적어도 1997년 IMF 사태 이후 겪었던 삶의 애환 등을 떠올릴 수 있다. 예컨대, 정수민의 팬들이 "강남 478"이란 곡에 애착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 있다. 즉, "강남 478"은 정확히 '네오리버럴리즘'이라는 표어하에서 사랑스럽다. 여기서 [네오리버럴리즘]의 극단적으로 추상적인 언어가 사실은 정동 자신의 산물이라는 점을 볼 수 있다. 즉, 정동에 구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정동 자신이 산출하는 언어의 추상성이다.

추상화의 충동을 지닌 정동이라는 문제틀 속에서 음악의 정동과 역사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첫째로, 정동은 '네오리버럴리즘'이라는 말이 지시하는 역사의 하층부를 이룬다. 즉, 정동은 역사 내부에서 이데올로기에 의해 착취당하는 기저 영역을 이룬다. 예컨대, 정동은 착취당하는 신체의 문제다. 영화 [메트릭스]에서 인간의 신체가 처한 상황--캡슐 속에 갇힌 신체--을 떠올려보라. 그러나, 둘째로, 바로 그 자체로서, 정동은 역사의 외부에 위치한다. 즉, 극단적 추상성을 발생시키는 것은 정동 자신이지 그 어떤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사회-문화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여기서 정동은 더 이상 물질적 신체의 문제이지 않다. 정동은 새로운 형이상학적 개념을 창출하는 문제가 된다. 즉, 이 지점에서 '신자유주의' 혹은 '사회주의' 같은 용어는 구체적 삶을 파괴하는 동시에 한 점의 살(a piece of flesh)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는 '부름'(calling)의 문제가 된다. 여기서 요점은 '신자유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말이 더 이상 그 어떠한 기존의 경험적-실질적 내용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신자유주의' 혹은 '사회주의'는 텅빈 추상성 그 자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거꾸로 정확히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그로부터 삶의 구체성을 다시 쓰지 않으면 안되는 지점으로 내몰리게 된다. 달리 말하면, 삶의 구체성은 표면 밖에는 없는 추상적 무의미가 부름으로 경험될 때 그에 대한 답변으로서 조직된다. 거꾸로 말하면, 형이상학은 천상에 있거나, 혹은, 육체성의 지하에 갇혔다고 여겨지는, 대문자 존재(Being)가 신내림을 통해 내려오거나, 혹은, 악의 소굴인 지하로 내려가는 일이지 않다. 형이상학은 두께가 없는 표면의 문제, 즉, 무의미(nonsense)의 문제다. 질량을 결여한 표면의 찢어진 틈새로부터 산출되는 것은 완결된-완성된 존재자 또한 아니다. 거꾸로 부분 대상이, 그로부터, 기어나온다. 다시 앞서 던진 질문으로 되돌아가자: 어째서 오늘날 곡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예술가이지는 않은 것인가? 이른바 '예술의 창조성'이란 것이 의외로, 만져지는 삶의 구체성 혹은 순수 예술적 구체성이 아니라, 경험되지 않는 삶의 추상성--조금 다른 맥락에서 이를 '수학적 추상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즉, 수학은 익숙한 삶의 경험적 층위의 파괴를 뜻한다--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즉, 예술은 추상적 '부름'과 구체적 '신체' 사이에 개재하는 조합과 배치의 문제다. 정수민의 [네오리버럴리즘]이 주목할 만한 작품인 이유가 여기 있다. 예술적 신체로 하여금 이른바 가장 반예술적인 추상성을 폭력적으로 예술 내부로 가지고 들어와 스스로를 고문하고 착취하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정수민의 [네오리버럴리즘]이 부름과 응답이라는 기로에 서 있다면, 질문이 하나 남는다: '그렇다면 어떤 부름에 답할 것인가?' 정수민이 제시하는 부름은 두 종류다. 1) 신자유주의, 2) 사회주의. 당신의 한 점 살과 피는 신자유주의에 바쳐졌는가? 아니면 사회주의에 바쳐졌는가? 앨범의 흐름을 보자. '신자유주의'로 시작해 '사회주의'로 끝난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강남 구룡마을'이 위치해있다. 앨범의 방향성은 명백하다: 신자유주의의 종식과 그 폐허가 구룡마을에서 발견된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사회주의가 일어나는 지점 또한 바로 그 동일한 폐허 위에서다. 마지막 곡, "Socialism 2"을 한번 보자. 해당 곡의 특징은 앨범의 첫번째 곡 "Neo-liberalism 1"과 대칭을 이룬다는 데 있다. 첫번째 곡이 가장 종잡을 수 없는 파편적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비해, 마지막 곡은 선언적이다. 마지막 곡이 드럼 소리를 강조하며 시작하는 방식을 보라. 여기서 재즈는 신자유주의로부터 신체를 소환하여 사회주의로 이끄는 정동의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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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liberalism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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