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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 케이팝, 미래의 남성과 욕망하는 여성, 그리고 새로운 보수

by spiral 2020. 10. 7.

BTS에 대해 이야기해볼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BTS가 지금까지 내 관심사가 된 적이 없으며 딱히 그러할 이유가 없다고 여겨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는 'BTS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이 음악 비평의 대상으로서 그들에 대해 내가 느끼는 어떤 거리감과 관련이 있다는 말과 같다. BTS가 내 주된 관심사가 아닌 이유는 단순하다. 주류 음악을 음악 자체로서 논하는 것이 흥미로운 일이 아니라 여기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제는 한국인 입장에서 볼 때 BTS의 음악은 정확히 '주류 음악'에 속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인이 보기에 지금 BTS는, 손흥민 등과 더불어, '해외에서 국위를 선양'하고 있는 '한국의 기특한 젊은이'이지 않던가? 사실 BTS는 단순한 음악가 이상이다. 그들은, 이미 말했듯, 예컨대, 동시대 한국의 가장 훌륭한 축구 선수와 동일한 선상에서 논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가와 축구 선수라니 이상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는 '문화'와 '체육'을 서로 다른 두 분야로 나누는 것을 참을 수 없어하는, 더 나아가 그 둘에 '관광'까지 합쳐서 '문화체육관광부'를 하나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감수성과 비슷한 무엇이 결부되어있다. 다시 말해,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오늘날 문화는 더 이상 순수 예술의 문제일 수 없다는 감수성이다. 동일한 감수성을 가지고 BTS에 접근해볼 수 있다. 즉, BTS는, 순수 음악 비평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사회-문화적 현상으로서 논의되어야한다.

다시 말해보자: 사실상 오늘날 한국의 애국 담론의 한가운데 서있는 BTS는 한국 문화계의 주류 중 주류다. 20세기초 일제의 침략을 겪은 후 한국 사회에서 주류란 '해외에서 외국인에 의해 인정받은 자'에 다름 아니지 않았던가? 그러나 정확히 이 주류 애국 담론의 중심에서 한국인으로서 우리는 '다 좋은데, 대체 어째서 BTS인 것이지?'라는 의문에 빠져든다. 다시 말해, 한국인이 전지구적 BTS 현상에 대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예컨대, '어째서 저들은 노래 실력이나 춤 실력이나 작곡 및 기획 능력 등이 다른 한국의 음악가 혹은 다른 해외의 음악가에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출중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다. (이러한 유형의 질문이 핵심적이었던 시절이 바로 1990년대다. 예컨대, 서태지를 '문화대통령'으로 만든 바탕에 있는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이 질문의 유효성은 '비'로 대변되는 2000년대 '깡의 시대'까지 이어진다. 반면 BTS로 대변되는 2020년대는 '포스트-깡' 시대라 불릴 만하다.) 물론, BTS가 보여주는 '실력'은 한국 주류 대중음악이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것 중 하나다. 세계적 음악 산업의 관점에서 보아도 최상위권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매일 같이 이른바 케이팝(K-Pop) 및 온갖 나라의 팝음악을 접하고 사는 한국인의 기준에서 보기에 BTS가 유례 없는 실력을 보여주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상한 의문에 빠져들게 된다: '대체 어째서 BTS에 이토록 열광하는 것이란 말인가?' 

위의 질문으로부터 알게 되는 것의 하나는 한국인이 보는 BTS와 서구인이 보는 BTS 사이에 어떤 큰 차이가 개재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BTS 현상에 관한 '비밀'을 푸는 열쇠는 '어째서 한국인이 보기에 BTS의 음악은 저토록 훌륭한가?'가 아니라 '어째서 서구인이 보기에 BTS는 열광할 만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데 있다. 여기서, 첫째로, 현재 BTS로 지칭되는 것이 전지구적 문화현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BTS는 한국인을 위한 한국적 음악 현상이 아니다. 거꾸로 말하면, BTS는 지구 내 한 지역의 대중음악을 대변하는 용어인 '케이팝'(K-Pop)으로 분류된 음악 장르로서 작금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지 않다. 그보다는 훨씬 더 보편적이고 전지구적인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는 BTS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던 시점에 이미 그들이 케이팝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예컨대, 월드팝(World-pop) 혹은 글로벌팝(Global pop)으로서 여겨졌다는 뜻인가? 그렇기에 다른 케이팝 가수와 달리 지금과 같이 거대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아니다. 이른바 '한국적인 것'에 대한 관심 없이 BTS에 대한 관심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한국적인 것'이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생각하는 '한국적인 것,' 예컨대, BTS를 통해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느끼는 주류적 삶에 대한 자부심 및 애국심 등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 요점이다. 오히려 서구인들에게 '한국적인 것'은 우리가 느끼는 주류적 감수성과 정반대되는 것, 즉, 비주류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발견해낸 '한국적인 것'이 비주류적 틀 안에 머물고 끝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찾아낸 '한국적인 것'은 '보편성'의 문제와 맞닿아있다. 서구인이 BTS를 통해 인지하는 '한국적인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BTS가 이른바 '보편적' 혹은 '전지구적 월드팝'으로서 주목을 받는 독특한 방식을 이해하는 일인 이유가 여기 있다.

케이팝이 최초 서구인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진 이미지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자. 다양한 담론이 있겠지만 최초 케이팝은 서구인들 사이에서 흔히 '게이팝'(Gay-Pop)으로서 받아들여졌다. 예쁘장하고 슬림한 남자아이들이 여자처럼 화장하고 나와서 춤과 노래를 선사하는 음악이라는 경멸적 의미의 용어다. 여기서 서구인들이 케이팝을 국지화하는 방식을 볼 수 있다. 즉, 서구의 주류 백인 대중이 중심이 되어 규정한 월드팝의 보편성이 유지되기 위해서 타지역의 팝음악은 특수한 예외 사례로서 처리되어야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쁘장한 남자 아이들이 나와서 춤을 추고 노래하는 케이팝은 인간적-남성적 보편성을 결여한, 특이하여 때때로 즐길 만하지만, 큰 가치를 지니고 있지는 않은 일탈적 사례와 같다. 여기서 거꾸로 서구의 백인 주류 사회가 근육질 영웅의 남성성을 기본값으로 세워진 문명임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서구의 서사시 전통을 보라. 호머(Homer)의 [일리어드](Iliad)에 나오는 신과 같은 영웅들, 그리스 비극에 나오는 '휴브리스'(hubris)로 파멸하는 영웅적 인물들을 보고 자란 것이 그들이다. 비록 파멸의 원인이 될지언정 그 파멸의 중심에 있는 것은 모두 남성적 영웅성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Oedipus Rex)을 보라.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적 파멸이 보여주는 삶의 방식을 준거로 삼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는 남성적 사고 방식을 서구 사회의 의미화 모델로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전통이 너무도 강력했던 이유로 이른바 '페미니즘 비평'이 거꾸로 남성적 비극 속에 등장하는 '안티고네'(Antigone)와 같은 여성 인물에 관심을 두고 '다시 읽기'를 했던 것이지 않은가? 반면, 한국 문학에서 '영웅 서사시'는 찾아볼 수 없다. 한국 문학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온 이유로 없는 것인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인지 확인할 바 없으나, 적어도 한국에서 초중고교 국어 시간에 배우는 영웅 서사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볼 수 있다. 예컨대, 단군신화의 주인공은 심지어 남자조차 아니다. 여자 곰이다. 이야기 구조도 영웅적 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저 얼마나 맛없는 것을 잘 참으며 견딜 수 있는지, 곰같은 인내심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다시 말해, 여기서 영웅적 행위는, 만약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행위하지 않고 멈추어 참는 데서 발견된다. 단군신화 이외에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청산에 살고 싶다'고 말하는 고려 시대 가요 [청산별곡] 정도다. 그 또한 내용이, 영웅적 행위가 아니라, '삶의 비애'에 관한 것이다. 서구 문명의 주류적-남성적 관점을 내재한 사람들 사이에서 여성적 외모를 지닌 케이팝이 소수자의 국지적-비주류적 현상으로 여겨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관점에 따르자면 케이팝은, 실력은 출중하나, 나약한, 즉, 사회의 중심에 설 수 없는, 여성화된 인간들이나 하는 음악이다. 

한국인이라면 방금 묘사한 케이팝의 이미지가 낯설다고 느껴야 정상이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 케이팝은 주류 중의 주류다. 심지어 지금 케이팝은 애국 담론의 중심에 있다. 쉽게 말하면, 한국에서 케이팝을 보고 '저것은 게이들의 음악이기 때문에 난 저런 것 안 듣는다'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예컨대, 지-드래곤의 외모는 서구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그저 '게이'다. 그러나 지-드래곤을 보고 '게이'라고 여기는 한국인은 별로 없거나 그런 이야기가 있다고 해도 별로 요점에 부합하는 이야기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지-드래곤이 게이라고 한들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 이야기일 것이란 말인가?'와 같은 심드렁함이 없지 않다. 지-드래곤의 외모는 그저 꾸미기 좋아하는 연예인 특유의 외모일 뿐이지 사회 내에서 소외된 특정한 비주류가 내보이는 국지적 '아이덴티티'의 문제가 아니라 여겨지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드래곤이란 인물이 한국의 대중 사이에서 의미하는 것은 전체 사회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유행'이 사회의 공적-문화적 영역에서 규정되는 방식이다. 그의 옷차림은 지-드래곤 개인의 성적 지향 등의 아이덴티티에 기반한 것으로서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많은 한국인들이 (서구인들이 보기에는 줏대도 없이) 지-드래곤의 차림새를 따라하고 그를 '유행'의 모범으로 삼기조차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밑바탕에 있어서 한국 사회의 '유행'은 개개인의 삶과 목소리에 바탕을 둔 '개성'과 '다양성'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심지어는 지-드래곤이 '개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의 '스타일'은 일견 '개성'의 표현인 듯이 보인다. 그러한 면이 있다. 그러나 그의 스타일은 진솔한 개인의 목소리를 지우기 위한 알리바이와 같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의 노래를 통해 전해 듣지 못하는 것이 바로 지-드래곤 개인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근본적으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그가 랩퍼로서 노래하는 것이 '고백적 자아'를 상실한 '자랑질' 뿐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의 사생활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이, 예컨대, 그가 숨어서 하는 마약에 대한 관심 등의 형태로, 외설적으로 따라붙게 된 것이라 유추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런 외설적 관심 이외에는 그의 정체를 파악할 방도가 없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개인의 고백적 자아'를 대신하는 것이 '대마초'인 것이다. '개인의 내면'이 아니라 '대마'가 음악가의 '영혼'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드래곤은, 개성의 문제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언제나 '음악산업'과 '대세'의 문제와 같았다. 그들이 써내는 가사의 요점은 언제나 결국 '내가 제일 잘 나가'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한국의 대중음악이 케이팝의 형태로 서구에 정착하게 되면, 방금 묘사한바 한국인이 지닌 트렌디한 경향은, 모든 것을 개인의 다양한 삶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즉, 개성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주류 서구인의 관점에서 재해석되게 된다. 그 결과, 서구인들의 눈에 비친 케이팝에 따르자면, 예컨대, 한국의 남성은 대부분이 '게이'다. 왜냐하면, 개성과 개인의 내면을 중요시하는 관점에서 따지자면, '게이'가 아니고서 저러한 여성적 차림새를 하는 것은 개인의 삶이 기반한 진정성을 배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들의 관점에 따라 티비 속에 묘사된 한국 남성, 예컨대, 케이팝 가수를 보게 되면, 한국에는 남성 일반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기이한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사실 이는 그리 기이한 일만은 아니다. 서구인들 사이에서 무의식중에 의도되는 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실제로 '식민지 남성의 여성화'는 과거 서구가 그들의 세계 제국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도입한 문화적 장치이기도 했다. 제국의 중심에 있는 서구인만이 상징적 의미에서 남성으로 여겨져야 식민지 남성들을 손쉽게 지배할 수 있으니 말이다.

반면 최근 우리가 보는 BTS 현상의 독특함은 해당 현상이 '제국의 변방에 위치한 여성적 남성'이라는 개념에 뒤틀림을 가하고 있다는 데서 발견된다. 즉, BTS 현상와 함께 전지구적 맥락 속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상에 독특한 뒤틀림이 가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마침내 BTS가 의미하는 한국성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BTS가 표상하는바 남성성에 가해진 뒤틀림은 서구인들 특유의 관점이 스스로 창출해내는 독특한 결과와 같다. 예컨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주류 담론과 달리, 학계 등의 지지를 받는 서구의 비주류-진보 담론이 LGBT+에 우호적이라는 맥락을 보아야한다. 여기서 요점은 이른바 그들의 '진보적' 문화 담론이, 미국 내 온갖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그들의 문화적 창의성-혁명성에 주목하는 것에 비해, 주류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그들 소수자의 현실은 여전히 '기이한 것' 혹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것'으로서 배척되고 은밀히 멸시당한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여기서 미국 학계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해선 곤란하다. 미국 내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즉, 미국 대학에서는 비판적 담론에 기여하는 양질의 도서가 매해 쏟아져나오지만 대학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는 많은 미국인들에게 그러한 담론은 그저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말하자면, 진보적 담론은 미국에서 '그들만의 리그'다. 예컨대, 중산층 백인 남성의 우월적 지위를 대놓고 옹호하는 트럼프 지지자의 주요 세력 중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저학력 일용직 노동자층이다. 이러한 서구의 맥락 속에서 보자면 '게이팝'으로 여겨지는 케이팝의 나라 한국은 그 자체로 비주류적인 것이 득세하는 놀라울 정도로 '진보적'인, 혹은 이상할 정도로 미래지향적인, 나라로 현상한다는 것이 요점이다.

케이팝에 대한 서구인들의 관심이 막 시작된 시점에 케이팝 가수들의 외모가 지닌 '비주류적인 것'이 미국내 소수자의 취향에 부합했을 것이란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국 사회 내에서 소외된 비주류들이 보다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대안 음악'으로서 케이팝이 주목을 받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예컨대, BTS를 듣고 삶의 희망을 얻게 되었다는 서구 청소년들의 진술을 보라. 그들이 백인 주류 문화의 중심에 있는 자일 것이라 생각해선 오산이다. 주류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이 그러한 좌절 속에서 살아갈, 그리하여 BTS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될 조건 속에서 살아갈, 확률은 애당초 별로 없기 때문이다. 애초 케이팝 및 BTS에 관심을 둔 사람은 개성이 강조되는 미국 사회 속에서 공적으로 인정받는 개성을 지니지 못한 결과 방황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즉, 이는 BTS가 이미 '대세'가 된 현단계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지금은 서구의 주류 백인들도 BTS를 즐긴다. 쉽게 말해, '대세'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들이 결여한 개성이 '백인 중산층 주류'로서의 아이덴티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미국 내에도 비주류 감수성을 지닌 음악이나 음악가는 넘친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소수자를 대변하는 미국 내 대중문화를 대안으로 삼아 공적으로 내세우기에는 그들 소수자 입장에 리스크가 가해진다는 데 있다. 즉, 그러한 음악을 자신의 아이덴티티로 내세울 경우 미국 대중 음악의 지형도 속에서 만들어진 선입견에 따라 자동적으로 '쟤, 이상한 얘야, 가까이 가지마'라는 소리를 듣기 쉽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최근 미국의 비주류 음악은, 다만 자기만의 세계에 과도하게 빠져 기괴할 수 있거나 혹은 다만 세속을 잊은 채 소박할 수 있기만 할 뿐, 주류로서 다시 서도록 만들어줄 보편적 희망의 메세지 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 입장에서 듣기에 가사 등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한국 가수의 음악은 그저 주류적으로 평범할 뿐이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의 선을 넘나드는 비주류적, 즉, 서구의 백인 남성성의 주류 질서에 반하는, 외모를 한 동양인이 그러한 메시지를 내놓는 것을 서구의 비주류 청자가 듣게 되면 그들 사이에서 독특한 반향이 발생하게 된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성적 소수자가 나와서, 개인의 성적 정체성에 관한 국지적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 보편의 가치를 내세우는 것과 같다. 이러한 그림은 지금까지 서구인들이 경험해본 적 없는 감흥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한국인들이 바라보는 케이팝과 서구인이 바라보는 케이팝 사이에 놓인 근본적 차이를 볼 수 있다. 아주 단순화해서 말하면, 서구인들에게 케이팝은 주류판을 뒤엎는 '언더독'(underdog)의 이야기 구조를 지닌 것으로서 현상한다. 즉, 서구의 젊은이들이 BTS를 통해 언더독이 세상의 주류로 올라서게 되는 유토피아적 열망을 구현하는 면이 있다는 뜻이다. 이는, 개인의 정체성에 기반한 것으로 느껴지는 동시에 개인의 성적-인종적-계급적 정체성 등에 매몰되는 특성을 지닌 미국식 개인주의적 이야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기도 한 집단성의 경험을 그들에게 선사한다. 그래서 그들이 그토록 열정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한국인의 관점에서 케이팝의 비주류성은 상상하기 어려운 요소다. 애국 담론의 중심에 있는 주류 중의 주류이기 때문이다. 우린 이렇게 느껴야 정상이다: '세상에 케이팝이 소수적 취향의 문제로 여겨질 수도 있다니!' 케이팝이 주류로서 군림하는 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시초문의 이야기다.

여기서 한 가지 드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어째서 한국의 케이팝은 서구의 주류 문화로서는 허락하기 어려운 '진보성'을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일까?' 사실 그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서구의 음악 장르를 수입하여 받아들임으로써 대중음악계를 산업화하고자 했던 1990년대 이후 한국의 대중음악 입장에서는 미국의 비주류 대중문화가 지니고 있었던 참신성이 그 자체로 중요했기에 미국 주류 사회에서는 금기시되는 비주류 소수자의 문화적 코드도 얼마든 자유롭게 도입하여 주류문화로 만들어내는 것이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힙합 음악이 대표적이다. 사실 미국 백인 주류가 흑인의 힙합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힙합 음악이 그 자체로 자신들의 주류적 삶의 방식에 대한 공격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힙합은 그저 젊은이들이 한때 일반적으로 표출하는 반항심을 잘 담아내는 트렌디한 음악의 하나로서 보다 보편적으로 수용된다. 한국의 힙합 음악이 인종이나 계급에 따른 비류주적-소수적 맥락을 강하지 가지고 있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한국 사회의 한 가지 중요한 특성을 엿볼 수 있다. 즉, 서구 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 비할 때 한국 사회는 훨씬 더 문화적-인종적 동질성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예컨대, 미국에서 흑인들이 슬럼가에 살며 백인 경찰에게 큰 이유도 없이 심문당하고, 사살당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극단적 인종적-계급적 이질성은 한국 사회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최근에는 한국 사회에서도, 예컨대, 남녀간 및 나이간 갈등이 강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총으로 서로를 쏴죽이는 미국 사회의 계급간 및 인종간 적대성에 비견할 만한 분열은 아니다. 

최근 서구인들, 특히 미국인들이, BTS를 전지구적-보편적 문화 현상으로서, 즉, 월드팝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원인 중 하나가 사실 바로 이 한국 사회 특유의 동질성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점을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최근 미국 대중문화가 내보이는 특징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팔뚝에 힘 딱 주어 도드라지게 된 근육의 모습 등을 묘사하는 '플렉스'(flex)라는 말이 '자랑질한다'는 말로 발전한 것처럼 미국의 문화는 이른바 남의 눈치 안보고 과도하게 자기 자랑을 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흑인 힙합 문화의 '플렉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훨씬 더 사려깊게 그들이 겪은 노예제 경험이라는 맥락을 고려해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지금의 시점에 그들의 '플렉스' 문화가 피로감을 선사하고 있으며, 알고 보면 아무 내용이 없기에, 그저 천박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한때는 그 모든 것이 답답한 주류적 질서에 저항하는 '반항적 청년문화'였다. 1960년대 저항적 히피 문화, 지미 핸드릭스(Jimi Hendrix), 1990년대 반항적 청년 문화의 상징 커트 코베인(Kurt Cobain) 등을 떠올려보라.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클리셰가 된 지금은, 거칠게 말하면, 그저 '타락한 무리들'이 판을 치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 미국 대중문화다. (물론, 이는 미국에 재능 있는 음악가가 없다는 뜻이 아닌다. 여전히 넘친다. 수적으로 그 저변의 역량을 따지자면 한국보다 더 풍요로울 것이다. 다만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고 문화적 이슈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 차이다.) 미국인들이 그저 개인의 아이덴티티와 재력을 자랑할 뿐인 대중문화에 알게 모르게 식상함과 피로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즉, BTS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대중문화가 처한 맥락을 보아야한다. 결과적으로, 한국인에게는 표준적인 이들 한국 청년의 세계관은 미국인들이 보기에 너무도 '건전'하고 '건강'하다. 예컨대, 유엔에 가서 전세계인들에게 메세지를 내놓는 힙합 가수를 상상할 수 있는가? 미국 청소년의 부모들조차 BTS를 듣고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이다. 과거 그들 부모의 행태를 생각해보라. 미국에서 1970-90년대 메탈-록 음악이 유행했을 때 '사탄의 음악'이라며 청소년들이 그들 음악을 듣지 못하게 해야한다고 했던 그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그들의 자식이 듣는 BTS를 같이 듣고 있다. 쉽게 말해서 미국의 부모들이 보기에 BTS는 '착한 음악'이다. 적어도 미국의 '타락한 대중 문화'에 비교하자면, 심지어 부모들도 같이 들을 수 있는 게 BTS다. 세계 평화와 공정성, 불의에 항거하는 메시지를 내는 올바른 청년은 미국 대중 문화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물론 대신 그들은 '슈퍼히어로'들을 지니고 있다. 차이는 '슈퍼히어로'들은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수퍼맨이나 스파이더맨 등은 유엔에서 연설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BTS는 그러한 '오래된, 한때 구태의연하다고 여겨진, 보편적 메시지'를 내놓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보편성' 내지 '동일성'은 미국 문화에서는 찾기 어려운 것이다. 반면 한국에서 '동일성'은 아직까지도 그렇게 드문 현상이 아니다. 한국적인 것이 '보편성'을 지니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다. 

그러나 여기서 BTS의 음악을 단순히 '모범생' 음악으로 여기고 마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다. 왜냐하면, 앞서 이야기했듯, 서구 주류의 눈에 케이팝은 기본적으로 비주류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금 미국의 청소년들이 BTS를 들을 때 그것은 단순히 그들의 음악이 '착하기' 때문이 아니다. 다시 말해 BTS는 1980년대 한국에서 '건전 가요'라고 묘사했던 음악이 아니다. 여기서 BTS를 열정적으로 소비하는 서구의 청자가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BTS 현상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것은 욕망과 섹슈얼리티의 문제다. 즉, BTS는 그들이 내놓는 메세지가 착할 뿐 아니라 착하도록 섹시한 신체를 지니고 있다. 관련하여, 최근 미국 학계 등의 문화 담론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키워드 중 하나가 '유독한 남성성'(toxic masculinity)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지금 미국 사회는 과거의 근육질 남성 문화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퇴행적이라 느낀다. 말하자면, 미래는 '해로운 남성성'이 '새로운 남성성'으로 치환될 때 찾아올 것이란 생각이다. 이것이 과거 미국의 비주류-소수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일반적 정서다. 반면 지금 10-20대 청소년과 젊은층은 그러한 정서를 말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제는 여성들도 성적 주체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다. 여기서 핵심적 질문은 다음과 같다: 성적 주체로서의 여성에 상응하는 미래의 남성성은 어떠한 형태일 것인가? 

오늘날 사회에서 '유독한 남성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성적 주체로서의 여성성에 가해지는 장애물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남성성은 어떤 형태로 올 것인가? 그 한 가지 형태가 BTS에게서 발견된다는 것이 서구 여성들이 BTS에 열광하는 이유 중 하나다. 다시 말해, 그들이 보기에 BTS는 남성성을, 단지 욕망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또한 욕망의 대상으로서 전시할 줄 아는 남자들이 현실화된 판본과 같다. 기존 남성성의 요점이 어디에 있었는지 생각해보라. 남성은 오로지 '욕망의 주체'로서만 규정되었다. 거꾸로 말하면, 남성은 욕망의 대상을 그 자신의 외부에서 찾는 자로서 규정되었다. 그러한 이유로, 기존의 남성은 그들 자신을 남들 앞에 욕망의 대상으로서 전시하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예컨대 남성적 욕망을 기초로 그려진 성인 웹툰을 보라. 그들의 특징은 여성의 신체는 아주 섬세하게 육감적으로 묘사하는 반면 남성의 신체는 거의 그림자와 같이 그려낸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남성은 애당초 시각적 신체를 지니고 있지 않은 존재로 여겨진다. 데카르트적 관점에서 말하면 이것이 '코기토,' 즉, 신체가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남성적 합리성 혹은 이해력(understanding)이 뜻하는 바다. 그러나 이는 남성이 신체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연약한 여성적 신체보다 훨씬 더 도드라지는 근육질 신체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요점은 그들의 '근육질 몸'이 욕망의 대상을 포획하기 위한 힘을 지닌 기계장치로 작동한다는 데 있다. 여기서 남성의 신체는 시각적 전시의 대상이 아니라는 정의가 나오게 된다. 남성의 신체는, 포획당하는 아름다운 대상이 아니라, 포획을 행하는 기계장치와 같다. 포획 능력은 '욕망의 주체'가 지닌 기본적 특성이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하다. 여성의 신체에 비할 때, 타고나길 남자의 신체는 미학적 층위를 결여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요컨대, 흔히, 가늘고 섬세한 선이 아닌, 굵고 투박한 신체의 선을 지닌 것이 남성이라고 여겨진다. 그러한 신체는 일반적으로 '품고 싶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러한 신체는 거꾸로 '품는 기계'라 할 만하다. 바로 이 강력한 '품는 기계'로서의 자질을 상실한 신체를 '게이'라고 경멸적으로 칭하고자 하는 것이 전통적 남성 질성가 그 자신을 유지-보수하는 방식이다. 동일한 이야기를 여성의 신체에도 적용할 수 있다. 즉, 모든 여성의 신체가 가늘고 섬세한 것은 아니다. 남성적 신체의 특징을 지닌 여성들도 많다. 남성 사이에서 섬세한 신체의 선이 '게이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로 가리워져야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여성 사이에서 남성적 신체의 특성은 이른바 여성적이지 못하고 우악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까닭에 가리워져야한다. 남자들이 자신의 섬세한 신체의 선을 지우기 위해 '단백질 보충제'를 먹고 '피트니스 센터'에 갈때, 여성들이 자신의 신체가 지닌 굵은 선을 지우기 위해 화장 및 성형수술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예컨대, 전통적 남성미의 상징인, 이른바, '종아리 알(통)'을 제거해준다는 기적과 같은 장치에 관한 광고에 휘둘리기란 얼마나 쉬운 일이던가? 여성성'을 이른바 '코르셋'이라 부르며 그로부터 탈출하고자 할 때 여성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더 이상 그 자신의 신체를 성적 대상으로 포장하고 싶지 않다는 선언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성적 주체로서의 여성'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즉, '나도 내가 원하는 성적 대상을 포획하고 싶다'는 것이 그 요점이다. BTS 열풍과 함께 최근 서구의 여성 사이에서 '동양인 남자 친구를 소유하는 것'이 유행인 이유를 생각해보라. BTS 현상이 뜻하는 것은 스스로를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전시하는 남성들이 드디어 주류 사회에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욕망하는 여성들 입장에 복음과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새로운 남성성 혹은 새로운 남자의 한가지 특성이 '그루밍하는 남자'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남성적 신체를 지닌 여성들이 '탈코르셋 운동'과 함께 해방의 기쁨을 누리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지금 남성들은 화장 등을 통해 자신의 신체를 아름답게 꾸미며 해방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바로 이 해방의 기쁨을 가능케 하는 두 축이 '서구의 욕망하는 여성'과 '한국의 그루밍하는 남성'이라 말해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서구에서 BTS를 통해 케이팝이 보편적 현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 생각보다 파격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기존에 '여성적 남성성'이라 여겨져 경시되었던 요소가 주류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완전히 승인되어 주류문화로 편입되는 일이 벌어지는 격이기 때문이다. 따져보자면, 서구의 주류 남성의 입장에서는 한국의 BTS를 통해 '여성적 외모의 남성'을 주류 문화 내부로 받아들이는 것이 보다 현실적인 방법일 것이다. 즉, 변화하는 세상을 어찌해볼 수 없다면 수용을 해야한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주류 입장에서 취할 수 있는 일말의 타협점이 주어져야한다. 그것이 그들에게 한국의 BTS일 수 있다. 왜냐하면 BTS는 어쨌든 서구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여성적 외모를 과시한다고한들 기존 서구의 남성성에 직접적으로 위협이 가해진 것은 아니라 여겨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쁜 BTS가 그렇게들 좋다고 하는데, 그래, 즐겨라, 대신 나에게 강요하진 말고, 왜냐하면 동양인은 원래 표준이 아니라 예외인 것이니까'라는 무의식적 정당화가 그들 사이에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번 시작된 이 범주 구분의 재설정은 그렇게 손쉽게 잘라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주 보게 되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비주류 문법이 어떻게 주류 문화로 발전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야오이'라 불리는 만화 장르가 작동하는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겉보기에 게이물과 여겨지는 '야오이'의 역설은 그 주된 독자가 여성이라는 것이다. 주류 문화에서 남성 캐릭터가 성적 관음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문법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주류 문화에서 남성은 언제나 주도권을 쥐고 여성을 이끌어간다. 그러한 관점에서 남성이 스스로를 성적 대상으로 만들어 여성을 유혹할 필요는 전혀 없다. 거꾸로 여성이 언제나 자신을, 육감적으로든 조신한 상냥함으로든, 남성 앞에 자신을 전시하여 선택받도록 만들어야한다. 남성 입장에서 거꾸로 바로 이 구조 때문에 '여성이 나를 유혹한 것이다'라고 여기게 된다. '야오이'에서는 이 문법이 얼마간 전복되어있다. 그곳에서는 남성이 벌거벗겨져 아름다운 육체를 전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남성이 다른 남성에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전시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다시 말해, 남성의 발가벗겨진 여성적 신체를 음미하는 파트너 남성의 시선 속에는 기존의 남성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기도 하다. 여기서 욕망하는 여성이 동일시하는 것은, 물론, 여성적 신체를 지닌 남성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남성의 여성적 신체를 음미하는 상대 남성의 이른바 '주체적' 혹은 '포획장치적' 시선이다. 여성적 남성의 신체를 즐기는 또 다른 남성의 시선을 빌려서 욕망을 구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과거 욕망하는 여성들이 '여성화된 남성의 신체'를 은밀하게 즐긴 방식이다. 이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현실 속에서 흔히 보게 되는 '욕망하는 여성'으로 나가가기까지 그리 먼 걸음을 떼지 않아도 된다. 예컨대, [유튜브] 등에 공개되는 레즈비언 커플들의 브이로그를 생각해보라. 꽃미남 왕자처럼 '보이시'하고 아주 섬세하게 잘 생긴 여성과 흔히 여성으로서 예쁘다고 여겨지는 유형의 여성이 한 커플이 되어 영상에 나와 키스를 나누고 자신들의 '뜨거웠던 밤'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요점은 꽃미남 남성 혹은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소년의 모습을 지닌 신체를 취하는 꿈이 여성적 욕망의 한가지 완성된 형태라는 사실을 보는 데 있다. 과거에는 '야오이'라는 형태로 은밀히 소비되었던 여성의 욕망이 지금은 [유튜브] 등을 통해 공개적으로 상연되고 있다. 여기서, 남자든 여자든, 스스로 그 자신을 위한 욕망의 대상을 찾기 시작할 때 그 첫번째 행보가 흔히 '예쁜 신체'를 취하고 소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포획장치가 여성의 신체가 되었든 남성의 신체가 되었든, 포획의 대상은 포획의 프레임에 들어올 만큼 예쁘고 귀여워야하기, 즉, '품고 싶다'고 느낄 정도가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예컨대, 근육질 남성의 신체는 웬만한 포획 장치에 잡히지 않을 만큼 비대하다. 거꾸로 '저 강력한 포획장치에 포획되고 싶다'는 욕망의 시나리오를 지닌 것이 아닌 이상 별로 눈길을 둘 이유가 없다. 위의 레즈비언 커플의 경우를 통해 오늘날 어떤 '남자'가 여성들의 사랑을 받는지가 도출된다: '팔루스'(phallus), 즉, 상징적 기표로서의 남근을 결여한 남성--미소년 같은 모습의 여성의 신체가 이를 '말 그대로' 구현하고 있지 않는가?--이 오늘날 새로 도래한 여성들의 사랑을 받는 새로운 남성이다. 거꾸로 말하면, 여기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서로 중첩되고(entangled) 있으며, 그 결과, 과거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라 불련던 두 외계 종족은 오늘날 훨씬 더 '양성적'(androgynous)인 영역에서 보다 친밀하게 조우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전통적 이성애에 기반을 둔) 결혼 제도에 대한 피로감 속에서 결혼 자체를 기피하고 있는, 인류가 나아가는 방향이지 않은가? 과거 (수직적-상징적 질서에 대한 연구인) '젠더 연구'라 불리웠던 영역이 오늘날 (수평적-신체적 질서에 대한 연구인) '유니섹스'의 영역에 대한 연구로 대체되어야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로부터 서구의 여성들 사이에서 BTS 현상 등을 통해 한국의 남성성이 주목을 받을 때 그것을 '서구의 여성들이 드디어 한국 남성의 '근육질 남성성' 혹은 '유독한 남성성'의 참맛을 알게 되었구나'라고 여기고 '코로나만 끝나면 미국에 가서 내 한국적 마초성으로 미국 여성들을 황홀하게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서는 큰 곤란을 겪을 것이란 사실을 분명히 해야한다. 요점은 정반대다. BTS가 그려내고 있는 것은 자상하고 섬세하고 여성적이면서도 때때로 사회정의에도 관심을 갖는 방식으로 남성성을 내보이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미래의 남성성'이다. 거꾸로 말하면, 미국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 남성은 '미래에서 온 남자'다. 우리 말로는 '만찢남'이라 한다. 물론, 실제로 한국 남자들과 사귀어보면 현실이 자기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는 것 또한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현시점에서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서구인들 사이에서 한국은 '미래의 나라'라는 것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그들 눈에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 현실화되어 이루어지는 나라와 같은 곳이 한국이다. 한국에 대한 '환상'이 생기고 있다는 뜻이다. 1990년대까지 이어져온 서구에 대한 열등감 속에서 주눅들어 살아온 한국인에게는 '특효약'과 같다. 자신감을 갖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예상해볼 수 있는 것은 지금 한국 사회가 누리는 전지구적 영향력이 앞으로 20여년 지속되어 지금 한국이 창출해내고 있는 이미지가 서구인들 사이에서 완전히 각인되게 되면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을 넘어 한국인들 사이에 새로운 유형의 '쇼비니즘'이 또한 자리를 잡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최근 [유튜브] 등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애국주의 담론은 현단계에서는 건강하다. 기존의 열등감이 너무 강했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 애국주의는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단, 2-30년 앞을 내다볼 때는 동일한 애국주의가 조금 다른 형태를 띨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지금의 전지구성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한국의 새로운 애국주의가 기존의 근거없고 자기모순적인 (광화문에서 성조기와 일장기를 휘두르며 쇼비니즘을 구현하는) 가짜 보수들의 애국주의와는 성질이 다를 것이라는 예상을 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지금 BTS 등을 통해 보고 있는 사회-문화적 현상은 한국 내 '진짜 보수의 탄생'과 같다. 우리가 서구의 19-20세기를 보며 부러워했던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에 두는 서구 패권국의 보수성을 떠올려보라. 그에 비해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한국 사회의 보수성은 '매국성'을 '보수성'이라 불러왔다. 반면 지금 우리가 보는 새로운 보수성은 더 이상 '매국적'이지 않다. 오히려 '전지구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 사회에서는 '새로운 보수의 탄생'인 것이 서구에서는 '미래의 구현'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지금 서구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장 '쿨한 언어' 로 여겨지는 것은 한국어다. 지금 한국 사회가 새롭게 구축하고 있는 보수성이 그만큼 미래지향적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새로운 보수성'은 전지구적 단위에서 '한국적인 것'이 세계를 리드하는 '젊고 참신하며 역동성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진 결과이지 그 반대, 즉, 매국성과 매판성에 기댄 기존 한국 사회의 노년성 때문이 아니다. 지금 한국이 어떻게 하느냐에따라, 한국의 새로운 보수성이 전지구적 리더십을 갖게 될 수 가능성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의 미래는 지금 발흥하고 있는 '새로운 보수성'을 어디로 어떻게 이끌고 가느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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