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사이 한국의 인디 음악에 마음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404나 쾅프로그램 정도가 관심을 두고 들은 마지막 한국 인디 음악가였지 싶다. 스치며 들을 때는 전반적으로 수준급의 팝 성향 인디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 옛날보다 많이 늘었다는 인상을 받았더랬다. 우효란 음악가의 "민들레"가 한 예다. 잘 만들어진 곡이다. 전반적으로 그의 곡들은 듣기 좋다. 대체로 달콤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음악 안에서 마음이 머물 곳을 발견하지는 못한다는 데 있다. 근본적으로 나와 다른 세상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가끔 옆에서 바라볼 수는 있겠지만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되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근래 들려온 팝 성향의 곡에 대한 내 전반적 인상이 그러했다. 팬시한 식당에 가서 팬시한 음식을 맛있게 먹는 느낌은 든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다. 무엇인가가 빠져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신체의 근본적 연약함 및 수치심, 그로부터 연유하는 두려움과 그에 대한 자의식이 만들어내는 복합적인 감정, 그로부터 빠져나오려는 투쟁 속에서 얻어지는, 그러나 잠시 머물 뿐인, 평정심과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팝 성향의 곡들은 무엇보다 편곡에 있어 지나치게 테크놀로지에 의지한 합성물과 같이 변모된다는 점에서 가사의 층위에서 조금 남아있었을지 모를 감정마저 세련되게, 마치 짙은 화장을 하듯, 지워버린다. 감정이 아니라 제품(product)이 하나 주어진 듯이 느껴진다. 그러한 음악은 100년이 지난 후 무덤을 열어봐도 시체가 하나도 썩지 않고 그대로 창백한 얼굴로, 마치 관 속에서 자고 있던 흡혈귀가 그러하듯, 누워있을 것만 같이 들린다. 그리고 관 뚜껑을 여는 순간 눈을 희번득 뜬 후 내 목을 조를 것만 같다.
윤지영이 독특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팝'적이다. 그러나 그의 팝은 멋지게 꾸미고 화장을 하고 있지 않다. 듣고 있으면 심지어 곡이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신체가 떨리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그의 언뜻 단조로우며 심지어는 퉁명스럽게 들리는 창법을 보라. 퉁명스러움은 그의 곡이 감정을 최소한으로만 가공한 결과와 같다. 담담하게 지나간 일을 회고하고자 하는 태도의 결과다. 그러나 기억이라는 얇은 표피 아래에 있는 신체는 그렇게 담담하지만은 않다. 지나간 일을 여전히 현재의 일처럼 선명히 느끼기 때문이다. 퉁명스러움은 그 기억의 선명함--"넌 날 떠나지 않아"--을 견뎌내기 위한 최소한의 외피와 같다.
윤지영에게서 음악적 형식은 인위적 혹은 합성적이지 않다. 형식은 삶의 존속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에게서 음악적 형식은 떨리는 신체의 부끄러움을 견뎌내기 위해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삶의 형식이다. 이렇게 말해볼 수 있다: 윤지영에게 음악조차 없었다면 그의 신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을 것이다. 음악은 세상 속에서 존속하기 위해 그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형식이다. '우리'라는 대명사로 시작하는 "문득"이라는 곡에서 그가 취하는 창법을 보라. 일견 내밀함에 치중하는 가수 같이 들리지만 여기서 윤지영의 목소리는, 역설적이게도, 민중적 투쟁가의 창법을 연상시킨다. 그의 퉁명스러움은 굳세어지지 않으면 안되는 내밀한 신체가 취하는 집단성의 형식과 같다. 집단성은 결코 내밀함의 반대이지 않다. 오히려 벌거벗은 신체가 드러날 정도로 내밀한 것만이 외재적-집단적이 될 수 있다.
'인디 음악'은 내밀한 최소한의 삶을 그 자신의 형식으로 삼는 음악을 뜻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디 음악은 결코 넉넉하게 '팬시'한 음악이지 않다. 인디 음악은 소박해야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인디 음악은 그 어떤 다른 음악보다도 더 '미래성'을 사고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테크놀로지 혹은 테크네는 기피해야할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포이에시스(poiesis)의 흔적을 머금지 않은 테크네(tekhnē)는 결코 인디 음악의 주요 대상이지 않다. 마음이 머물 틈새를 지닌 음악이란 바로 이 테크네에 찾아온 균열을 지닌 음악을 뜻한다. 마음은 신체가 무너지는 지점, 그 균열의 지점과 같다. 음악은 바로 그 열려진 신체를 봉합하기 위해 긴급히 도입되어야만 하는 형식이다.
음악이라는 최소한의 형식을, 마치 터진 둑의 틈을 메우듯, 쌓아올리는 일을 넘어서 멋지게 치장하고 꾸미기 시작할 때, 우리가 흔히 '사회적 존재'라 부르는 최대로 완성된 형식이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음악은 더 이상 한 사람의 삶이 달린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부터 음악은 그저 좋아하는 음식과 좋아하는 식당을 고르는 것과 같은 문제가 된다. 식당 하나 없어진다고 해서 삶이 무너진다고 여기는 사람은 없다. 이제 음악 하나 없어진다고 해서 삶이 무너진다고 느낄 사람은 없게 된다. 이제 음악은 사회화된 개인이 지닌 '취향'의 문제다. 이것이 '아웃싸이더'로부터 '인싸이더'로의 이동이다.
생명(life)은 죽음(death)과 맞닿은 곳에서 발생한다. 생명의 관점에서 이미 완성된 존재인 '인싸'보다 더 흥미롭지 못한 현상도 없다. '인싸'는 마음이 머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마음이 머물 틈 자체를 지니지 않는 자들이 '인싸'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완성된 삶은 생명의 관점에서 척박하다. 개인이라 불리는 고정된 그리고 고립된 신체라는 빈곤 속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삶의 형식으로서의 음악은 꾸며도 가릴 수 없는 부끄러운 신체를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음악을 듣는 이유의 하나다. 팬시한 음악은 팬시한 식당에 가서 팬시한 음식을 하나 주문해서 먹는 일로 대체될 수 있다. 그러나 삶의 형식 혹은 존속의 형식으로서의 음악은 대체될 공산품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인디 음악은 그러한 단독성(singularity)의 한 형식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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