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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눈의 사무라이

by spiral 2024. 1. 7.

아래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여러가지 요소를 섞어놓은 애니메이션이다. 영상은 영화 [300]의 애니메이션판 같은 느낌이다. 다만 배경을 일본으로 바꾼뒤 그리스 전사들 대신 사무라이를 넣은 모습이다. 다른 한편 게임을 애니로 만들어놓은 것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파울러의 성으로 침투해들어가는 과정이 특히 그러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초창기 작품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이 떠오르기도 한다. 둘 다 적이 숨어있는 성으로 침투해들어가는 설정을 지니고 있다. 이 애니의 최대 매력이 여기서 나온다. 지독하게 폭력적인 장면들을 스타일로 가득찬 영상으로 바꾸어 황홀하게 바라보도록 만들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영상미를 강조하는 유형의 영화는 플롯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지금 보면 '영상미'라고까지 해야하나 싶긴 하지만 오토모 가츠히로의 1988년작 [아키라]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인물이 대체로, 오늘날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성형수술을 받기 전의 모습인 듯, 매력적이지 않지만, 네오 도쿄의 묘사, 특히 바이크씬의 경우, 영상미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만큼 플롯은 크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물론 원작 만화의 경우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상당히 긴 내용의 작품을 2시간 분량의 극장판으로 축약하는 과정에서 플롯에 손상이 가해진 면이 없지 않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도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간다던가 하는 요소에 있어 크게 볼 만한 게 있는 작품은 아니다. 카네다와 테츠오 사이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심리적 갈등 같은 것이 있기는 하나 섬세하지는 않다.*

그러나 독특하게도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이야기적 요소에도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복수 플롯를 보완하는 인물 내면의 심리 묘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서술적 요소를 도입하여 플롯의 단순성을 보완한다고 말해볼 수 있다. 주인공이 어째서 복수를 해야하는지, 그 이유를 어떻게 정당화하느냐에따라 서사가 풍요롭게 보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던가. 이 작품은 어째서 주인공이 복수심을 품게 되었는지 그 심리적 배경을 묘사함에 있어 상당히 괜찮은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그래서 단순한 플롯이지만 유치하지 않게 끌어간다. 즉, 개인 내면을 서술하는 내러톨로지적 요소가 기계적 공식으로 작동하는 플롯의 단순성을 감춘다.

여기서 주인공의 심리묘사 측면에 있어서 이 작품이 끌어다쓰는 작품들을 열거해볼 수 있다. 19세기 영국의 소설들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폭력적 가부장적 질서에 갇힌 여성 인물들을 묘사하는 장면에선 윌키 콜린스의 [흰 옷을 입은 여인]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센세이션 픽션 전통은 대단히 육감적인 동시에 폭력적이다. 특히나 파울러라는 인물의 폭력성은 퍼시벌과 포스코 백작을 섞어놓은 모습이다.** 그런 면에서 아래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센세이션 픽션 전통을 따른다. 물론, 보다 가까운 예로, 앞서 언급한 바, 미야자키 하야오의 [루팡 3세]를 떠올려볼 수도 있다. 칼리오스트로 백작의 가부장적 폭력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물론 칼리오스트로 백작이 어디서 유래했을지 생각해보면 다시금 [흰 옷을 입은 여인]의 퍼시벌이나 포스코 백작 등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20세기 동양인이 품었을 서구에 대한 동경을 생각해보면 이는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실 유럽적 요소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체나 작품 배경에 깊숙히 침투해있지 않던가. 

[푸른 눈의 사무라이]가 19세기 페미니즘 소설 전통을 끌어다쓰고 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같은 작품의 영향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미주의 반골적 기질, 여자로서 예쁘지 않은 얼굴 등은 제인의 기질 및 얼굴 묘사와 상통한다. 말하자면, 칼잡이 제인이 미주라고나 할까. 이 말은 이 작품의 스토리 라인을 만들어낸 작가들이 서구 문학전통에 익숙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아래 작품은 17-19세기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인물을 그려내는 방식은 지극히 서구적이라는 데 있다. 외관만 일본이지 서구적 가치관 위에서 인물묘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요점이다. 가부장제 하에서 소위 억압받는 여성이 어떻게 자기만의 자율적 삶을 추구해가는지를 그려내는 게 이 작품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대단히 빅토리아조풍이다.

사실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근래 유행하는 세계관을 지닌 작품은 아니다. 무엇보다 유머가 빠져있다는 게 눈에 들어온다. 가부장적 질서, 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억압적 폭력과 음모, 이런 것들이 전면에 나오게 되면 유머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주인공의 복수심은 바로 이 억압적 질서에 대한 전복을 위한 것이다. 여기에는 정확히 나뉘어진 선과 악의 구도가 있다. 정확한 선과 악의 구분선이 그어지는 곳에서 유머는 작동하기 힘들다. (최소한의 유머를 도입하기 위한 인물이 링고와 타이건이다. 물론 타이건은 진지한 인물이기도 하지만 주인공 미주의 인물성을 드러내기 위한 조력자-장치로서 도입되는 측면이 더 강한 인물이다.) 유머는 선이 악하게, 악이 선하게 뒤집힐 때 찾아오기 때문이다. 단순히 외적 동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동시에 내적 동력에 의해서 뒤집힐 때 말이다. 반면 오늘날은 선과 악의 구분선이 포스트모던 우스개로 전락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트럼프의 등장 이후에는 정치마저 포스트모던화되지 않았던가. 겉으로는 대립각을 세워도 뒤로는 서로 정치적 협상을 시도하는, 20세기식 세련된 정치적 기술이나 레토릭 따위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배후에서 작동하는 거대 플롯으로서 정치적 기획 따위는 없다. 음흉한 지배자의 철두철미한 감시와 처벌에 기반한 사회가 아니다. 오히려 감추어진 것 없이 다 드러난다. 그래서 모든 게 우스워진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선거를 이끌기 위해 여당의 대표 대행으로 들어간 정치신인이 '불출마'를 선언하는 우스개가 벌어지는 시대다. '불출마'는 구시대 정치인들이 자기 쇄신을 해야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정치신인이, 마치 자신이 5선 의원이나 되는 듯, '불출마'를 선언한다는 것은 포스트모던 우스개가 아닐 수 없다. 거꾸로 이는 출마를 통해 솔선수범으로 리더십을 발휘할 생각이 없다는 뜻에 불과하다. '난 너희들을 자화자찬식으로 지휘할 뿐 책임 따위 지지 않는다'는 뜻과 같다. 세계를 바라보는 중심으로 작동하는 인간 주관성의 실종은 포스트모던의 증상이다. 반면 [푸른 눈의 사무라이]가 지닌 심각한 플롯 전개는 마치 이런 시대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소리와 같이 들린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런 서사적 요소, 환영한다. 포스트모던은 끝날 때가 됐다. 

겉보기와 달리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서구적인 작품이다. 에도 시대, 사무라이 따위는 스타일의 문제일 뿐이다. 물론 검을 만드는 장님 대장장이를 등장시켜 '도'의 세계를 논하는 듯한 요소는 소위 '동양적'이다. 어째서 장님인가? 자고로 영적 세계와 교감하는 시인들은 장님으로 그려져왔다. 그는 예언자-시인형 대장장이다. 그러나 이런 요소는 이미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보여준 바지 않던가? '포스가 당신과 함께 하기를'이라는 말을 떠올려보라. '포스'는 '기'나 '도'와 별로 다르지 않다. 미주가 자신의 부러진 칼을 다시 붙이는 과정을 보라. 복수심만으로 순수하게 만들어진 그 자신의 '자아'만 가지고 싸워서는 상대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질 뿐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의 칼은 '불순물'을 포함할 때 다시 붙게 된다. '불순물'이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뜻한다. 더 넓게 말하면, 여자로서 다른 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받아들여야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옷을 벗고 감추었던 가슴을 드러내고 참회하듯 링고에게 자신의 몸에 붓으로 글을 써놓도록 부탁한다. 소위 음과 양으로 이루어진 '기의 흐름'이 인연을 통해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물론, 이러한 유형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동양적 가치에 대한 클리셰다. 즉, 서구인들 사이에 이미 동양은 하나의 '도통한 정신 문화'의 상징으로서 그들 문화의 일부로 정착한지 오래다. 그러나 동시에 '근대적 개인'을 그려내고자 한다는 점에서 작품의 기본 세계관은 서구적이다. 시즌 2를 염두에 두고 끝낸 마지막편을 생각해보라. 마지막에 드러나는 것은 시즌2에서는 복수 플롯을 출생의 비밀 플롯으로 바꾸겠다는 의도다. 출생의 비밀 플롯은 근대적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서 빅토리아조 소설이 사용했던 대표적 이야기 양식이다. 대단히 전통적인 플롯 전개다. 게다가 시즌 2는 유럽, 그 중에서도 빅토리아조 시대 세계의 중심이었던 런던을 배경으로 이어질 모양이다. 여기서 드러나듯 [푸른 눈의 사무라이]의 서구성은 20세기 이전 서구의 가치에 기반한다. 감독부터 제작자들까지 일본과는 별 관계가 없는 서구인들이 만든 작품이기에 자연스러운 일과 같이 보인다. (물론, 감독은 아사아계 미국인으로 보인다. 중국계인지 일본계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비유하자면, 서양 애니메이터들이 한국의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조선시대 인물들로 서구식 이야기를 풀어놓은 모습과 같다고 할까.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근대적 개인'을 그려내는 이야기를 생각해보라. 그런 일도 머지 않아 실제로 일어나지 싶다. 예전엔 한국이나 일본의 애니메이터들이 서구를 배경으로 서구식 인물로 애니메이션을 종종 만들었다면 지금은 동양을 배경으로 서양의 애니메이터들이 작품을 만드는 시대인 것이다. 아무튼,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한번 볼 만한 애니메이션이다. 

* [아키라]를 오토모 가츠히로 감독의 일본 군국주의 비판으로 읽는 유튜버들이 있다. 이들의 요점은 [아키라]가 결코 내용의 측면에 있어 보잘 것없는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작품 독해는 설득력이 있다. 예컨대, 영화의 말미에 데츠오가 권좌에 오르듯 스테디움 의자에 앉는 장면에서 감독이 그 의자의 무늬를 욱일기 무늬로 그릴 때 해당 장면은 과학기술에 기반하여 힘을 숭배하는 전쟁광 일본에 대한 비판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훌륭한 독해다. 그러나 이러한 독해를 '상징주의적 독해'라 부른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사실 오늘날 문학연구자들은 작품을 상징주의적으로 읽는 데 별로 관심이 없다. 상징주의적 독해의 문제는 작품 내 모든 요소를 초월적으로 읽는다는 데 있다. 즉, 작품 내 요소가 물질 세계인 자연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모조리 이념이나 가치의 세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게 그 전제다. 이는 근대 이전 문학작품을 읽을 때 적합하다. 기독교에 기반한 작품을 생각해보라. 모든 걸 성서에 기반한 초월적 신의 섭리 및 질서에 대한 이야기로 읽는 것이 가능하다. 여기서 사라지는 것은 물질 세계가 지닌 그 자신의 논리다. 오늘날 물질 세계의 논리를 다루는 것은 자연과학이다. 물론 자연과학 좋아하는 사람들이 문학이나 영화를 읽으면 오로지 '이 장면이 과학적으로 말이 되는지 아닌지' 따지느라 정신이 없다. 그 또한 정상적인 문학 독해라고 할 수는 없다. 문학이나 영화 속 모든 것을 물적 현실로 환원해버릴 것 같으면 무엇하러 문학작품을 만들어낸단 말인가? 그냥 과학 저술이나 읽으면 될 것이지 않은가? 그러나 반대로 물질 세계의 논리로부터 완전히 떠나게 되면 '상징주의적 독해'라는 초월적 논리가 나오게 된다. 좋은 비평가는 자연주의와 이상주의의 경계에 머무는 사람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 [흰 옷을 입은 여인]은 개인적으로 '블록버스터 빅토리아조 소설'이라고 불러보고 싶을 정도로 대단히 재미있을 뿐 아니라 오늘날의 기준에서도 세련되기 그지없다. 읽어보면 왜 이 소설을 '센세이션 픽션'이라 부르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읽느내내 등골이 오싹하고 홀린 것 같은 느낌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소설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읽어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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