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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uneo Imahori, [Trigun: The First Donuts]

by spiral 2023. 12. 24.

[트라이건: 첫번째 도넛]은 20여년도 더 전에 내 귀를 즐겁게 해주었던 음반의 하나다. (아마도) 20년 만에 다시 듣게 됐지 싶은데 예전에 이런 음악을 좋았했다는 사실이 딱히 창피하거나 하진 않다. 역사에 남을 명작 같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좋다고 느낀다. 물론, 유치하게 느껴지는 지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2000년 전후에 나온 음악들을 듣고 있으면 내 취향이 저 시절에 만들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애니메이션 사운드트랙인데 정작 애니를 본 적은 없다는 거다. 이 말은 애니메이션이 지닌 매력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자신을 어필할 만한 힘을 가진 앨범이라는 뜻이다. 보통은 사운드트랙의 경우 음악 자체가 별로라도 영화나 애니가 지닌 내러티브의 힘에 의해 영화에 관한 추억을 소환하는 방식으로 음악을 듣게 된다. 아래 앨범은 그러한 경우에 속하지 않는다. 대부분이 보컬이 없는 연주곡이지만 귀를 뗄 수 없다. 재미있는 소리 모음집이라는 게 이 앨범에 대한 내 감상이다.

하나만 더 이야기해보자. 아래 음반은 1998년작이다. 내 기억엔 이 즈음이 일본 대중문화의 마지막 전성기였지 싶다. 당시 일본에서 나온 아래와 같은 음악을 들으며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호감을 지울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부러움을 느꼈었다. 그러나 이젠 옛날이야기다. 지금은 한국 대중문화가 더 낫다. 최근 유튜브에서 주목을 받은 캐릭터의 하나인 다나카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보자. 이 일본인 캐릭터는 한국인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의 설정은 한국에서 활동하는 B급 일본인 연예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요점은 그의 캐릭터가 동시대 일본인의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다나카는 1990년대 일본에서 볼 법했던 화려하지만 촌스러운 스타일의 인물이다. 그는 한물간 과거의 퇴물과 같은 면을 지니고 있다. 허세 또한 지니고 있다. 그러나 밉살스럽지는 않다. 어딘지 허술해서 오히려 친근한 느낌이다. 대체 이 설정이 일으키는 기이한 호감의 근원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한 가지 해석은 다나카가 한때 잘 나갔으며 선망의 대상이었던 1990년대 일본이 2020년대 30-40대 한국인들 사이에서 어릴적 추억의 대상이 되어 돌아오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2020년대에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동시대 일본이 더 이상 선망의 대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이 대중적 호감의 대상이었던 것은 1990년대다. 그때가 정점이다. 지금 일본은 대중적 매력을 잃어버렸다. 소수의 매니아들은 여전히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대중적이지는 않다. (예컨대, 1998년에 일본 대중문화 전면 개방은 그 자체로 큰 사회적 이슈였지만 그 이후로 일본 대중문화는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사회적 논의 거리가 된 적이 없다.)  다른 한편 지나간 시대로서 1990년대 일본이 2020년대에 한국인들 사이에 되돌아올 때 해당 시대는 더 이상 동시대적으로 세련될 수 없다. 그보다는 그저 만만한 옛 친구를 다시 만나는 느낌에 가깝다. 한때 동경의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평범하게 일반인으로 살아가는 아이돌 가수를 길거리에서 다시 만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물론 다시 만난 그는 살도 찌고 모든 게 옛날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래서 더 좋기도 하다. 근래 유튜브에서 인기를 끄는 채널의 하나로 '근황올림픽'이라는 게 있다. 다나카는 그 자체로 1990년대 일본 대중문화의 '근황올림픽' 캐릭터라 할 수 있다. 조금 다른 말로 해보자면, 다나카는 근래 별로 주목할 만한 게 없는 일본 대중문화에도 실은 '리즈 시절'이 있었더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캐릭터와 같다. 물론 그의 '리즈 시절'은, 그의 동시대적 외모나 실력에서가 아니라, 30-40대의 마음 속에 추억으로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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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gun: The First Donuts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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