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오, 딱히 좋아해본 적 없다. 2014-5년경 차세대 록음악가로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에 비해 방송을 통해 세련되게 말랑한 느낌의 곡들만이 들려온 까닭이다. 그러나 뒤늦게 아래 "멋진 헛간"이란 곡을 듣고 생각을 바꿨다. 그는 록 음악가가 맞다. 2015년 '무한도전'에서 정형돈풍으로 장난스럽게 편곡되어 쓰인 후 이 곡이 애초 오혁이 의도한 판본의 형태로 단 한번도 발표된 적이 없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무한도전'은 한국 사회의 표준적 인간상을 만들어내는 공간이었다.* 한국적 인간의 표준성을 완전히 결여한 오혁조차 그 안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사실 '무도' 안에 록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의미론적으로 아래 곡이 원래 판본일 것이 분명한데 무한도전 편곡 판본이 등장한 이후 아래 판본이 거꾸로 'remix'로 기재된 방식을 생각해보라. 우스개 위주의 무한도전 판본이 원본이 된 반면 오혁의 원래 의도가 담긴 판본이 원본의 변형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2015년 '무한도전' 가요제 방영 당시 오혁이 이 곡을 특별하게 여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도'에서 최종적으로 공연된 판본을 보고서는 이 곡이 어째서 그에게 특별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히 별로라고 느꼈다. 그가 왜 그렇게 여겼는지는 아래 원래 판본을 들어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오혁의 영혼이 어떤 모습인지 알고 싶인가? 그렇다면 이 곡을 들어봐야한다. 단순히 창법을 두고 하는 말만은 아니다. 거친 창법과 달리 이 곡의 가사가 충분히 문학적이기에 하는 말이다. 벌거벗은 소년의 신체로부터 그대로 전해져오는 절규에 다시금 옷을 입혀주는 것이 곡의 가사가 지닌 은유가 하는 일이다. 문학성은 비유로부터 나온다. 비유는 헐벗어 상처 입기 직전의 모습을 한 영혼을 감싸는 옷과 같다. 록음악은 벌거벗은 영혼에 옷을 입히는 음악 양식이다.
오혁이 가사를 쓰는 방식을 보면 그가 실은 문학소년에 가까운 정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위잉위잉"이라는 곡을 생각해보자. 이 곡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의성어 및 의태어 등의 사용에 있다. 날파리가 내는 소리인 '위잉위잉,' 그것이 만들어내는 모습을 묘사하는 '비잉비잉,' 겨울바람이 부는 소리인 '쌔앵쌩앵' 등이 '끼리끼리,' '두근두근' 및 'Tell me, Tell me'라는 후렴구와 함께 곡에 시적 형식을 부여하는 방식을 보라. 곡의 내용은 직업도 친구도 애인도 없는 사회 부적응자의 삶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곡은 단순히 처량하지 않다. 오히려 대단히 세련되다. 직장에 나갈 일 없는 사람을 실직자라 부르지만 이 곡을 듣고 있으면 오직 실직자만이, 규칙적으로 따라야할 삶의 형식이 없기에, 스스로 예술적 삶의 형식을 만들어내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만 놓고 보자면 "위잉위잉"은 무직자가 부르는 곡에 불과하다. 그러나 요점은 정작 이 곡의 형식적 세련미가 무직이라는 조건으로부터 나온다는 데 있다. 심지어 무직자의 곡이 담아내는 삶의 예술성은 그 멋지다는 대기업 직장인들의 삶을 말라비틀어진 '오징어'의 모습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다. (출근길에 "위잉위잉"을 듣는 직장인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혹은, 보다 쉽게, "위잉위잉"을 '노동요'로 삼아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어째서 직장인들은 '노동요'를 필요로 하는가?) 이 역설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다면 카프카의 "변신"을 읽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사회적응자의 관점에서 예술은 '벌레'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술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적 삶은 벌레의 역동성과 창의성을 상실한 죽은 삶에 불과하다. 수백, 수천 억을 버는 음악가들의 음악을 듣고 있기 힘든 이유가 여기 있다. 그들에게는 예술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꿈꿀 동기 자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혁이 써내는 곡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는 후렴구 사용이다. "멋진 헛간"이란 곡에서도 그는 'hey, hey,' 'again, again,' 등의 반복되는 구절을 통해 곡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오혁의 형식주의는 오혁의 세계관이 탈형식적 실험적 록음악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아래 영상이 담아내는 절규가 보여주듯 그의 음악은 분명 형식 파괴적 동기를 지니고 있다. 그가 그 자신을 '탕자'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사회부적응자' 혹은 '반항아'와 같은 용어를 달리 칭하는 오혁의 문학적 용어에 다름 아니다. ('멋진 헛간'을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외딴 곳에 지었다는 가사의 내용에 주목하라.) 달리 말하면, 그의 '탈선'을 막는 동력은 그가 지니고 있는 문학성이다. 비유의 사용과 라임의 형태로 반복되는 구절의 사용이 그의 곡에 형식을 부여하며 사회와 소통할 창구를 만들어낸다. 2014-5년경 내가 그의 음악에 반응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 형식주의적 특성 때문이었다. 형식 실험적 요소가 전면에 나오지 않는 것을 비록음악적 타협의 증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형식주의적 특성은 거꾸로 그가 대중들 사이에서 안착하도록 만드는 동력으로 작동했다. 그가 지닌 문학성이 그의 탈형식적 동기를 계속해서 다스리는 모습이다. 형식주의는 장기적으로 그를 포크록 가수와 같이 만들 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지닌 반항아적 기질은 그의 음악을 실험적으로 만들 수 있기도 하다. 2023년 기준, 오혁은 이미 29세에 이르렀다. 물론 아직 미래는 정해지지 않았다. 앞으로 그가 어떤 음악을 하게 될지 한번 지켜보자.
하나 더: 2015년 혁오가 '무한도전'을 통해 불특정 다수의 대중에게 공개되었을 때 기존 혁오의 팬들은 짝사랑했던 사람을 그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빼앗겨버린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이는 인디 음악을 듣는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나 또한 어릴적 항상 내가 듣는 음악가를 나 이외의 그 누구도 듣지 않기를 바랬다. 아래 영상의 제공자에게서 난 동일한 애착을 발견한다. 임베디드 형식으로 영상을 링크 거는 것조차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랑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그 혹은 그녀가 촬영한 혁오의 영상이 퍼져나가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인터넷은 그토록 형편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공간을 특별하게 만든다. 혁오의 아래 "멋진 헛간"은 그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때로 사랑은 그 점성으로 세계를 심연으로 빠트리기도 한다. 오혁의 "멋진 헛간"이 들을 만한 곡인 이유를 생각해보자. 그것은 그 자신의 보물창고인 헛간이 텅비었다는 것, 더 나아가 그 자신이 헛간의 주인이자 동시에 헛간 털이범임을 아는 사람이 쓴 곡이기 때문이다. 끈적한 물질성은 동시에 진공의 비물질성으로 여겨질 수 있어야한다.
* 물론 이는 내가 '무한도전'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다. 정작 도전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별로 볼 것도, 재미도 없었던 적이 많았지만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게스트를 모아 놓고 멤버들이 헛소리 수다를 떠는 부분 만큼은 즐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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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formed in 2018
https://www.youtube.com/watch?v=3DpL4UcCdW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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