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가 음악을 듣는 주된 창구의 하나가 되면서 만들어진 새로운 직종(?)은 '뮤직 큐레이터'다. 뮤직 큐레이터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전에 오늘날 유행하는 작명법에 대해 좀 이야기해보자. 한 예로, 근래 새 직종은 거의 영어로 칭해진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래야 그럴싸해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인 입장에 영어는 단절을 의미한다. 전통과의 단절 말이다. 20세기 이전에 한국인 입장에 영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 언어였다. 적어도 20세기 초까지 한국인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영어는 없었다. 영어로 새 직종을 묘사하게 되면 마치 전례 없던 직종이 생긴 것 같이 느끼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한국인에게 영어는 맥락에서 벗어난 형이상학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생물학자라면 좀 다른 생각을 할 것이다. 생물학의 기본은 진화적 관점에 있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가 말하듯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 천천히 연속성 속에서 진화론적으로 변화할 뿐이다. 생물학의 관점에서 볼때 '뮤직 큐레이터'는 무엇인가 오래전부터 있어온 생물이 진화한 결과이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상의 직종이 아니다. '뮤직 큐레이터'는 옛날부터 있었던 직종이다. 알고 보면 '뮤직 큐레이터'의 직속 선배님은 '음악다방 DJ'이지 않은가?
생물학은 형이상학에 대한 안티테제와 같다. '센트럴파크'라고 하면 멋지고, '중앙공원'이라 하면 촌스럽지 않던가? '중앙공원'이란 말에는 한국인이 겪을 법한 생물학적 삶의 애환이 녹아있지만 '센트럴파크'에서는 도무지 땀내도 신체가 내는 뜨거운 열기도 느낄 수 없다. 공장에서 방부처리된 후 깨끗히 포장되어 나온 과자를 보는 것 같다. 유튜브에 올라온 자동화된 공장에서 '청청원 나또'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은 영상의 댓글에는 '위생적이네요'라는 반응이 많다. 여기서 '위생'의 요점은 음식이 인간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있다. 위생의 결정체는 아무렴 무생물에게서 발견된다. 예컨대, 원자 단위에서 감염병은 성립되지 않는다. 세포가 없는 기계는 땀을 흘리지도 병에 걸리지도 않는다. 다만, 땀을 흘리지 않는 대신 과열되서 불이 나 공장이 홀라당 타는 일은 있을 것이다. 혹은, 서버의 전원이 내려가 전국민의 일상이 정지하는 일 정도는 벌어질 것이다. '중앙공원'과 달리 '센트럴파크'는 그러한 곳이다. '센트럴파크'는 땀을 흘리지 않기에 발열과 감염병을 일으키지 않는다. 대신 과열되어 불이 나는 최첨단 인터넷 데이터 센터와 같은 곳이다. 몇달 전 한국의 권력자가 '중앙공원'이 아니라 '센트럴파크'를 선호하는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권력자들은 낡고 추한 것은 감추려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영어 작명이 단순히 세련됨과 촌스러움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영어 작명은 권력의 문제를 수반한다. 영어 작명이 동일한 것을 가리키는 한국어를 누추한 것으로 여겨 감추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높이 솟은 '타워팰리스'의 그림자가 추레한 '구룡마을'을 감추듯이 말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권력자는 자신의 누추한 불륜을 로맨스라고 세련되게 포장해서 강제하는 자와 같다. 아무렴 '타워팰리스'는 한낱 '탑궁'이 아닌 것이다. 구룡마을이 '나인 드래곤즈 빌리지'이거나 '구룡 더 힐'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공교롭게도 '로맨스'는 영어이지만 '불륜'은 한자어다. 그리고 '로맨스'는 쿨하지만 '불륜'은 구질구질하다고 여겨진다. 오늘날 새롭고 좋은 것은 전부 영어로 되어있다. 예컨대, '유튜브 크리에이터'라는 용어는 이미 그 자체로 '힙하게' 들린다. 그러나 대다수의 '유튜브 크리에이터'는 '크리에이티브'하지 않다. 30초 짜리 잡담을 늘려서 10분 짜리 다큐로 둔갑시키는 것을 '크리에이티비티'라 부를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 정도는 양반인지도 모른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영상을 다시 짜집기해서 수익을 창출하는 부류도 많다. 물론 수준급의 영상을 만들어올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비율로 따지자면 허섭한 영상이 다수일 것이라 추정해볼 수 있다. (그러나, 예컨대 10 퍼센트의 영상만 볼 만하다고 해도, 유튜브에 대략 8억개 영상이 있다고 하니, 8천 만개가 볼 만하다는 뜻이다. 8천 만개쯤 되면 아무리 허섭한 영상이 많아도 내 추천 영상에는 볼 만한 것들이 계속해서 올라올 확률이 충분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그들 모두는 자신을 동일하게 '유튜브 크리에이터'라 칭한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자연에는 독을 가진 뱀들이 있다. 이들은 화려한 색의 줄무늬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독이 없는 뱀들 중에도 화려한 줄무늬를 지닌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독을 지닌 뱀을 한번 경험해본 동물은 해당 뱀의 줄무늬 색만 봐도 도망간다. 독사의 줄무늬를 모방한 일반 뱀이 노리는 것은 착시효과다. 독사의 것과 꼭 닮은 자신의 줄무늬를 보는 순간 동물들이 도망갈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무척 경제적인 생존법이라 할 수 있다. 독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독의 효과는 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사의 무늬를 지닌 뱀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분노를 일으킨다. 인간의 감수성에서 볼 때 해당 뱀은 '얍삽함'의 극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간 세계에서였더라면 최소한 소송감이다. 특허권 분쟁 말이다.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 내가 열심히 투자해서 만든 '최신 맹독'인데 옆에서 놀고 먹던 놈이 맹물을 병에 담은 후 같은 상표를 단 채 팔고 있으니 말이다. '이차돌'이라는 이름의 프랜차이즈 고깃집이 번성하자 그 옆에서 '일차돌'이라는 이름을 달고 장사를 시작한 프랜차이즈 가게의 이야기를 보라. 그들은 심지어 비슷한 가게 인테리어 디자인 및 거의 동일한 메뉴로 장사를 한다. 마치 자신들이 바로 그 이차돌인 듯 행세하여 이차돌 고객을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고객으로 유치하고자 한다. 일차돌에 예약하고서 이차돌 가게에 들어와 자신이 예약한 좌석을 문의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얼마전 뉴스에 보도된 사례다.
비슷한 사례는 넘친다. 어째서 새로운 음식 메뉴가 하나 유행하면 불길처럼 주변 상권으로 번져나가는지 생각해보라. 이는 평생을 기술개발에 헌신하며 '이를 갈아' 맹독을 개발한 독사가 하나 마침내 등장해서 동네를 평정하자 옆에서 보고 있던 맹물 뱀들이 전부 '내가 바로 그 맹독성 독사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유튜브에서 조회수를 올리는 방식에는 이러한 것도 있다.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되는 사안의 키워드를 대충 그럴싸하게 강조하여 영상에 끼워넣는 것이다. 그러면 알고리즘을 타게 될 때가 있다. 한번 알고리즘을 타면 많은 사람들의 추천 영상 목록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해서 뜬금없이 백만뷰 영상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는 조회수만 노리는 유튜버들 사이에 공공연히 알려진 '비법'이다. 방금 언급한 사례들의 요점은 전부 동일하다. '내가 바로 그 독사다!'라는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정작 눌러보면 '맹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유사품에 낚인 거다. 이른바 '유튜브 크리에이티비티'의 뒤에는 늘 '낚시'가 도사리고 있다.
서두가 좀 길었다. '유튜브 뮤직 큐레이터'로 가보자. 이들은 기존에 발표된 여러 음악가의 음악을 자신이 생각하기에 서로 어울린다싶은 방식으로 묶어서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어떤 면에서 그다지 창의성이 필요해보이지 않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기존의 음악가들에 기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음악가 없이 큐레이터는 있을 수 없지 않던가? 음악을 만드는 것은 음악가이지 큐레이터가 아니다. 그러나 큐레이터의 작업에 '크리에이티비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로 이들은 다양한 음악 채널을 항상 모니터링해서 많은 레파토리를 보유해야한다. 특히 최신곡에 민감해야한다. 이러한 작업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후 특정 느낌 혹은 분위기에 부합하는 일련의 곡을 수집해야하고 한데 묶어 편집을 해야한다. 그리고는 영상에 사용할 사진을 하나 작업해야한다. 마무리는 그럴싸한 제목을 하나 다는 것이다. 사실 제목이 큐레이팅의 화룡점정을 이룬다.
아래 링크된 영상을 한번 보자. "내일 아침에 이거 틀고 산책해야지"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참고로, 해당 유튜버가 단 다른 제목으로는 "창문 열고 청소하다가 바람이 너무 좋아서 그냥 음악 틀고 누워버렸어" "남방 하나 걸쳐 입고 들을거야," "여유로운 오후, 성수동 카폐에서" 등이 있다.) 주어진 제목 아래 모아진 곡들을 듣고 있으면 뮤직 큐레이팅의 요점이 실은 음악가에 맞추어져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악가를 내세우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음악가가 전면에 나서게 되면 뮤직 큐레이팅이 한낱 음악가의 기생충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뮤직 큐레이팅은 자신의 정체성을 타인에게 강제하지 않는 조근조근한 음악가들의 음악을 재료로 해서 구체적이고 특정한 삶의 분위기-감수성을 하나 만들어 한 시간 이내의 시간 동안 제공하는 일이다. 아래 영상을 예로 들면, 화창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봄날에 산책하는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의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댓글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반응도 모두 큐레이터가 제시한 '아침 산책'이라는 주제에 맞추어져있다. 말하자면 '플리'(playlist)는 생활 세계 내에 가상의 로맨틱한 공간을 찰라와 같이, 마치 로맨스 소설 혹은 순정 만화를 읽을 때처럼, 제공한다. 청자 댓글은 과거 음악다방 DJ들이 신청곡과 사연 등을 받아 청자와 교감한 것과 같은 효과를 만들어낸다.
'유튜브 뮤직 큐레이팅'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뮤직 큐레이터의 플리에서 음악가의 정체성이 약화되는 현상이다. 요점은 이들의 플레이리스트를 듣고 난 후 그 안에 실린 음악가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어쩌다 알아보고 싶은 음악이 있어도 정작 찾아서 들어보면 실망하게 된다. 생각했던 것과 다른 음악을 들려주는 경우가 많아서다. 이는 플리가 이런 저런 음악을 재료로 새로운 분위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창출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뜻과 같다. 그러나 거꾸로 이는 플리에 실리는 것이 음악가가 자신을 알리는 좋은 방법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즉, 큐레이팅된 플리를 듣는 것은 여러 트랙이 서로 합쳐져 특정 주제, 예컨대 '아침 산책'이라는 주제에 복무하는 한에서다. 해당 주제라는 '프레임'을 벗어나게 될 경우 개별 트랙은 매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는 큐레이터들이 합성해내는 이상향적인 공간-정서가 개별 음악가의 정체성을 압도할만큼 강하다는 뜻이다. 물론 근본에 있어 이는 근래 만들어지는 팝음악이 애당초 음악가의 오리지널리티나 개성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큐레이팅된 플리의 세계 속에서 개성이 세계와 불화하지 않도록 배치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플리 안에서 모든 것은 합일되어있다. 조화로운 플리의 세계의 밖으로 나가면 음악가는 매력을 상실하게 된다. 거꾸로 말하면, 큐레이팅된 플리 안에 음악은 있어도 음악가는 없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생각해보자. 소설의 전반부에서 베르테르는 귀족적 고귀함을 지닌 인물로서 그에 걸맞는 이상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에게는 알 수 없는 매력이 있다. 그 주변의 다른 모든 인물 또한 마법과 같은 질서와 조화 속에서 목가적 삶을 드러낸다. 그러나 후반부로 가면 그는 절망을 경험하게 된다. (샤)롯데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그 중심에 있다.** 결국 베르테르는 자살한다. 헤겔의 관점에서 말하면, 베르테르는 자신의 목가적-귀족적 정체성에 집착했기 때문에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즉,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이 '고귀하고자'했을 뿐이다. 문제는 베르테르가 교양소설(the Bildungsroman)의 맥락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근대적 방식으로 새롭게 발전시키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에게는 '목가적 로맨스'의 고상함은 있을지언정 근대적 자아가 품기 마련인 저열함은 없다. 한 예로, 그는 샤롯데와의 '로맨스'는 생각할 수 있어도 '불륜'은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러한 유형을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 헤겔은 '정직한 영혼'(the honest soul)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에 비해 완전히 근대화된 인물의 특징은 세계로부터 소외된 그 자신의 처지를 직시한다는 데 있다. 예컨대, 자기 자신이 꿈꾸는 로맨스로부터 소외된 자들이 지닌 사회적 저열함이 표현되는 한 가지 대표적 방식이 바로 불륜이다. 헤겔이 불륜에 대해 이야기한다거나 불륜을 장려한다는 뜻이 아니다. 관건은 결혼을 통해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빌둥'의 관점에서 사고하는 데 있다. 이를 잘 담아낸 최근의 작품이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이지 않은가? 요점은 해준의 경우는 전혀 베르테르가 아니라는 데 있다.
[헤어질 결심]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만약 해준이 베르테르를 대신하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에 투입된다면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 것인가? 아마도 그는 다른 평범한 여자랑 결혼부터하고 볼 것이다. 물론 샤롯데 또한 일단 알베르트와 결혼을 하고 말이다. 그 후에 해준은 샤롯데와 기막힌 불륜 이야기를 사랑-욕망의 이름으로 풀어내게 될 것이다. 샤롯데가 알베르트와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될 때까지 말이다. ('헤어질 결심'이라는 옵션이 있는데 뭐하러 '자살' 따위를 한단 말인가?) 알베르트가 '나쁜 남자' 역할을 좀 해준다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다. 물론, '나쁜 남자'조차 살해하는 '치명적 여성'(팜므파탈)으로 샤롯데가 다시 태어나야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되면 작품의 제목이 좀 바뀌어야할 것 같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대신 '중년 해준의 기쁨' 어떠한가? 아니면 '중년 해준의 되찾은 황망한 기쁨' 정도? [헤어질 결심]의 마지막 장면을 고려한다면 후자가 더 적절하지 싶다. 어떤 면에서 [헤어질 결심]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달성하지 못한 '빌둥스로만'을 구현하는 작품과 같다. 다시 말하면, [헤어질 결심]은 헤겔적 의미의 '교양'으로 가득찬 작품이다. 작품이, '로맨스'만 탐하는 권력자들의 행태와 달리, '불륜' 혹은 저열한 자아에 충실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박찬욱이 서구식 비평가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그의 세계관이 기본적으로 헤겔적 혹은 근대적이기 때문이다.****
큐레이팅된 플리에 빠진 것은 헤겔이 말하는 '빌둥'(Bildung) 혹은 '교양'이다. 헤겔은 '교양'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정신'이라 정의한다. 근대 사회는 근본에 있어서 저열하다. 그러나 저열함은 '교양'의 근거이기도 하다. '교양'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상태에서 시작하여 소외 자체를 자기 자신의 결정이 일으킨 산물로 인지하여 그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는 정신(Spirit)을 통해서만 달성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해볼 수 있다: '센트럴파크'의 세련됨은 '중앙공원'이라는 촌스러움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혹은, 근대 사회 속에서 로맨스라는 고상함은 오직 불륜 충동이라는 저열함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혹은, '뮤직 큐레이터'의 '힙'과 '합'은 그 자신의 '음악다방 DJ'로서의 소외된 지위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오직 그때에만 우리는 음악가의 교양 혹은 음악가의 음악 세계에 대해 논할 수 있게 된다. 권력자들이 '로맨스'만을 부각하며 세계의 '불륜'을 지우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실은 근본에 있어 정신의 교양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자신의 소외를 자각하게 되면 기존 세계의 로맨스는 그 자신의 불륜을 드러내며 침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세계의 구조 자체가 바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롯데캐슬'에 얽힌 전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한국의 롯데캐슬 아파트에 사는 아이가 미국 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장학금을 신청했다. 학생의 서류를 검토한 후 학교측은 장학금을 줄 수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성'에 살 정도로 부유한데 어째서 재정지원이 필요하냐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는 '롯데성'에 사는 중세풍 귀족이었던 것이다.
** 괴테의 샤롯데가 바로 '롯데캐슬'의 롯데가 기원한 곳이다.
*** 저열함에 대한 열린 태도가 닫히게 될 때 예술의 창의성은 끝나게 된다. 불과 6년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기억하라. 박찬욱 또한 리스트에 있었다. '블랙리스트'는 '로맨스'로 '불륜'을 지우기 위한 검열 장치다. 다시 권력자의 시대가 시작된 지금, 예술계 인사라면 언제 다시 '블랙리스트'가 로맨스를 강제하려 들지 경계심을 가져야할 것이다.
**** 박찬욱은 비평가 취향의 영화를 만드는 대표적 감독이다. 개인 욕망의 문제를 끝없이 파고드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에서 한국의 전통적 인간 정서, 예컨대, 봉준호의 [괴물]에 등장하는 강두와 희봉이 보여주는 어딘지 부족하지만 사랑스러운 인간형, 혹은 [옥자]에 등장하는 미자와 옥자 사이의 관계와 같은 것은 주인공의 자질로서 주목받지 못한다. 그들은 근본에 있어 욕망하는 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예컨대, 동양 철학이나 동양학을 하는 사람이 박찬욱 영화을 이해하여 높게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불필요하게 난해하며 우스꽝스러운 인간들을 묘사하고 있다고 여길 가능성이 크다. 거꾸로 말하면, 서구의 비평가들이 박찬욱의 영화를 보게 되면 한국이 같은 서구 민주주의 문화권 국가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여 한국을 그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과거 그들 사이에서 일본이 서구 문화권이라 여겨졌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깐느가 박찬욱을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어떤 면에서 그들 자신의 문화를 계승하는 감독이라 여기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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