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영상은 2008년에 제작됐다. 만으로 이자람의 나이 29세 때다. 영상의 후반부에서는 이자람과의 인터뷰가 길게 이어진다. 어린 시절 어떠한 부모 밑에서 어떻게 교육받고 자라왔는지, 어떻게 해서 판소리를 시작하게 됐는지, 그리고 이자람 자신이 생각하는 판소리란 무엇인지 등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인터뷰를 통해 그의 공연을 보면서 느꼈던 지점들이 그 자신이 정확히 인지하고 의도한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이자람 공연의 특징은 스토리텔러로서의 접근에 있다. 그는 단순히 판소리라는 장르의 기교를 최고 수준으로 체득한 사람이 아니다. 그가 추구하는 최종 지점은 18-9세기 판소리의 내러티브 속 등장인물에 감정이입하여 그들의 삶을 동시대인 21세기에 되살려내는 것이다. 사실 판소리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인터뷰에 응하는 이자람의 자세에서 이미 느껴지는 바이기도 하다. 웬만큼 생각이 정리되지 않고서는 보여줄 수 없는 판소리와 삶 일반에 대한 입장이 침착하게 명확한 언어를 통해 풀어져 나온다. 생각이 신체의 외부가 아니라 신체의 내부 깊은 곳에 머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이자람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눈치를 보거나 긴장하지 않는다. 이는 자아도취된 결과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소리꾼으로서 이자람이 품는 생각은 타인의 삶이 지닌 무게를 받아내는 신체로부터 나올 뿐이다. 오랜 시간을 거치며 몸에 세겨진 생각을 전하고 있기에 침착한 것이다. 사실, 그가 전하듯, 소리를 한다는 것은 이야기 속 등장인물의 고통을 소리꾼이 그 자신의 신체로 받아내는 일에 다름 아니다. [춘향가]를 8시간 동안 완창한 후 죽을 것 같은 신체적 고통을 느꼈다는 그의 이야기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는 그의 소리가 죽은 자와 접신하는 수준에서 만들어져나온다는 뜻과 같다. 조지 엘리엇이 지적하듯 인간이 자연 속 생물들 하나하나와 모두 공감하게 될 때 그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공감은 자아가 죽음에 이르는 일과 같다. 이자람은 공감의 고통을 몸소 이해하는 자다. 사실 판소리가 지닌 이야기성을 통해 그가 강조하는 것은 문학 일반이 지닌 공감력에 다름 아니다. 이자람이 판소리 이외의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도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예술 일반이 요구하는 공감을 몸소 체현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이자람은 브레히트, 마르케스, 헤밍웨이 등이 쓴 문학작품을 판소리 형식으로 번안하여 무대 위에 올리는 작업을 해왔다. 실제로 공연 장면을 보면 공감력을 통해 문학작품을 아주 잘 이해한 사람이 온갖 몸짓과 최고 수준의 노래 실력을 동원해 관객에게 실시간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있음을 알 수 있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그는 최고의 '오디오북'이다. 이자람이, 단순한 기교로서의 소리꾼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주목할 만한 사람인 것은 그의 공감력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공감은 단순히 쾌와 즐거움에 대한 공감을 뜻하지 않는다. 예술은 불쾌와 고통을 다루는 삶의 공감적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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