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크라노스풍'이라 명명하고 싶은 곡의 하나다. 지극히 사적인 느낌을 낸다. 이 곡은 대중과 예술가 개인의 만남으로 의도되지 않았다. 개인과 개인이 만남이 있을 뿐이다. 10대 감수성의 일기를 곡으로 만든다면 나올 만한 영상과 가사다. 한편으로 가사는 너와 나의 사랑 이야기 같이 들린다. 그러나 정작 영상 속 등장인물은 단일하다. 친구들과 동료들이 있어야 할 학교는 이미 폐교되어 텅비어 있다. 오로지 혼자 노는 모습이다. 마치 내가 사랑하는 '너'가 알고 보니 '나'이더라는 듯이 말이다. 영상 속에 삽입된 비디오를 보라. 마치 셀카처럼 등장인물 자신의 영상을 담고 있다. 이는 아래 곡의 세계관 속에서 2인칭과 1인칭이 동일할 가능성을 뜻한다. 10대 시절 일기가 결국에는 모든 것을 뽀송뽀송한 1인칭의 아름다운 경험으로 환원할 수 있듯이 말이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10대 시절의 반항심은 모든 것을 증오스러운 2인칭 너의 잘못으로 환원하기도 한다. '너'에 대한 '디스'를 기본값으로 삼는 힙합 음악의 세계관을 예로 들어볼 수 있다. 이 증오스러운 '디스' 정신이 아이들로 하여금 차라리 폐교되어 텅빈, 그리하여 나를 괴롭힐 그 누구도 없는, 학교를 이상향으로 꿈꾸도록 만드는 바탕이지 않은가? 예컨대, [박화영]이라는 영화가 그려내는 청소년기를 떠올려보라. 그렇다면 "너의 이름은 맑음"과 [박화영] 둘 모두에게서 빠진 것은 무엇일까? 1인칭도 2인칭도 아닌, 3인칭이 그것이다. 3인칭에 대해 생각해보자. 3인칭은 '나'와 동일한 줄 알았던 2인칭 '너'가 타자로서 낯설게 여겨지기 시작할 때 창출된다. 3인칭이 대중이라는 이름의 사회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아래 "너의 이름은 맑음"이 개인과 개인의 만남으로 의도되었다는 것은 아래 곡 속에서 바로 이 사회로서의 대중이 인지되지 않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좋게 말하면, 너와 내가 합일된 유토피아에서 살고 있다는 뜻이고, 나쁘게 말하면, 너와 내가 불법적으로 단락된 유아론의 세계 속에 머물고 있다는 뜻이다. 시쳇말로 '현타'가 기다리고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케미컬 브라더스(The Chemical Brothers)의 "The Darkness that You Fear"라는 곡의 비디오와 "너의 이름은 맑음"의 비디오를 비교해보자. 케미컬 브라더스 곡의 곡조 자체는 댄스 곡이다. 그러나 그와 정반대로 곡의 제목은 "당신이 두려워하는 어둠"(The Darkness that You Fear)이라고 명명되어 있다. 흔히 기쁨을 표출하기 위한 장치로 여겨지는 춤의 동력이 두려움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비디오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묘사되었는지 기억해보라. 인간은 그 자신의 예쁘고 귀여운 얼굴을 직접 드러내지 못한다. 비디오는 시작부부터 마치 해골과 같은 모습의 인간 얼굴을 드러낸다. 해골이 아니라면 동공이 상실된 시체의 얼굴이라 할 것이다. 그후 인간의 얼굴은 얼굴 없이 춤을 추는 신체에 다만 순간적으로 덧붙여질 뿐이다. 얼굴과 신체는 나뉘어져 있다. 여기서 인간은 전혀 예쁘거나 귀엽지 않다. 그러나 신체는 계속해서 춤을 춘다. 이것이 '현타'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춤을 추는 방식이다. 케미컬 브라더스의 세계관을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맑음"은 오직 두려움을 관통하며 추는 춤을 통해서만 더듬을 수 있는 집단적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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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은 맑음]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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