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등장 이전 '깡'의 '전사'(pre-history)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면, 1987년 제작된 [떠돌이 까치]라는 작품을 볼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은 지금 보기에 낯설다. 오늘날 보기 어려워진 마초적 남성이 주인공으로 설정되어있기 때문이다. 일단, 외모에서부터 다르다. 설까치의 외모는 전혀 '예쁘지' 않다. 그는 10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비슷한 나이 또래의 아이돌 그룹 남자 멤버들이 보여주는 '귀엽고 예쁜' 면모라고는 지니고 있지 않다. 혹은, 설까치는 오늘날 웹툰에서 묘사되는 10대 남성 캐릭터의 미모를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 거칠기 짝이 없는 까치집과 같은 머리와 외모를 한 그는 오직 '예쁜 엄지'에게 반하도록 설정되어있다. 거꾸로 말하면, 설까치의 외모를 보고서, 그것이 남자가 되었든 여자가 되었든, '흑심'을 품을 사람을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다못해 그는 근육질도 아니다. 그는 오직 (야구) 실력으로만 주목을 받을 예정이다. 반면, 오늘날 학원물 웹툰에서 검증되지 않은 실력의 남자를 외모만 보고 먼저 좋다고 느끼도록 설정된 여자 캐릭터를 찾기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외모 설정은 외모에서 그치지 않는다. 인물의 역할 설정으로 이어진다. 무엇보다 설까치는 계획 없이 좌충우돌한다. 한 예로, 그는 요즘 기준에서는 막말에 다름 아닌 것을 처음 보다시피한 엄지에게 던진다: "우~ 알았다, 사춘기가 시작됐구나, 너 남자 친구가 없어서 고민하고 있는 거지, 쓸쓸해서 그러는 거지." 더 나아가 그는, 아래 영상 19분 56초에서 보듯, 엄지의 어깨에 이른바 '나쁜 손'을 올려 엄지의 몸을 '쓰담쓰담'거리기까지 한다. 이 막무가내 행동을 관통하는 것은 근거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강한 자존심이다. 예컨대, 야구부 코치가 그의 야구 선수로서의 재능을 시험해보고자 공을 한번 던져보라고 하자 까치는 이렇게 답한다: "제가 던지면 학교 유리창이 깨질텐데요." 그리고 학교 유리창은 그의 공에 의해 박살이 난다. 그가 지나가는 곳에서는 질서가 와해되고 형상이 붕괴된다. 까치라는 인물의 근저에 흐르는 질서파괴적 자신감은 남성적 '깡'의 한 사례와 같다.
여기서 깡으로 가득찬 인물 설정의 조건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까치의 외모가 여성성을 전적으로 그 자신의 외부에서 찾도록 설정되어있다는 점이 핵심적이다. 생각해보라. 예쁜 얼굴, 지키고만 싶은 예쁜 몸 등을 가진 인물은 자신의 외모와 몸이 다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질서친화적이 된다. 형상파괴적 행동은 결국 자신의 예쁜 얼굴마저 상하게 할 것이기에 절대적으로 회피되어야한다. 여기서 까치란 인물이 여성성을 그 자신의 내부에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성성은 회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이 예쁘지 않다면 예쁜 것을 하나 외부에서 찾아다가 소유라도 해야한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가 제시하는 '인류의 기원'을 떠올려보라. 그에 따르면 인류는 원래 세 종류의 완전한 존재로 이루어져있었다: 1) 남자와 남자가 붙은 형태, 2) 여자와 여자가 붙은 형태, 그리고 3) 남자와 여자가 붙은 형태. 이들이 어느 순간 둘로 쪼개진 후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으려하는 갈망이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이란 이야기다.
다시 까치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아리스토파네스의 설명에 따르자면, 그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로 붙은 존재'였다가 어느날 그의 여성적 반쪽을 잃어버린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토록 철저히 여성성을 결여할 수 있단 말인가? 거꾸로 말하면, 그는 자신에게 결여된 '여성'을 외부에서 찾는 것으로써 자신의 여성성을 회복해야하는 유형의 인물이다. 이것이 그에게 '엄지'가 의미하는 바다. '까치'에게 '엄지'는 정확히 '부재하는 것'으로서의 '여자'를 의미한다. 여기서 라캉의 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엄지'는 '어머니 자연'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여기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인류기원론은 근본적으로 뒤틀리게 된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파네스는 읽어버린 반쪽을 찾는 것이야말로 자연을 회복하는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파네스로서는 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다. 어떻게 까치의 소중한 엄지가 그저 허상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러나 사실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겉으로 보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 '주체'란 '가상적인 것의 현실'이라는 것의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그만 논하도록 하자. 단순한 까치의 남성성을 이해하기 위해 그렇게 멀리 갈 필요는 없다.
여성이 철저하게 남성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생각이 한번 설정되면, 시쳇말로, '남자는 얼굴에 상처 좀 나도 괜찮은 법'이라는 남성 사회의 전통적 논리가 가능해진다. 예컨대, 까치는 만원 버스에서 신발 한쪽을 잃어버린 후 반 맨발로 버스와 경주를 벌인다. 몸과 외모 따위 신경쓰지 않는 이른바 '몸 개그'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까치의 인물 설정이, 오늘날의 예쁜 남자 아이돌 멤버가 아니라, 과거 심형래와 같은 이들이 보여준 개그맨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시쳇말로 하면, '자고로 남자라면 몸 개그를 해서라도 예쁜 여자를 웃길 줄 알아야하는 법'이다. 그게 '남자가 남자 답다'라고 여겨지게 되는 조건이다. 과거 많은 개그 설정이 마초적 남성성을 비트는 것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사실 마초성의 패러디는 마초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다. 패러디를 허용하지 않는 마초성의 다른 이름은 그저 '야만'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여성적인 것은 패러디의 대상 자체가 아니다. 패러디를 가능케 하는 '상징'의 층위, 즉, '인간'과 '깡' 사이의 이격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성적인 것은 상징의 불가능성 자체에 다름 아니다.
이 지점에서 사고 실험을 하나 해보자.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사실 엄지의 외모는 오늘날 아이돌 남자 그룹 멤버의 얼굴로 쓰여도 별로 이상하지 않지 않은가? 오늘날 남자 아이돌 그룹 맴버로 만화를 하나 그린다면 그는 설까치일 것인가? 아니면, 최엄지일 것인가? 적어도 둘의 혼합일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양성성'(androgyny)이라는 주제다. 물론, 양성성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의 많은 부분이 이미 양성적이다. 예컨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오늘날 많은 10-20대 여성들이 하고 다니는 차림새는 소년들이나 하는 형태의 것들이었다. 숏컷을 하고 청바지에 티셔츠 하나 걸친 여자들의 모습을 19세기 사람이 와서 보다면, 아마 외계 행성에 온 줄 알 것이다. 2007년에만 해도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고은찬이라는 인물이 보여준 인물 유형은 '남장여자'라고 불렸다. 오늘날 동일한 경향은 '유니섹스' 스타일의 일부로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비슷한 경향 속에서 최근 남자 아이돌 그룹 멤버들은 미모를 관리하느라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있기도 하다. 그들이 설까치처럼 나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시스템에 의한 관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깡의 제왕 비로 되돌아가자. 외모에 있어서 사실 비는 설까치와 예쁜 남자 아이돌 사이의 '사라지는 매개자'(vanishing mediator)와 같다. 예컨대, 설까치의 얼굴을 중심에 둔 섬네일과 "깡"의 라이브 무대 장면에서 따온 비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섬네일을 비교해보라. 설까치는 결코 예쁘장하지 않다. 그는 아이돌 외모의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그에 비해 비는, 그 모든 남성적 근육의 과시에도 불구하고, 귀여운 소년과 같은, 이른바, '꾸러기 외모'를 지니고 있다. 그의 얼굴에는 어딘지 남성 이전의 것이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와 설까치는 동일하게 '깡다구' 가득찬 표정을 보여준다. 저 노려보는 듯한 눈매와 꽉다문 입술을 보라. 둘은 동일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 목표를 쟁취하고야말겠다는 얼굴이다. 여기서 여성적인 남자 아이돌의 외모가 오직 비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남성적 근육질 신체로부터만 태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예쁜 남자'는 오직 '거친 남자' 이후에만 온다.
'예쁜 남자'와 '거친 남자' 사이의 관계가 바로 맑스가 말한 상부구조(문화)와 하부구조(경제) 사이의 관계이지 않은가? 쉽게 말해보자. '그루밍'은 먹고 살만해야 할 수 있다. '그루밍하는 남자'의 시대 이전에 '거친 상남자'가 주로 어디서 발견되었을지 생각해보자. 그들이 바로 공장 노동자이지 않은가? 한국 사회의 '산업화 일꾼'들 말이다. 그들이 깡다구 있게 몸을 써서 나라의 경제를 일구어놓은 이후에야 귀여운 남자 아이돌들이 무대 위에 올라와 춤과 노래로 문화의 영역에서 봉사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공장 노동자들이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근육질이지 않다는 점을 하나 더 생각해봐야한다. 오히려 많은 노동자들은 거꾸로 왜소하기까지하다. 사실 '근육질의 거친 남자'라는 이미지는 '그루밍 시대'가 과거 산업화 시대 노동자 남성을 '코스메틱하게' 추억하는 방식이다. 과거 그저 '나무꾼'을 의미했을 뿐이 '럼버잭'(lumberjack)이 최근 미국에서 근육질의 남성미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는 방식을 보라. 다시 비의 외모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는 '남성 육체 노동자'와 '그루밍하는 남자'를 이어주는 '럼버 잭'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것이 '비'라는 인물 속에서 '근육질 몸'이 '꾸러기 얼굴'과 만나는 방식이다. 이러한 경향으로부터 도출해볼 수 있는 미래의 이상적 인간상은, 예컨대, 다음과 같다: 김태희의 얼굴에 비의 근육질 몸. 이것이 '스타들의 결혼'이 의미하는 사이보그적 세상의 모습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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